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트리올의 시간 - 카멜리아
여행, 그 순간에 머물다
아주 연하고 싱그러운 초록의 물.
몬트리올의 티룸 카멜리아 시넨시스에서는 웰컴티로 중국 녹차를 내주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그 차는 맛도 희미하게 잊혀졌지만, 은은한 녹색빛 찻물이 담긴 찻잔을 받아 드는 순간의 청량함만은 잊혀지지 않는다.
실내는 조용하고 아늑했다. 갈색의 목재로 내부를 장식하고, 은은한 조명이 과하지 않아 편안했다. 자리에 앉아 메뉴를 보며 다양한 차 종류에 조금 고민하다 철관음을 주문했다. 차마다 우리는 방식이 다르다고 적혀 있었는데 철관음은 티팟에 담겨 나온다고 해서, 개완에 내줄 수 있겠느냐고 묻자 그렇게 해 주었다.
작은 다판에 개완과 컵, 그리고 뜨거운 물이 담긴 보온물병이 나왔다. 굳이 개완을 요청한 것은 그게 편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한 번도 다뤄본 적 없기 때문이었다. 차를 마시기 시작한 지 몇 년 되었지만 아직은 중국차보단 접근성이 좋은, 서양식으로 제다한 홍차를 주로 마시고 있어 개완은 들이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중국차는 개완에 마셔야 제대로 맛이 우러난다는 말에 과연 그런지 궁금했고, 이런 기회에 시도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처음 다뤄본 개완은 생각보다 뜨거워서 당황했다. 첫 탕은 20초를 우리라고 했지만 허둥거리며 다판에 찻물을 엎지르기도 하다가 결국 40초가 되어서야 찻잔에 차를 따라냈다. 자신 있게 주문하던 기세와 다르게 서툴기 그지없는 손동작을 본 서버가 다가와 정중하게 개완 사용법에 대한 팁을 알려 주었다. 조금 민망했지만 그 태도의 조심스러움이 고맙게 느껴졌다. 철관음의 푸릇한 풀내음이 향긋하게 번지고, 여릿한 맛이 싱그러웠다. 아주 깊이 있거나 복잡다단하지는 않았지만 가벼운 청량함이 기분 좋았다. 몇 번을 더 우려내면서 개완 사용법에도 아주 약간은 더 익숙해졌을까.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향이 좀 더 풍부하게 느껴졌다. 중국차를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한다면 하나쯤 들여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대여섯 번쯤 우려내자 물맛이 돌기 시작해 그쯤 멈추었다. 왠지 그대로 떠나기가 아쉬워 메뉴를 보니 테이스팅 세트가 있었다. 가만 보니 무제한 메뉴도 있는 듯했다 - 아마도 바에 앉아서, 서버가 내려주는 차를 계속 마실 수 있는 모양이었다. 마시고 싶은 차를 따로 지정해 주문할 수는 없다지만 어떤 차를 골라서 내어줄지 궁금해 다음번에 방문하게 되면 꼭 시도해보고 싶어졌다. 이번에는 이미 철관음으로 어느 정도 배가 부른 상태라 세 가지 종류가 나오는 테이스팅 세트를 주문하기로 했다. 그것도 사실 평소 양에 비하면 무리였지만 또 언제 올지 모르는데, 하는 마음과 호기심이 주문을 요구했다.
테이스팅 세트에는 정파나 세컨드 플러쉬와 Guei Fei라는 우롱, 그리고 Liu Bao 2016 Shi Shan Gu Shu라는 숙차가 포함되어 있었다. 정파나와 숙차는 무난한 인상이었는데 귀비라는 우롱이 무척 흥미로웠다. 옛 중국 황제의 여인에게서 이름을 따온 것이라는 설명이 곁들여졌는데 양귀비를 말하는가 싶다. 짙은 갈색빛의 수색과 계피향 진득한 달큰함. 설명에는 시나몬 번을 연상시키는 향이라고 했는데, 마실수록 아무래도 동양적인 계피향에 흑설탕이 더해진 듯한 달큰함이 어쩐지 호떡을 연상시켰다. 달콤한 떡 같은 동양식 디저트와 잘 어울릴 듯한 맛.
여유로운 티타임을 즐기고, 인상적이었던 철관음과 귀비를 구매하려 했더니 바로 옆의 티샵으로 안내했다. 티샵은 바로 옆집이었지만 분위기는 꽤 달랐다. 훨씬 밝고 모던한 내부가 어쩐지 약국을 연상시켰다. 벽을 가득 채운 틴들을 보고 있자니 웰컴 티라며 중국 녹차를 내주었다. 티룸에서 받은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한 모금 마시고 바로 옆 티룸에서 차를 마시고 오는 길인데 차가 인상적이어서 좀 구매하려 한다 말하고 이름을 댔다. 커다란 틴의 철관음과 귀비를 꺼내 향을 맡게 해 주고 팩에 담아 포장해주었다. 손으로 직접 이름과 우림법을 적어주다가 잘못 쓴 듯 새로 봉투를 꺼내며, 차를 너무 많이 마셔서 티 드렁크 (tea drunk) 상태예요, 웃음 짓는 직원을 보는 내 입가에도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
차가 담긴 쇼핑백을 들고 거리로 나왔을 때 너무 밝지 않은 오후의 공기가 편안하게 느껴졌다. 차를 많이 마셔서인지 어딘가 조금 들뜬 기분이 들어, 이게 바로 티 드렁크 (tea drunk) 상태인가 했다. 한산했던 거리는 어느새 북적이고 있었고, 나는 조성진이 연주하는 드뷔시의 영상, '물에 비치는 그림자 (Reflets dan l'eau)'를 들으며 조금은 익숙해진 몬트리올의 경사진 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단아하고도 투명하게 울리는 피아노와, 구름 사이로 찻물처럼 은은하게 번진 햇빛을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