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이 끝나고 일을 다시 시작하면서 어쩔 수 없이 근처 사는 친정부모님의 손을 빌리게 됐다. 등원까지는 남편과 둘이 어떻게든 해보겠다만, 4시반에 하원하는 아이들을 데리러 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물론 맞벌이 돌봄이 잘 되어있어 퇴근하고 7시쯤에 하원시켜도 되지만, 친구들이 다 떠나고 텅 빈 교실에 남아있게 하는게 너무 마음이 아파 염치불구하고 부모님께 부탁을 드렸다.
두 분은 흔쾌히 아이들 하원과 저녁, 목욕을 담당하겠다고 하셨다. 아빠는 일을 하고 계시지만 퇴근시간을 당겨서 아이들 하원과 돌봄을 자처하셨다. 그렇게 든든한 지원군을 등에 업고 우리 부부는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7세,4세 남아 둘의 하원 후 저녁타임은 정말이지 양육자의 엄청난 체력을 요구한다. 셔틀도 없는 유치원, 어린이집이라 차량으로 각각 데리러가는것부터 해서, 집에 와서 아이들 목욕시키고 밥먹이고 간식주고 놀아주는게 부모도 힘든데 하물며 연세든 조부모가 하기에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엄마는 퇴근하고 돌아오는 딸과 사위를 위해 저녁상을 거하게 차려놓으시고, 퇴근한 딸이 집안일로 다시 출근하는게 안쓰러우셔서 집안에 먼지 한톨, 빨래 한점 남아있지 않게 싹 치워놓으신다. 식기세척기가 있으니 설거지는 하지마시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딸래미가 그릇 집어넣는것도 힘들까봐 손설거지를 싹 해놓으신다.(식세기 작동법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으신다;; 어른들에게는 새로운 가전을 익히는게 손설거지보다 더 힘든 일인듯하다)
그런 부모에게 감사한 마음을 이루말할 수 있을까. 손주들을 사랑으로 돌봐주시고, 일하느라 힘든 딸래미 걱정에 노심초사 하시는 분들. 쥐똥만한 용돈 조금 드리는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서 더욱 죄송할 따름이다.
그런데 자식 맡긴 죄인이지만.... 뭐가 잘났다고 그와중에 서운함이 피어난다. 둘째가 아직 아기라 귀엽고 이쁘긴 하지만, 두분 다 둘째를 유독 예뻐하신다. 큰애한테 대하는것과 다른게 티가 날 정도로. 큰애가 너무 개구쟁이고 에너지가 넘쳐 다루기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어린데, 조금만 장난을 쳐도 불호령을 쏟아내신다. 아 물론 내가 혼낼때는 헐크 저리가라로 괴성을 지르며 혼낸다. 그렇지만 엄마인 나는 그래도 되지만 내자식이 나 아닌 다른사람한테(설령 조부모라도) 큰소리로 야단맞는건 안쓰러운 일 아닌가! 참으로 내로남불이지만 자식새끼를 대하는 엄마의 마음이 그렇다. 혼내도 내가 혼내지, 아니 조부모인데 그냥 사랑으로 좀 감싸주지 저렇게 소리를 꽥 지를 일인가, 같은 행동을 해도 둘째한테는 오구오구 하시면서, 큰애가 다 눈치채고 있을텐데 얼마나 서운할까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나 입도 뻥끗 하지 않는다.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주제에 그런 불만을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그 날은 너무했다 싶었다. 늦게 퇴근해서 돌아와 엄마아빠를 얼른 보내드리고, 엄마가 내 분량만 남겨놓은(그러나 매우 푸짐한) 저녁상을 먹고 있을때였다. 담백하고 고소한 생선구이가 있어 맛있게 발라먹고 있는데 큰애가 다가왔다.
"엄마. 나도 한입 줘. 나 아까 생선 못먹었어."
"왜? 함미가 생선 안발라줬어?"
"응. 함미는 동생 밥먹이느라고 바빴어."
"그럼 하비는?"
"하비는 자기가 먹을 생선만 바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어."
"?????????"
설마? 했지만 사실 우리아빠는 그러고도 남을 분이다. 평소에 살갑게 누굴 챙기는 성격이 아니고, 본인 입맛이 최우선인 분이다. 속으로는 아이들을 엄청 사랑하시겠지만 사랑은 사랑일 뿐, 본인을 희생해서 아이들을 위하는 법이 없으시다. 큰애랑 맨날 티비 리모컨 가지고 싸우시고, 아이들이 먹고싶다고 하는 메뉴도 본인 스타일이 아니면 단칼에 거절하시는 분. 그렇지, 누굴 위해 생선을 발라본 적이 평생 없으신 분이니 본인 생선만 발라서 드셨겠지. 그래도 그렇지, 7살 아이가 못하는 일은 좀 도와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럴때는 시아버지랑 너무나 비교된다. 시아버지는 평소 다정하거나 자상한 이미지는 아닌데, 가족을 위해 모든걸 기꺼이 내어주는 스타일이다. 시댁에 가면 날 식탁에 제일 먼저 앉혀두고 밥을 먹게 하시고, 본인은 따로 차려진 애들 밥상 앞에 자리잡고 앉으셔서 생선살을 바르고 밥과 국에 얹어 손수 먹이신다. 내가 아이들의 방해 없이 편하게 음식을 다 먹고 일어나면 그제서야 식탁에 앉으셔서 남은 반찬과 대충 드시고는 후딱 일어나서 설거지까지 도맡아 하신다. 그야말로 시댁에 가면 나도 아이들도 손에 물한방울 안묻히고 귀한 대접을 받고 온다.
시댁이었다면, 이 고소하고 맛있는 생선 본인 입으로는 한점도 가져가지 않으시고 다 아이들을 위해 발라주시고 먹여주셨을텐데. 우리 아빠는 본인이 드실 생선만 발라서 드셨구나. 옆에서 날름 날름 잘도 받아먹는 아이가 애틋하고 안쓰러웠다. 먹고싶었을텐데, 아무도 생선을 발라주지 않아서 못먹고 나만 기다렸겠구나.
다음날 농담 건네듯이 엄마한테 물어봤다. 어제 그런 일이 있었냐 했더니 깔깔 웃으시면서, 함미가 눈이 침침해서 가시를 못발라주니 엄마 오면 엄마한테 발라달라 해서 먹으라고 했다는 거였다. 그리고 하비는 애랑 좀 투닥거리는 것 같더니 그렇게 말했나보네~ 하고 웃으며 넘어갔다.
나도 뭐 크게 문제삼을 일은 아니니 그냥 그런가보다 했는데, 다음날 이 얘길 전해들은 아빠가 발끈하셨다. 본인은 절대 그런말을 한 적이 없다는거였다. 그렇다면 우리 애가 없는말을 지어냈다는 얘긴데, 애가 그럴리가 없을텐데...? 하면서 아이를 쳐다보니 애가 조금 당황한 듯이 허둥대며 말했다.
"아니~ 하비가 그렇게 말한게 아니고 하비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거라는 뜻이었어!"
그렇다. 소통의 오류가 조금 있기는 했지만, 아이는 할아버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자기가 먹을 생선만 바를 수 있는 사람이지 않은가 정말로! 물론 아이가 생선을 먹으려는데 '가시가 위험하니 시력 좋은 엄마한테 발라달라 해라' 라는 할머니의 말을 듣고 아빠도 아마 발라주려는 시도를 하지 않으신 걸 거다. 두 분은 딱히 잘못이 없었으나, 아이가 할아버지를 저렇게 생각하고 있다는게 정말 놀라웠다. 아이의 통찰력은 정말 대단하다!
아무리 사랑받는다 해도, 매일 부딪히는 양육의 현장에서 때론 혼나기도 하고 때론 서운한 일도 생기겠지. 엄마가 직접 보살피지 못하는 아이의 작은 서러움 같은게 없을 수 없다. 나와 남편이 집에 들어서는 순간, 미묘하게 기세등등해지고 더 천방지축으로 구는 아이들을 보면서, 엄마아빠도 기가막혀 하신다. 평소에 기를 죽이는것도 아닌데, 사랑으로만 대하는데도 자기 부모 오면 애들이 기가 살아난다고. 아마도 부모한테만 가능한 '양껏 응석부리기'가 부족해서일거다. 일하는 엄마라 미안하고 짠하고, 고생하시는 부모님께도 죄송하고... 여러모로 또 눈물겨운 워킹맘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