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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sdom Jan 19. 2024

그렇게 부모가 되어간다

그저 참고 견디다 보면 이것도 추억이 되겠지.

어릴적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단연코 '온가족이 부업하던 순간' 을 꼽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게 유치원~초등학교 저학년 즈음인데, 그 이전은 당연히 기억이 잘 안나고, 그 이후는 학창시절이 펼쳐지니 행복할 리가 없기도 하겠지만, 유독 예전 기억 중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이라면 온가족이 동그랗게 둘러앉아 부업을 하던 장면이다.


어릴적 가정형편이 좋지 못해 언니와 내가 먹던 배달 야쿠르트까지 끊어야했던 시절, 엄마는 고심 끝에 부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아이들 야쿠르트값이라도 벌어야지 하고 시작한 부업은 '종이봉투(쇼핑백)접기' 였다. 엄마 혼자 수백장을 접어 납품하기는 버거워서 평일에는 언니와 내가, 주말에는 아빠까지 합세해서 봉투를 접었었다. 나같이 가장 어린 애는 주로 선 따라 접기 정도의 역할을 한 뒤 언니에게 넘기면, 언니는 각을 잡아 모양을 만들고, 아빠는 깍지-그러니까 봉투 손잡이쪽과 밑바닥에 두꺼운종이를 덧대는 부분-을 끼우고, 엄마는 깍지에 본드를 붙이고 밑바닥을 양면테이프로 마감하여 튼튼하게 완성하는 마무리를 했다.


어린 마음에 내 역할은 너무 시시했고, 나름 기본 툴을 세팅하는 언니 역할이 부러웠으며, 꼼꼼한 아빠가 깍지를 끼우며 잘못 접힌 선을 마무리하는게 왠지 근사했고, 백미는 양손에 목장갑을 챡 낀 채로 본드와 양면테이프 마감을 하는 엄마였다. 나도 그 멋진 목장갑을 끼고 싶었으나, 내 손에 맞지도 않았을 뿐더러 본드 같은 유해물질을 취급하는 엄마 정도는 되어야 낄 수 있는 훈장 같은 거여서 감히 넘보지도 못했었다. 


여튼 주말마다 온가족이 모여앉아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컨베이어벨트를 돌리면서 나름 조잘대고 웃고 깔깔댔는데 그게 어찌나 행복했는지, 평일에 친구들과 유치원이나 학교를 갔다와서 골목에서 땅따먹기나 고무줄 놀이를 하는건 왠지 쳇바퀴같은 지루한 일상이고, 주말에 다같이 모여앉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다림이고 설레임이었으며, 나도 한가지 몫을 해내는 그 성취감이 이루말할 수 없었다.


지나고보니 그 시절은 엄마아빠에게는 암흑같은 시간이었을 것 같다. 생활비가 부족해 아이들이 먹는 야쿠르트까지 끊어야 했던 그 심정, 온수가 나오지 않아 일주일에 한번 겨우 목욕탕을 가서 애들을 씻기는데 목욕탕 문 앞에 있던 떡볶이 포장마차를 동그란 눈으로 쳐다보는 딸들에게 떡복이 1인분 사줄 돈이 아까워 그 시선을 외면해가며 집으로 재촉하던 그 심정, 주중에도 일하는데 주말마저 쉬지 못하고 깍지를 덧대야 했던 아빠의 고단함, 옆집 아이들은 보약을 먹이던데 우리 아이들에게는 채소 반찬만 줘야 했던 엄마의 시린 마음이, 그래도 꾸역꾸역 고사리같은 아이들 손까지 빌려가며 부업을 해서 한푼이라도 더 벌어야 했던 그 시절의 엄마아빠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해보면 나도 마음 한구석이 시큰해진다.


왜 나를 이렇게 자존감 없게 키웠냐고, 왜 나를 그렇게 몰아세우면서 힘들게 했냐고 따지고 싶어도, 어렵게 버티면서 살아온 그 시대에 오은영 박사처럼 드넓은 부모의 역할까지 다 해주셨어야 한다고 따질수도 없는거 아닌가 싶어, 가끔 참을 수 없게 분노가 끓어올라도, 삼키고 또 삼켰다. 부업으로도 모자라 결국 엄마는 건물 화장실 청소 일을 시작하셨는데, 그 어려운 시절 대학까지 나오고도 결국 할 수 있는게 화장실 청소뿐이더라, 그래도 너희들 학원이라도 보내려면 안할 수가 없었다 라고 말씀하시는 엄마에게, 이제와서 그렇게 열심히 키운 내가 원망만 가득했노라 말하면, 엄마의 청춘이 다 부인당하는 느낌일까봐 말하지 못하고 여전히 삼킨다.


가까이 지내는 이웃 부부의 남편이 힘겹게 회사 생활을 꾸역꾸역 이어가다가, 결국 한계에 다다라 휴직을 한다고 했다. 그 부인은 당장 월급이 끊기면 아이 둘을 어떻게 키워야 하나 전전긍긍하다가도, 저렇게 내버려뒀다가 남편이 잘못될까봐 말리지도 못하겠다고 했다. 괴롭히는 상사 밑에서 버티고 버티다 휴직을 선택한 것 같은데, 이전 직장에서 악질 상사를 종종 만났던 나로서는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됐다. 하루하루 자존감이 깎이고 쪼그라드는 그 기분, 눈을 뜨고 출근을 해야하는 그 매일이 지옥일 터였다. 


곁에서 그 이야기를 전해듣던 엄마는, 그래도 토끼같은 자식들을 생각해서 어떻게든 다녀야 하는거 아니냐고, 그게 자식 둔 부모라고 한탄을 했다. 글쎄, 자식이 없었으면 진즉에 때려쳤지 않았을까, 그래도 자식들이 눈에 밟혀 온갖 수모를 당해도 참고 참다가 겨우 육아휴직을 하는 것 아닐까. 나 혼자만의 삶이었다면 더 결단력 있게 행동했을텐데, 자식이 뭐라고 그렇게 참아낸다. 아이들은 당분간 집에 있는 아빠 덕분에 매우 기뻐할 것이며, 온가족이 알콩달콩 즐거운 추억을 만들 것이다. 비록 생활비가 부족하고 다니던 학원을 그만둬야 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들에게는 봉투 접던 나의 어린시절처럼 온가족의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요즘의 나도 마찬가지다. 인적용역 제공 업종으로 창업을 한 나는, 사업이 자리잡을 때 까지 기약없는 용역 무상제공과 불합리해도 꾸역꾸역 참아야 하는 친절을 장착중이다. 작업을 다 했는데, 최종적으로 AI를 돌린것과 별 차이가 없다며 떠나가는 고객에게 그래도 언젠가 다시 찾아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깍듯하게 인사하고 보낸 뒤 돌아섰는데, 토끼같은 내 자식들이 해맑게 배고프다고 한다. 그래, 너희들에게 따뜻한 밥 한술 주기 위해 억울해도 참고 아쉬워도 참고 그렇게 내가 살고있구나 싶다. 마음은 쓰라렸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끌어안으니 따스한 온기가 느껴져 참을 만 했다. 본드 냄새가 진동하고 허리 한번 펴지 못한 채 양면테이프 마감을 하면서, 저 아이들에게 내가 뭘 시키고 있는건가 자괴감이 들다가도, 비뚤비뚤 접었다고 깔깔대며 뒹굴고 엄마 목장갑 나도 껴보고 싶다고 반짝이는 눈으로 웃으며 다가오는 아이들을 보면서 또 마음이 몽글해지지 않았을까, 그 웃는 얼굴 보며 다시 힘을 내지 않았을까 우리엄마도. 


그렇게 부모가 되어가고, 그렇게 가족이 되어가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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