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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로 Oct 12. 2021

몬트리올의 시간 - 레이디 맥베스

여행, 그 순간에 머물다


화려하고 장식적인 흰색의 드레스. 


아랫단이 거의 직사각형에 가까울 정도로 과하게 부풀려진, 마치 갑옷과도 같은 의상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여인의 모습. 왕관이 머리 위로 내려와 왕비의 모습을 완성시키는 순간, 하얀 드레스는 불길에 사로잡힌다. 타오르는 드레스 안에서도 위엄을 잃지 않던 여인은 그러나, 속이 비치도록 얇은 하얀 실크만을 걸친 채 바닥으로 쓰러진다. 잠시 후 정신이 든 여인은 일어나 자신의 손을, 팔을, 문지른다. 하지만 지워지지 않는다. 지워질 수 없다. 숨을 쉬는 곳마다 붉은 피, 공기처럼 주위를 맴도는 피,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피는 그녀를 지배한다. 그녀는 헤어날 수 없는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결국, 다시 쓰러지고 만다. 그리고 서서히, 희미하게,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몬트리올 미술관에서는 디자이너 티에리 머글러의 전시를 하고 있었다. 그의 독특한, 그로테스크하고 때로 외계 생명체를 떠올리게도 하는 의상들은 확실히 무대예술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실제로 연극의 의상을 담당했던 적이 있다는 건 몰랐다. 그가 디자인한 '맥베스'의 의상들은 보기만 해도 인물의 성격이 느껴질 정도로 개성 넘치고 화려했지만, 저런 의상을 입고 과연 공연이 가능할까 싶게 거대하고 무거워 보였다. 그중에서도 레이디 맥베스의 드레스는 부풀리고 각진 어깨와 아랫단이 옷이라기보다 조각에 가깝다 싶은 느낌이었다. 공연을 해야 하는 배우는 꽤나 고생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저런 의상으로 가득 찬 무대는 얼마나 황홀할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문득, 저런 의상을 입고 오페라를 공연한다면 어떨까 싶어졌다. 고전적인 연출에서 점점 멀어지며, 원작의 시대 배경을 현대로 옮겨와 비교적 간편한 의상을 입고 공연하는 게 요즘 오페라의 트렌드이고 나는 모던한 프로덕션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가끔 제피렐리가 연출한 투란도트 같은 걸 보면 그 화려함에 감탄하게 된다. 그러니 만약 베르디의 맥베스를, 머글러의 의상과 함께 연출한다면? 강렬한 공연이 될 것 같다. 특히, 개인적으로 맥베스보다 레이디 맥베스가 더욱 돋보인다고 생각하는 베르디의 오페라에서는. 얼마 전 메트에서 공연한 안나 네트렙코의 레이디 맥베스를 보면서 그녀의 짙은 벨벳 같은 목소리가 상당히 인상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드레스와 함께라면 더욱 강렬하게 다가올 것 같다. 어쩐지 네트렙코는 저런 무겁고 거대한 드레스는 절대 안 입겠다고 할 것 같긴 하지만.


전시장에 가득한 머글러의 의상들 - 거대한 챙이 넓게 드리워진 검은색 모자, 끝단에 달린 검은 털이 섬짓한 느낌을 주는 얼룩말 무늬 장갑, 얼굴 전면을 가리는 금빛의 마스크 같은 것들을 보면서 문득 쓸쓸해졌다. 이토록 화려한 것들에 내려앉은 시간의 흔적. 한때는 선명했을 색채가 어느덧 희부옇게 바래고, 처음 만들었을 때 빳빳하게 반짝였을 소재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광택. 데이빗 보위나 칼라 브루니가 입었던 의상들, 이제는 누군가에게 입혀지는 옷이라기보단 미술관의 전시품으로 더 어울리는 것들을 보면서 지나가는 시간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미술관을 나오며, 마리아 칼라스가 부르는 '여기 아직도 핏자국이 (Una macchia e qui tuttora!)'를 들었다. 칼라스의 섬짓하도록 극적이고 거친 목소리는 어떤 노래를 불러도 깊은 인상을 남기지만, 그녀가 부르는 레이디 맥베스의 몰입도는 유독 강력하다. 감당하기 힘든 죄의 무게에 짓눌려 끝내 정신을 놓은 채, 몽유병에 걸려 밤 속을 헤매는 레이디 맥베스의 불안과 죄책감, 고통과 슬픔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탐욕에 눈이 멀어 살인을 교사한 명백한 죄인, 현대를 살아간다면 엄연히 형벌을 받아야 할 인물의 노래가 이토록 아름다워도 되는 것일까. 그를 위해 만든 드레스가 그토록 화려하게 만들어져 미술관에 전시되어도 되는 것일까. 예술이란, 그리고 아름다움이란, 때로 이토록 복잡한 것을. 새삼 생각해보곤 한다.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내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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