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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로 Oct 20. 2021

몬트리올의 시간 - 활과 화살

여행, 그 순간에 머물다

디페랑스 (différence).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적힌 이름에 이끌려 카페에 들어갔다. 에스프레소를 주문하고 진열된 커피빈을 둘러보니 종류가 꽤 여럿이었다. 직원에게 물어 오늘의 커피는 무엇으로 내리냐고 물어보니 Bows and Arrows의 The Hathaway라고. 활과 화살이라, 독특한 이름이다 싶었다. 처음 듣는 로스터리라 검색해보니 밴쿠버의 것이었다. 밴쿠버에서 로스팅한 커피를 몬트리올에서 처음 마셔보는구나.


진하게 내린 커피에는 크레마가 꽤 두껍게 얹혀있어 보기만 해도 즐거웠다. 마셔보니 앵두와 비슷한 새큼함이 강하게 나면서 그 뒤를 다크 초콜릿 같은 쌉싸름한 고소함이 감싸고 있었다. 균형이 잘 잡힌 맛이라 마시는 재미가 있었다. 토요일 아침, 작은 카페에는 고작 두어 명이 홀로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조용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순간 카페 안의 시선들이 허공에서 한 데 모였다. 화재 경보인가? 다들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표정을 짓다가 주섬주섬 소지품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화재를 연상시키는 신호는 그 어느 곳에도 없었지만, 카페 안의 알람은 멈추지 않았다. 직원 여자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른 손님들은 어느새 다 떠나고 나와 그 여자만 태연한 표정으로 카페 앞을 서성거렸다. 전화를 끊은 여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죠?

누가 화재 경보를 울린 모양이에요.

진짜로 불이 난 걸까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앳된 얼굴의 여자는 친절하지도 무례하지도 않게 대답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데님 재킷이 잘 어울리는 말간 얼굴에 눈빛이 공허했다. 여자가 담배를 피워 무는 것을 보며 나는 몇 걸음 떨어져 텅 빈 카페 안을 들여다보았다. 짧은 여행의 마지막 아침 시간을 커피나 마시며 여유롭게 보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지 싶어졌다. 그나마 커피는 맛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며, 나도 어깨를 으쓱했다.


호텔로 돌아가는데 뒤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소방차 몇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문득 멈춰서 그 모습을 보았다. 전에 기숙사에 살 때 거짓 화재 경보가 몇 번이고 울렸던 기억이 났다. 유독 밤에 울려대던 그 소음. 처음 몇 번은 건물 밖으로 나갔지만, 그 후에는 귀찮아져 베개로 귀를 막고 알람이 멈추기를 기다렸던 기억. 소방관들은 몇 번씩이고 이런 거짓 경보에 출동해야 하겠지. 모두가 잠든 시간에도 누군가의 장난일지 모르는 화재 경보 때문에 출동해야 하는, 그들의 고단한 밤들.


방으로 돌아와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가 부르는 Carlo, Ascolta를 들었다.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에서, 로드리고가 카를로 대신 총을 맞고 죽어가며 부르는 노래. 젊은 날의 그는 아름답고도 단호하게 그 노래를 마무리지었고,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는 무엇인가 아쉬운 듯 아련하게 맺고는 했다. 아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야 했던 그를 알기 때문일까. 신념을 위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희생을 자처한 로드리고, 죽어가면서도 카를로가 플랑드르를 구원해주기를 바라며 고통 속에서 행복을 노래하는 그의 모습이 슬프고도 아름답게 빛났다. 생을 노래하고, 죽음을 노래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알지 못하면서 그저 그 아름다움에 취한 채, 몬트리올에서의 시간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짧게 머물렀다가 떠날 것이기에 아련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알았다.


캐리어의 손잡이를 쥐고 호텔방을 나서기 전 그 안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처음 도착했을 때 낯설게 느껴졌던 공간은 고작 며칠 사이 익숙해져 있었다. 눈으로 한 번 더 둘러보고 나는 돌아섰다.


어느새 떠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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