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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정 Mar 06. 2021

갈매못 순교 성지의 사랑


해외여행과 성지순례가 모두 막혀버린 지금, 한국에 있는 성지들을 찾아가 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충청남도 보령에 있는 갈매못 순교성지를 추천받아 다녀왔습니다.

사실 가기 전엔 어딘지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가 본 경험이 있는 여행 가이드가 너무 좋다길래, 그냥 홈페이지에 미사 시간만 확인하고 따라갔었는데, 가봤더니 감탄사가 나오는 곳이더라고요.


위치는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오천 해안로 610

알고 봤더니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바닷가에 있는 성지라고 해요. 도착한 날 비가 많이 오고 있었는데, 이렇게 예수님께서 두 팔 벌려 환영해 주셨습니다


갈매못 순교성지는 처참했던 한국 교회 역사를 생생하게 담고 있는 곳입니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강행하여 무려 8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던 병인박해(1866년) 때, 신자들의 희생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기 위해 다블뤼 주교님과 두 신부님이 스스로 자수하여 체포되십니다. 평소 다블뤼 주교님을 도와 저술 작업도 하고, 신자들을 돌보던 황석두 루카 회장은 '다블뤼 주교님이 체포되셨는데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한양까지 따라나섰으며, 장주기 요셉 회장 역시 신부님과 신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다 체포되셨습니다.


체포된 세 분의 프랑스 성직자와 두 분 회장님은 한양에서 처형이 이루어질 예정이었으나, 당시 병인년 3월, 고종의 국혼이 한 달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무당들이 국혼을 앞두고 한양에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좋지 않으니, 사형수들을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250리 밖으로 내보내어 형을 집행케 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다섯 분은 갈매못까지 걸어서 내려오시게 됩니다.  



형장은 바닷가 모래밭이었고, 처형된 후 다섯 분의 머리가 매달리자 은빛 무지개 다섯 개가 떴다고 하죠. 처형이 이루어진 장소는 이렇게 순교성인 비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다블뤼 주교님을 비롯한 다섯 분은, 1984년 5월 한국을 찾으셨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한국 순교 성인 103위'에 포함하시어 시성 되셨습니다. 그런데 더 마음이 아픈 건 이 갈매못에서 5백여 명의 신앙선조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입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이름을 모르고, 신원이 밝혀진 열 분 중 다섯 분이 성인품에 오르셨어요.


고통 그 자체인 역사.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신 후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 고통이 대한민국 역사 속에서 그대로 재현됐던 게 아닌가 싶은 느낌이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어 무덤에 묻히시기까지 14가지 지점에 머무르며 바치는 <십자가의 길> 기도가 있는데요, 이 곳 갈매못 순교성지에는 14가지 주제마다 조각상이 만들어져 있어서 그 순간순간의 아픔에 더욱 깊고 생생하게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제 4처,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만나심을 묵상합시다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걸어가시는 괴로운 십자가의 길에서 어머니 마리아를 만나신 예수님. 성모님이 아들 예수님을 애틋하게 바라보시며 무슨 얘기 하시는 거 같은데, 너무 절절해서 한참을 보게 되었어요


그리고 대성전으로 올라가 봤는데

도착했던 날은 미사도 없고, 사람도 없었습니다.

단아하면서도 아름다운 성전을 조용히 느꼈던 시간.

갈매못 성지 대성전 내부

함께 간 멤버들끼리, 그 어떤 방해도 없이, 성전 벽에 있는 <십자가의 길> 그림을 보며, 함께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쳤습니다


성전 옆에는 다섯 분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기도 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비가 추적추적 왔지만, 나름의 운치를 느끼며, 순교성인들의 마음을 묵상했던 하루가 지나고, 그다음 날


날씨가 언제 흐렸나 싶게, 파란 하늘과 예쁜 구름이 등장했습니다. 마치 이탈리아 시칠리아, 프랑스 깐느 같지만 아니에요. 충남 보령이었답니다.


그리하여 일찍 달려가 본 갈매못 순교 성지. 파란 하늘과 함께 다시 반겨주시는 예수님


그리고, <십자가의 길> 조각상을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하여 다시 한번 세심하게 바라봤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걷다가 기력이 떨어져 넘어지신 예수님


애틋한 성모님을 만나신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드리는 간절한 베로니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저 구멍만큼 우리의 가슴에도 난 상처


제1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이 부분에선 모두가 무릎을 꿇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내리는 제자들, 그리고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 전날 비가 와서 저곳에 물이 고여있었는데,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을 바라본 성모님과 여인들의 눈물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미사를 드렸는데요, 이 갈매못 순교성지의 하이라이트는 미사였어요. 미사가 끝난 뒤, 제대 뒤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열어주시는데, 세상에, 바다가 나오는 거예요.


감탄이 절로 나오는 장면! 그런데, 저 바다에는 이름 모를 순교자분들 150여 명 이상이 순장되었다고 해요. 그림 같지만 아픔이 서린 바다를 보며 기도드렸습니다.

어떤 말로도 표현이 안 되는 처참한 역사일 수 있지만, 그 순간을 통해 우리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놀랍게도 한국 천주교는 이처럼 이어오고 있습니다. 두렵고 무서웠던 순간, 순교 성인들을 지켜주었던 힘은 무엇일까요?


흔들림 없는 사랑.


오로지 사랑만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이뤄내는 기적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세상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인 거 같고, 또 저는 사랑할 용기도 없는 듯합니다. 상처 받은 마음은 쉽게 치유되지 않아, 예수님께 여러 번 치유해달라고 말씀드립니다. 그 과정을 통해 조금씩 알아가는 건, 나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 불쌍한 종. 예수님 사랑은 받고 있는, 연약하고 가녀린 힘없는 종.

그래서, 아무런 권한도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사랑받기에 기쁘게 걸어갈 수 있는 사람

저의 정체성이 이렇더라고요

이번에 순교성지 순례하며 성인들 얘기에 마음도 아팠지만, 성지 가기 전, 그리고 돌아오는 길, 함께한 멤버들과 많이 웃었거든요. 그렇게 웃는 과정이 바로 사랑받고 있다는 표징이겠죠? 웃음의 시간을 만들어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려요.


예전에 저는 화려한 불빛 아래 당연히 찬란하게 지낼 거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었고, 사랑만 품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런 묵상 속에서 감히 순교 성인들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순 없지만, 그래도, 기도하며, 힘들지만 열심히 걸어가 보려고요

갈매못 순교성지에서, 또 하나의 사랑을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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