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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잠 Oct 12. 2021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웠다.

20대 후반에 새삼스럽게 방황 좀 하면 어때서?

  '찍어낸 듯이 똑같다.'라는 말이 있다.



  회사원이던 시절, 거래처인 인쇄소를 드나들며 알게 된 사실인데, 찍어내도 똑같은 건 없다고 한다. 같은 원본으로 같은 설정을 걸어 동일한 염료로 동일한 종이에 책을 찍어내도 기계는 매번 돌아가며 미세하게 다른 색깔을 뽑아낸다. 같은 인물도 조금은 붉은 얼굴로, 또 조금은 노란 얼굴로. 같은 배경도 조금은 흐릿하게, 또 조금은 또렷하게. 거대한 기계가 그토록 정교하게 찍어내는 책들조차 어느 하나 같지 않고 제각각 다르다는 것은 왠지, 위안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모른다. 나는 늦은 저녁 인쇄기의 굉음을 들으며 퇴사를 결심했다. 나의 삶이 다수가 말하는 정상의 삶에 똑같이 동화되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다.






  "저 퇴사할 겁니다."

  덤덤하게 내 계획을 발표하자 가족들, 팀원들, 회사 동기들, 친구들은 모두 뜯어말렸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퇴사를 단언했을 무렵, 회사는 대기업 계열사로 편입돼 탄탄대로가 예견돼 있었다. 기업의 주인이 바뀌는 혼란기에 갖은 고생은 다 해놓고 안정기에 접어드니까 나가겠다니. 단박에 이해되지 않는 나의 행동에 얘가 왜 이러나 싶었는지 나는 직장 상사들과 꽤나 여러 번 면담을 해야 했다.



  생각해보면 장점이 많은 일자리였다. 벌이가 괜찮았고, 팀원들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무엇보다 워드를 주로 쓰는 업무가 엑셀에 서툰 나에게는 꽤 적성에 맞았다. 하지만 그 장점들은 꼭 그만큼의 단점을 안고 있었다. 괜찮은 벌이를 위해 잦은 야근은 필수였고, 사람 좋은 선배들은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와 격무를 견뎌내고 있었다. "막내야, 너는 먼저 들어가." 사우나에서 쪽잠을 자며 며칠밤을 샌 선배들이 나를 배려해 퇴근을 종용했다. 밤 12시에 야간 할증이 붙은 택시를 타고 집에 가면서도 나는 자꾸만 미안해졌다. 글 쓰는 일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회사의 쓰임에 맞는 글들을 반복해서 생산하다 보니 좋았던 일이 싫어지는 순간의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좋은 사람들이 받는 고통으로 굴러가는 회사의 생리. 나는 그곳에서 미래를 꿈꿀 자신이 없었다.






  3년 가까이 다닌 회사를 그만두던 날은 아직도 작은 것들까지 또렷하게 기억난다. 날씨가 유독 맑아 내 자리에서 떠나기에 좋은 날이라는 느낌이 들었으면서도 회사 건물을 영영 나와 걸어갈 때에는 정수리에 꽂히는 초가을의 햇볕이 자꾸 따갑기만 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강남 한복판의 사람들 사이에서 오늘 퇴사한 사람은 나뿐이겠다는 생각이 들자 나 스스로가 좀 낯설어지기까지 했다. 그래도 앞으로 계속 가다 보니 회사가 시야에서 사라졌고 조금씩 신이 나기 시작했다.



  이직이 예정된 회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숨겨둔 돈이 많아 먹고살 걱정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나를 조금 덜 몰아세우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회사를 때려치우고 나온 이후, 나의 내면에 집중한 끝에 큰 성공과 견고한 명성을 얻었다는 스토리로 이 글이 끝난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여전히, 앞으로의 나를 궁금해하며 매일을 방황 중이다. 솔직히 가끔은 회사생활이 그리울 때도 있고, 더 안정적인 생활을 그려볼 때도 있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퇴사 이후에는 내가 나를 다른 잣대들에 맞춰 마구 몰아세우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썩 나쁘지 않은 결말이 아닐까. 공주님이 왕자님을 만나지 않더라도, 김잠이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세상에 찍어낸 듯이 똑같은 책은 없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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