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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로 Sep 27. 2021

몬트리올의 시간 - 오래된 몬트리올

여행, 그 순간에 머물다

축축하게 젖은 잿빛의 공기.


비 온 뒤의 올드 몬트리올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경사진 길을 오르는데 습기를 머금은 공기의 무게가 유독 버겁게 느껴졌다. 노트르담 성당 앞 북적이는 인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 옆에 난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은 여전했다. 길을 따라 무심코 걷다 보니 호수가 나왔지만, 벤치가 전부 빗물에 젖어있어 앉을 수는 없었다. 가만히 그 풍경을 바라보다 문득 몇 년 전 Y와 함께 이곳에 왔던 기억을 떠올렸다. 어두운 밤, 인적 드문 올드 몬트리올을 겁도 없이 둘이서 걸었던 시간들. 검게 내려앉은 밤의 공기에 가로등도 몇 없어 조금은 불안했지만,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는 척할 수 있을 만큼 우리는 여행의 즐거움으로 들떠 있었다. 숨 쉴 틈은 있나 싶게 조잘거리던, 이젠 내용조차 희미한 대화의 기억. 그리고 비스듬히 올려다보던 노트르담의 화려한 조명, 이상할 정도로 찬란하게 느껴졌던.


허기가 느껴져 간단히 요기할 게 없나 찾아봤다. 점심 예약까지 남은 시간이 애매하니 가벼운 걸로. Olive et Gourmando의 크로아상이 유명하다기에 그곳으로 향했다. 간판은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지나치게 될 정도로 미니멀했지만 막상 들어가니 사람은 한가득했고 왁자지껄한 활기가 공기 중을 떠돌고 있었다. 잠시 그 소란스러움에 넋을 잃고 있다가 치즈 크로아상을 하나 사서 나왔다. 먹을 것을 막상 손에 쥐고 나니 허기가 이상하게 사라지는 느낌이었지만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뤼예르 치즈가 듬뿍 들어있어 짭짜름하고 고소했지만 생각보단 살짝 질깃했다.


다시 좁은 골목길을 정처 없이 걸었다. '올드'가 앞에 붙은 여느 관광지역들이 그러하듯 작은 상점들이 곳곳에 있었지만 별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물론 지난 몇 번의 방문에서 이미 충분히 가 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호기심을 느끼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고, 최근 들어 딱히 관심 없는 상점에는 굳이 들어가지 않는 성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나는 젖은 도시에서 건조한 산책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골목과 골목 사이에 난 좁은 길에 들어섰다. 건물 사이의 작은 공간에 키가 큰 나무들과 가로등, 그리고 작은 벤치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왠지 모르게 무척 내밀한 느낌을 주는 공간이었다. 분명 골목 사이에 나 있어 지나가는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으나, 그럼에도 무척 조용한. 나는 비어있는 젖은 벤치를 보며 드뷔시의 판화 중 첫 번째 곡, '탑 (Pagodes)'을 떠올렸다. 지극히 서양적인 정서로 그려낸 동양의 색채, 아련한 멜로디와 마치 풍경소리처럼 울리는 피아노의 맑은 음색. 그리고 그 안에서 이별하는 사람들.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자와 여전히 사랑하기에 헤어져야 하는 자의 마지막 순간. 아무리 건조한 정서를 가진 사람이라도 울지 않을 수 없을, 그런 아릿한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봄이 오고, 나무는 연초록으로 더없이 생생하게 물들어가도 누군가는 생이 끊어지는 것 같은 마지막을 겪어야 하며,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가로등이 켜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 또한 언젠가는 지나가 희미해지리라.


한참을 그 젖은 벤치를 들여다보다 그곳을 떠났다. 큰길로 나오자 사람들은 북적거렸고 나는 헤드폰을 꺼내 라파우 블레하츠가 연주하는 드뷔시를 들었다. 귓속으로 시린 바람소리 같은 그의 피아노가 흘러나오고, 그에 마음이 차갑게 조여들었다. 발 밑의 길은 여전히 축축하고 습한 공기는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비어있는 공간에는 바람이 불어도 종이 울리지 않는 것일까. 다만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는 건조한 마음만이 나를 투명하게 바라보았다.


성당에서 종소리가 울려왔다. 그곳은 비어있지 않은 것인지 의문하며 또다시, 오래된 몬트리올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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