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급이 만연하는 세상
다음달이면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초등학교 오리엔테이션에서 자료를 받아오면서, 돌봄교실을 신청할지 말아야할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는데, 초등학교 들어가면 학교가 너무 일찍 끝나서 돌봄교실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태권도 등 학원을 다녀와야 얼추 오후 늦게 아이가 온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기도 했고, 특히 방학에는 속수무책으로 집에서 아이를 돌봐야 하므로 돌봄교실 신청이 필수라고들 했다.
하지만 아이 초등학교 입학에 맞춰 퇴사하고 자영업을 시작한건 아이를 좀 더 돌보고 초등학교 적응을 돕고자 함이었다. 돌봄교실이나 학원뺑뺑이를 할 목적이었으면 굳이 퇴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가 일찍 집에 오는게 두려운 건 아닌데, 그 남는 시간을 아이와 알차게 보낼 자신이 없었다. 어영부영 게임이나 유튜브만 볼 거면 차라리 학교나 학원에서 늦게 집에 오는게 더 나을 터였다. 나도 시간여유가 있는편이라고는 해도 사업을 운영중이라 마냥 아이만 바라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돌봄교실을 신청하기로 결심했고, 다행히도 입소 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다른 학교로 진학하는 아이 유치원 친구 엄마가 자기는 돌봄 교실 떨어졌다고 하소연 하길래, 아 그 학교는 경쟁이 치열한가보구나 싶었고 난 합격했다고 말했다.
"돌봄 교실 떨어져서 너무 막막해~ 아무리 재택 업무하는 사업자라지만 나도 일할 시간이 필요한데, 그리고 또 방학은 어째야하지?
"그러게. 나도 신청할까말까 고민하다가 방학때문에 결국 했는데. 그런데 거긴 돌봄 신청자가 많은가봐~ 우리 학교도 많다고는 하던데 그래도 난 합격했길래 웬만하면 되는건줄 알았네."
"그게 소득 순으로 자르더라고~ A네 알지? 걔도 우리애랑 같은학교 가고 이번에 돌봄 넣었댔는데, 거기도 떨어졌을게 확실해~ 나도 떨어졌는데 그 집은 남편 대기업에 엄마도 회사 다녀서 우리집보다 소득이 더 많을게 분명하잖아? A가 접수할때 우연히 봤는데 한의사 부모도 신청했다더라. 거긴 더 안됐겠지!"
".......???"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한순간에 저소득자임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돌봄교실 1순위는 법정지원대상(기초수급, 차상위, 한부모가정)이면서 맞벌이가정, 2순위는 일반 맞벌이 가정이고, 신청자가 많을 경우 소득 순으로 선발하고, 대기자도 소득 순으로 순서가 정해진다는 공지문을 읽기는 했다. 그렇다고 돌봄교실에 선발된 순간 아 나는 저소득자 구나 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탈락한 고소득자가 '합격은 저소득순이다' 라고 말하자, 돌봄교실 입소 = 저소득자 입증 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돌봄 교실에 다닌다는 주변 사람들을 봐도 소득과 연결지어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내 자녀가 취학전이라 그런 생각을 아예 못해본 걸까? 이제 우리애가 돌봄교실을 들락거리면 '아 저 집은 저소득자인가보다' 라고 생각하는 학부모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따른 감정입니다. 일반적이지 않은 케이스인게 당연한데 내가 당첨된 기분;;)
그러고보니 몇년 전 코로나 상생 국민지원금이 나왔던 때가 떠올랐다. 코로나에 지친 국민들을 위로하고 소비를 활성화 하기 위해 정부에서 지급한 지원금인데, 그것도 소득 수준에 따라 지급여부가 결정되었었다. 그당시 육아휴직중이어서 내 소득이 없었고, 외벌이 기준으로 충족되어 신나게 신청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거 너무 좋다고, 갑자기 목돈이 들어온다고, 신청했냐고 물었더니 꽤 많은 사람들이 우리는 외벌이어도 조건 충족이 안되서 못받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의도치 않게 소득 수준이 서로에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더이상 물으며 돌아다니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복지의 수혜자라는걸 드러내고 싶지 않은 상황들도 있을 수 있겠다는걸 깨달았다.
국가 예산이라는 게 한정적이어서, 꼭 지원을 해야한다면 소득 수준에 따라 차등 지원하는 것이 형평성에 맞을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 복지 영역으로 가져와 국민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다. 십수년 전 무상급식 논란 때도 그랬다. 반대 논리에서 항상 들고 나오는 것이 "이재용 아들까지 무상으로 급식을 줘야하냐" 였는데, 참 말 잘했다 싶다. 내 아들이건 이재용 아들이건 구분짓지 않고 모두가 똑같이 누릴 수 있는 복지. 그래서 이재용 아들로 안 태어나도 괜찮은 나라. 점점 그런 나라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줄줄 새는 나라 예산들 도둑놈들한테 퍼주지만 않아도 충분히 이룰 수 있다고 했다.
'내 자식에게 가난 대물림 하기 싫어서 애 안낳는다' 라는 요즘 세대의 말에는, 부잣집 아이들처럼 지원해주지 못하고 그게 계속 티가 나며 낭패감이 들게 하는 이 사회에 뭐하러 애를 낳아서 그 격차를 자발적으로 느껴야하는가 하는 뜻이 들어있다. 이런 구조를 바로잡지 못하면 출산율은 쉽게 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하반기부터 전국적으로 시행된다는 늘봄학교 같은 제도를 아주 환영한다. 이 정부에서 모처럼 괜찮은 정책이 나왔다 싶다. 소득과 상관없이 다 받아준다고 했으니 돌봄 교실에서 탈락해서 발 동동 굴리는 맞벌이 부모도 없을 것이고 얼마나 좋은가. 물론 이런저런 좌충우돌 적응기가 필요하겠지만, 보편적 복지를 한발 한발 확대해가는 나라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