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이 투영되면 어려운 이야기
천방지축인 두 아들을 키우며 힘든건 둘째치고, 이제 큰애가 초등학교에 갈 나이가 되면서 걱정이 점차 들기 시작했다. 과연 이 아이가 학창시절 내내 나와 트러블없이 잘 지낼 수 있을까, 학교에서 선생님 말씀은 잘 들을까, 착실하게 공부하며 학교를 다닐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가만 보면 언니가 키우는 여자 조카 둘은 어쨌거나 엄마 말을 듣고 학교에서 하라는대로 하며, 숙제나 과제를 하기싫어는 해도 다 마치고 제 할일을 차근차근 해낸다. 내 아이는 그게 과연 가능할까 싶은 수준인데, 예를들어 숙제가 있다는것 자체를 잊어먹거나, 내가 숙제를 하라고 해도 안할것 같은 느낌, 학교 끝나면 집으로 곧장 와라 해도 안오고 놀이터에서 놀고 탕후루 사먹고 그럴 것 같은 느낌이 드는거다.
딸 둘을 키운 우리엄마도 이런 고민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고 한다. 말 잘듣는 착한 딸들이었으니까. 나의 가장 큰 반항이라곤 고작 중학생때 귀를 뚫어왔다는 것 정도였으니까. 그때 내 귀를 보고 털썩 주저앉던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런 일에 주저앉을 정도로 세상 곱게 살아오신 우리 엄마.
물론 딸이라고 얌전하고 말 잘듣고, 아들이라고 사고뭉치 말 안듣고 맘고생 시킨다는건 아니다. 그저 느낌상 딸이 아들보다는 좀 더 안전하고 차분하게 자라지 않을까 하는 것 뿐. 이런 고민을 하는 내게 엄마가 말했다.
"내가 요즘 신부님이 하는 유튜브를 보는데, 거기서 그러더라. 자식 키울때 이런 말을 해주면 자식이 절대 엇나가지 않는대."
"그게 뭔데?"
"사랑해. 넌 자랑스러워. 믿는다. 이 세가지만 말해주면 된대."
좋은 말이다. 그런데 문득, 엄마는 나한테 이런 말을 해줬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나한테 시키지 말고 엄마부터 해. 나 아직 질풍노도의 시기 안끝났어. 평생이 질풍노도의 시기니까 엄마부터 나한테 그런말좀 해주지?
"호호호~ 얘~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마~ 너 나 실망시킬거야?"
나를 지지해주는 세 마디를 해달라니까 실망시키지 말라는 말 부터 한다. 엄마는 항상 그랬다. 내가 뭐든 잘해야하고, 못하면 실망하고, 엄마를 실망시키면 안되고.
아들을 낳지 못해 죄인 취급하는 시댁 분위기 속에서 내가 열아들 부럽지 않은 역할을 해주길 바랬던 엄마였다. 누구보다도 번듯하게 딸을 키웠다는 자존심 하나로 아들 없는 설움을 이겨내려던 엄마였다.
학창시절 공부 잘하는 딸을 동네방네 자랑하면서 아들이 없으면 어떠냐, 저렇게 똑똑한 딸이 있는데, 라는 말을 들으며 기뻐하던 엄마였다. 그래서 난 다음번에도 전교1등을 해야했고, 시험에서 몇개 틀려오면 너 이렇게 엄마를 실망시킬거냐며 화를 냈다. 엄마 기준에 크게 실망스러운 대학교를 갔지만, 행정고시를 준비할거라고 주변사람들에게 변명처럼 설명하는 엄마를 보면서 꿈에 있지도 않은 공무원의 꿈을 꿔야만 했다.
아빠가 가정에 소홀하던 시절, 네가 아빠랑 닮았으니까 아빠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 놓으라는(?) 이상한 주문을 하는 엄마였다. 내가 어떤 역할을 하지 않으면 이 가정이 파탄날까봐 무서웠다. 너희 아빠는 아들이 없으면 바깥으로 도는 사주라고 그랬다고, 역시나 내가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걸 죄책감이 들게 만드는 엄마였다.
공무원은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공기업에 취업했고, 맘에 드는 조건의 사윗감은 아니지만 그래도 결혼해서 애들 낳고 잘 살고있고, 전교1등 이후로는 자랑할게 없던 딸이 뒤늦게 자격증 시험에 수석합격해서 두고두고 자랑거리가 생겼고, 이제 새로 시작한 일만 잘 자리잡으면 더 바랄게 없는 엄마일테다. 딱 하나 걱정인건, 내가 이혼을 할까봐. 엄마 기준에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오점일거였다. 어느날 덜컥 귀를 뚫고와서 통보했던 것처럼, 어느날 덜컥 이혼하고 와서 통보받을까봐 두려우신 모양이다. 질풍노도의 시기 어쩌고 하니까 이혼해서 엄마를 실망시키지 말라고 엄포를 놓는거다.(이혼할 생각도 없는데 왜 두려우신건지 모르겠다. 그냥 나란 사람은 사달을 내고 통보하는 성격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엄마와 아빠는 나를 굉장히 사랑하시겠지만, 무조건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한번도 없다. 늘 잘해야하고, 주변에 자랑할만한 역할을 해내야하고, 뭔가에 실패하면 실망스러워 하실까봐 내가 부끄럽고, 언제 어디서나 번듯한 딸이 되어야만 할 것 같았다.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는 자식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왔는데, 이제 나이가 드니까 그렇게 살아온 나의 시절이 너무 쓸쓸하고 서러워졌다. 난 내 삶을 살았다기보다 부모의 맘에 드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온 느낌이다.
몇개월 행정고시를 준비했다가 도저히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둘 때, 지금의 남편인 남자친구한테 전화해서 공부를 포기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 이거 그만둘래. 너무 나한테 맞지도 않고 못하겠어."
"그래. 네가 원하는대로 해. 안맞으면 안하면 되지."
"자기는 괜찮아? 행정고시 패스한 여자친구가 아니어도?"
"난 너 자체를 좋아하는거지, 너가 뭐가 되든 아무 상관이 없어."
지금 보니 약간 오글거리기는 하지만, 그당시에 저 말을 수화기 너머로 듣는데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이라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연히 고시패스한 여자친구를 갖게 되면 자랑스럽고 결혼할때도 목에 힘 줄수 있는거 아닌가? 그런데 내가 무엇이 되든 상관이 없다니? 자랑거리가 아니어도 괜찮은건가?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부모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남자친구에게서 느꼈고, 왠지 눈물이 나서 황급히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이 때 결혼을 한다면 이 사람이랑 해야겠다고 결심했던 것 같다.
인터넷을 하다가 우연히 본 TV프로그램에서, 국제변호사로 활동하는 이소은의 인터뷰 장면을 봤다. 아버지가 "너의 전부를 사랑하지 네가 잘할 때만 사랑하는게 아니다" 라는 말씀을 해주셨다는 장면을 보고, 한없이 부러웠다. 저렇게 조건없는 사랑을 받으며 자라온 삶은 어떨까, 자존감도 튼튼하고 회복탄력성이 높은 삶.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노력하면 할 수 있다고 자신을 믿는 삶. 어떤 모습으로 살아도 나를 사랑해주는 가족이 있는 삶.
물론 우리 부모님도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겠지만, 이소은의 아버지처럼 표현해주지 못한 걸 수 있다. 아니 그렇다고 믿고 싶다. 그런 부모가 아니어서 실망해도 부모를 미워하지 못하고, 아닐거라고 실낱같은 희망을 품는 나야말로 부모님께 조건없는 사랑을 드리고 있는 것 같은데, 부모님은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해주면 안될까. 실패하고 이혼하더라도 그분들께 사랑 받고 싶다.
나는 이렇게 컸지만, 내 자식은 이소은처럼 키우고 싶은데, 잘 할 수 있을까 두렵다. 이럴 때 부모의 역할이 매우 힘들고 어렵다는걸 알게된다. 자식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욕심이 되고, 자식을 다그치게 되기 쉽지 않은가. 사랑해, 자랑스러워, 믿는다. 라고 말을 해주면 될까? 진심을 다해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있다는걸 알려주고 싶다. 너희가 뭘 해도, 어떤 모습이어도 너희의 전부를 사랑하고 있다는걸 알게 해주고 표현해주며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