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에는 서로를 이해하기 글렀음
남편이 모처럼 시간이 나서 오랜만에 아이들 등원을 같이 했다.
차는 주로 내가 등하원용으로 쓰고 남편은 별로 탈 일이 없는데, 모처럼 시동을 걸다가 계기판을 보더니 나한테 면박을 줬다.
"주행가능거리가 80km잖아? 미리미리 주유 안하고 뭐했어?
"80km가 뭐 어때서? 나 23km까지 버텨봤는데 잘만 굴러갔어!"
"뭐? 그게 자랑이야? 계기판을 믿어? 저만큼 주행하지 못하면 어쩔거야?"
"아니 글쎄 23km까지 해봤다니까? 괜찮아 자기 운동다녀와도 왕복 11km정도니까 다녀와서 주유해~"
남편은 아연실색해서 나를 쳐다봤다. 남편 기준에서 나는 너무너무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물론 내가 좀 임박해서, 막바지까지 버티는 성격이긴 하다.
워낙에 벼락치기로 공부하는 스타일이기도 했고(시간 없어서 똥줄탈때 효율극대화되는 스타일)
출근시간 기록지를 봤을때 8:59:59 를 보고 뿌듯하기도 했다.(아무리 다급하게 출근해도 절대 지각은 안함)
KTX 탑승시각이 9:00 였는데 정말 플랫폼을 눈앞에 두고 8:59에서 9:00으로 변하는 핸드폰 시계를 보면서 아 드디어 생애최초로 내가 기차를 놓치는구나 싶었는데, 계단을 뛰어내려가며 우릴 향해 손짓하는 역무원 아저씨를 보며 아, 그래 9:00이면 분명 9:00:59까지 떠나지는 않겠구나(마치 만6세까지 지원금이 나온다 하면 생후 6년11개월30일까지 해당되는 이치와 같은듯) 하는 안도감이 들면서 전력질주하여 탑승에 성공하기도 했다.(그때 남편의 표정이란, 지금까지 같이 살고있는게 기적이려나.)
대망의 비행기도 놓칠 뻔한 적이 있었는데, 그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온라인면세점 픽업줄이 어마어마하게 길어서였고, 탑승이 임박한 사람은 먼저 꺼내준다는 규정이 있는지도 몰랐을 때이며, 그래도 공항에 내 이름이 방송되기 전에 게이트로 뛰어들어갔으며, 아무도 없는 썰렁한 게이트에서 오매불망 나만 기다리던 남편에게 양손에 가득한 면세품을 한가득 안겨주며 득의양양하게 "봤지? 나 항상 세이프 하는 사람이야" 라고 외쳤더랬다.
남편은 도저히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남편은 무언가 마감이 정해져있으면 미리미리 해두지 않으면 스트레스 받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벼락치기란 있을 수 없는 사람이었고, 너무 미리미리 해두는 바람에 보고서를 취합하는 등의 업무가 있을때 가장 빨리 제출하여 다른 사람들이 "벌써 다했어?" 라고 놀라는 것을 즐기는 타입이었다.
개인적으로 난 이런 타입을 별로 안좋아하는데, 아직 시작도 못한 나같은 사람에게 너무 쫄리는 기분을 느끼게 하고, 특히 이런 사람이 상사라면 더 숨이 막힐것같다. 결재 올려놓고 은근 한참 뒤에 결재가 완료되기를 기다리곤 하지 않는가. 완료되면 또 후속 업무를 해야하는데 바로바로 결재가 통과되면 왠지 쉴틈없이 일하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편은 미루지 못하는 성격 때문인지 무언가 생각이 났을때 그걸 바로 해버리는 스타일이고, 한번 시작한 일은 하다가 중단했다가 다시 시작하려면 또 버퍼링이 필요하다며 완성될때까지 쭉 붙잡고 끝내버린다.
언뜻 보면 좋은 성격이고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저녁상을 차리는 와중에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났다며 노트북을 켜고 혼자 매진해버리면, 나는 혼자서 음식 볶고 그릇 나르고 숟가락 놓고 애들 먹이고를 해야한다. 시작한 일은 중단할 수 없기에 그 일이 끝날때까지 집안일과 육아는 내 몫이다.
누군들 머릿속에 떠오른 일을 바로 실행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하고있던 일들이 있고 마무리해야하는 일들이니 참고 미루는건데, 갑자기 번뜩 떠오른 자기 할 일로 넘어갈 수 있다는건, 주양육자가 아니라는 걸 증빙하는 것뿐. 그래서 화가 난다.
또한, 남편은 좋은 습관들을 루틴처럼 생활에 박아두는 것을 참 좋아하는데, 예를 들어 음식물 쓰레기를 버릴 때 계단은 걸어올라온다, 엘레베이터를 기다릴 때 스쿼트를 한다, 옷을 입기 전에 팔굽혀펴기를 10번 한다, 양말을 신기 전에 발꿈치크림을 바른다 등등이다.
따로 시간내서 하기는 어려운 것들을 어떤 일상에 루틴처럼 박아두면 자연스럽고 손쉽게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한동안 그걸 전파하고 다녔는데, 물을 마시려고 서 있는 나에게도 그 틈에 스쿼트를 하라느니, 손이 건조해서 걱정하는 나에게 주방 가는 길목에 핸드로션을 두고 거길 지나다닐때마다 바르라느니 각종 조언들을 쏟아냈다. 좋은 말인건 알겠으나 뭔 행동 하나 할때마다 귀에 박히도록 잔소리를 해대니 귀찮기도 했다.
그래도 잔소리는 괜찮았다. 문제는 바쁘게 외출해야 할 때도 자기의 루틴을 버리지 못한다는 거였는데, 지금 출발해야 급행지하철을 탈 수 있는데 문 열어보면 팔굽혀펴기 하고 있고, 발꿈치 크림 바르고 있고.... 세상 화딱지가 나는거였다. 남편은 그러게 다음 급행을 탈 수 있도록 여유있게 준비시간을 가졌어야지 하는 타입이고, 나는 딱 맞춰서 임박해서 열차를 타도록 준비하는 타입이니, 이 얼마나 물과 기름 같은 존재인가.
그런 우리가 여적까지 살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니 그것 또한 신기하다. 아이들의 성향이 눈에 보일때마다 서로 누굴 닮으려나 티격태격 하기도 하고, 여전히 본인이 더 효율성 있는 존재라고 믿으며 때로는 비난을 때로는 이해를 하며 살고있다. 이렇게 앞으로 수십년 더 무탈하게 살길 바라며...!(아이들은 그래도 나보단 남편을 더 닮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