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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선화 Mar 16. 2024

용서


 상담하다 보면, 살아오는 동안에 일어났던 사건 중에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나 사람들로 인해서 엄청난 짐을 지고 살거나 스스로 병을 얻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천국이 아니기에 상상 그 이상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그래서 몸과 마음을 다치는 일이 거의 모든 사람에게 흔히 발생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새로운 이해가 생겨나거나 아니면 잊어버리거나 흘려버리지만 그렇게 되지 않고 앙금으로 남아있거나 옹이가 박힌 경우가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가해자라 여기는 사람은 기억하지도 못하고 다 잊어버렸는데 당사자만이 스스로 희생자가 되어 혼자 안에서 씨름하고 싸움을 이어가며 자신의 삶을 억압하고 망가뜨리는 사람도 있다. 20년 전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되살려 아직도 분노하고 억울해하기도 하고, 자신을 돌봐주지 못한 치매에 걸린 부모를 여전히 탓하기도 한다. 얼마나 어리석고 이기적인 태도인가? 

    

 이런 경우 누가 진짜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보통 용서라고 하면 뭔가 잘못을 저지른 가해자를 희생자가 일어났던 일 모두를 받아들이며 더는 개의치 않으며 스스로 자유로워지겠다는 것을 말한다. 듣기만 해도 어떤 악업의 고리가 풀리는 것 같은 후련함과 다행스러움이 인다.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용서하고 흘려버리지 못해 지속해서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는 것은 당사자에게는 큰 부담이 되며 삶의 걸림돌이 된다. 그러기에 용서받는 사람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용서하는 사람 본인을 위해서도 털어버리는 것이 짐을 덜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이다.  

    

 그래서 상처받은 일이나 사람에 대한 가장 큰 복수가 다 잊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잘 사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 그 모든 악연의 기억에서 벗어나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유로워지는 것이 가해자에게 전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가 될 것이다. 사는 동안 어떤 일이 벌어져도 희생자가 되지 않고 여기에 더해서 일어난 일로부터 새롭게 배우고 깨달으며 성숙해 가는 것이 진정한 성숙의 길이며 영적 자세라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스스로 희생되었다고 느낀다면 그것이 가해자가 주는 최고의 형벌이며 굴레가 아니겠는가? 어떤 일이 벌어져도 스스로가 희생자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누구도 나에게 치명적 해를 입힐 수 없을 것이다. 용서한다는 말에는 내가 희생되었고 피해를 입었지만, 이제는 다 털겠다는 것이다. 과연 다른 사람이 나를 희생자로 만드는가 아니면 내가 스스로 희생자가 되었는가?     

 과연 위해를 가한 사람은 애초에 그럴 의도가 있었을까? 그렇다 해도 내 삶의 결정권을 상대에게 주어버린 사람은 바로 나 자신 아닌가? 그렇다면 누구를 먼저 용서해야 하는가? 과연 용서의 대상이 저 멀리 아니면 가까이 있는 나쁜 사람들인가? 아니면 스스로 희생자가 되어 가까이 있는 천국을 누리지 못하는 자신인가?   

  

 삶이 전하는 그 많은 축복을 인지하지 못하고 누리지도 못하면서, 당사자가 다른 사람에게 던진 많은 어둠은 기억조차 못 하면서, 타인에게 피해당했고 희생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정당한 것일까? 같은 상황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서로에게 피해를 가하는 자리가 아니라 창조적 나눔과 빛을 발산할 좋은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좋은 기회를 알아채지 못하고 놓쳐버린 나의 몽매함을 먼저 용서하고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내 삶의 자세를 바르게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을 고치려 들거나 응징하려는 불가능한 일로 내 삶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니까.

     

 언제나 내 삶의 방향에 관한 결정은 내가 가지며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태도로 임한다면 일어난 상황을 해석하고 다루는 법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어릴 적엔 몰라서 그랬다 쳐도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된 지금은 ‘그 어느 것도 나를 흔들지 못한다’라는 말을 스스로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내 삶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진다는 말은, 내 생명의 본질과 하늘의 유업을 잊지 않겠다는 말은, 결국 이런 지금과 같은 상황과 여건 속에서도 하늘을 이곳에 드러나게 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땅의 어둠에 끌리지 않고 하늘의 빛을 전하고 발함으로써 주변을 밝혀가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를, 나를 통해서 하늘을, 생명을 이 땅에 온전히 표현하고 그럼으로써 가까이 있는 천국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생명의 목적이다. 

 어둠이 짙으면 별은 더욱 찬연히 빛나며 빛에 대한 인간의 염원도 그만큼 더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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