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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sdom Dec 12. 2023

나를 돋보이게 하는 방법

브랜딩 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오랜 회사생활을 청산하고 창업을 했다. 직장을 다니며 자격증을 취득했고, 관련 업종으로 개인사업자를 낸 것이다. 항상 어딘가의 단체에 속해있고 직급 안에서 부속품처럼 살았는데, 처음으로 나 혼자 사업을 이끌어 가려하니 막상 어떻게 해야하는지 막막하기만 했다.


사업자를 내고 처음으로 한 일은 명함만들기였다. 어느 회사, 어느 팀, 어느 직급 땡땡땡 이라고 적기만 하면 됐던 기존의 명함과는 달리, 이제 내 회사를 작은 종이 안에 어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상적인 기억을 줘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자격증과 관련된 취업이라 딱히 뭔가의 특색을 내비칠 만한게 없었는데, 딱 하나 남들과 조금 다른게 있다면 관련 자격증 시험을 수석합격하였다는 것이었다. 


열심히 노력하기는 했지만, 최고득점으로 합격한다는건 어느정도 운도 따라줘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수석합격이라고 굉장히 비상한 두뇌를 가졌다던가 대단한 능력을 갖췄다는 뜻이 아니라는건 모두가 다 알고있다. 그래서 명함에 쓸까 말까 오래 망설였지만, 딱히 쓸 만한게 없는 업종에서 그나마 나에 대한 정보라면 쓰는게 낫겠다 싶어서 명함 구석에 'O회 시험 수석합격' 이라고 적었다. 적고 보니, 안쓰는것보다 훨씬 나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함을 받은 사람이 오잉 수석합격이네! 라고 생각이라도 해준다면 어쨌거나 장점이 아니겠는가.


오랜만에 예전 회사 동료들을 만날 자리가 있어서 새로운 명함을 들고 나갔다. 명함을 받아들자마자 동기 한명이 푸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수석합격 이거 왜 적었어! ㅋㅋㅋㅋㅋ"


안그래도 머쓱했던 나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뭐... 적을게 그거밖에 없어서 그냥 적었어."

"1급 팀장 같은거네 푸하하!!!"


그렇다. 우리가 신입이었던 시절, 인사이동이 있으면 팀원들 명함을 새로 파는게 우리의 주된 업무였다. 다들 새로운 팀명과 직급과 이름, 전화번호나 이메일주소 같은 것들을 넣으면 되니까 기존에 늘 적던 시안에 새로운 팀원의 정보를 넣고, 인쇄에 넘기기 전에 본인에게 확인하는 절차 정도만 하면 명함파기 업무는 끝이었다. 팀장님도 새로 오셔서 팀장님의 명함 시안을 들고 확인을 받으러 갔는데, 다른 팀장님들과는 달리 독특한 지시사항이 있었다.


"어, 나는 팀장 김OO 말고, [1급 팀장 김OO] 이라고 써줘."

"네...? 네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나왔다. 팀장은 다 똑같은 팀장인데 1급 팀장이라고 쓸건 뭐람. 

1급부터 6급까지 있던 우리 회사는 주로 2급들이 팀장을 달았다. 빨리 승진하는 편에 속하면 3급도 팀장이 될 수 있고, 1급은 주로 본부장이었는데, 팀장에서 본부장이 되지 못하고 정년퇴임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러니 1급이긴 한데 아직 본부장이 되지 못한 팀장이 있을수도 있는거였다. 그 분이 그런 케이스였고.


그때는 그게 우스웠다. 1급팀장이라고 하면 뭐가 다른가? 어차피 같은 팀장인데 1급이라고 써서 뭐하자는건지. 다른 팀장들하고 차별화 하고싶은건가? 아무도 몇급인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보직만 볼텐데 왜 굳이 쓰는거지? 사내메신저로 동기들과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실컷 비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승진만 빠르고 팀장경험은 어수룩할 3급팀장과 달리, 차고 넘치는 무색무취의 2급팀장과는 달리 나는 무려 더이상 승진할 급수가 없는 최고 등급인 1급의 팀장이다 라고 어필하고 싶으셨을 것 같다. 평직원인 우리야 대외적으로 명함을 내밀며 업무를 할 일이 별로 없지만, 팀장급이면 대외적인 업무도 많고 만나는 사람도 얼마나 많겠는가. 평직원은 몇급이든 큰 상관없이 주어진 일을 잘 하면 그만이지만, 팀장은 그렇지 않다. 정치적인 관계도 매우 많았을 것이고, 그 안에서 어떻게든 본인을 차별화하고 어필할 수 있다면 반드시 이용해야 했을 것이다. 그 깊은 속뜻을 자영업자가 된 이제서야 깨닫는다.


다른 어떤 차장급 선배는 OO공학 박사 라고 명함을 팠다고 했다. 그것도 그 동기는 깔깔거리며 비웃었지만, 난 그것 또한 굉장히 이해가 갔다. 기술 관련 연구 및 발주 업무가 주 업무인 그 선배는, 아마도 수주 기업들에게 명함을 내밀때 박사 라는 타이틀이 많은 도움이 됐을 거였다. 발주처인 내가 박사급이야, 넌 나를 눈속임할수없어, 제대로 공사해. 구구절절히 설명할 필요 없이 명함 한장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가. 


물론 학벌, 학위, 승진, 시험 등이 그 사람의 능력을 말해주지 않는다. 1급이라고 해서 직무능력이 보장된게 아니고, 박사 학위를 땄다 해서 그 분야의 천재는 아니다. 다만, 넓은 의미에서 그 사람에게 하나의 '브랜딩'이 될 수 있을테고, 그건 오로지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다. 그 브랜딩을 보고 그게 뭐? 유치하게 라고 생각하면 그냥 그런거고, 오 이런사람이었군! 하고 다르게 봐주면 땡큐인거다. 


물론 이런걸 다 이기는건 오로지 실력이다. 학벌 학위 직급 자격증 다 필요없고 능력이 출중하면 그 모든건 정말 말그대로 비웃어 마땅한 허울이다. 하지만 초면에, 딱 보자마자, 내 능력을 1초만에 보여줄 수도 없을때는, 이런 허울이라도 일단 들이밀어 조금이라도 각인이 된다면, 일단 어필해봐야하지 않겠는가.


길 가다가 버스 광고에 붙은 병원 홍보를 보니 "OO내과 - 서울대 의대 출신 원장" 이런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하물며 의느님들도 1초 보고 지나갈 광고판에 서울대 출신임을 집어넣는다. 어쨌거나 오 서울대~ 이런 효과가 100명중에 1명에게라도 든다면 성공한 광고라고 생각하고 넣었을 것이다. 지독한 학벌주의 세상을 혐오하지만, 나도 서울대를 나왔으면 명함에 수석합격, 서울대 출신 이라고 한줄 더 넣었을테지. 씁쓸한 현실이다.


어느 정도 자리잡고 업무능력이 더 출중해지면, 명함에서 수석합격은 지울 생각이다. 그때까지는 어필해야하는 찌끄래기라도 있으면 열심히 어필하는게 지금 할 일 같다. 이 세상이 허울에 매달리지 않도록, 진가를 알아봐주는 세상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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