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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sdom Nov 04. 2023

하고싶은 말을 삼키는 연습

독이될까 약이될까

막 취업을 했을 때였다. 몇년동안 공무원시험 준비를 한답시고 시간만 낭비하다가 복학해서 나름 열심히 취업준비를 했고, 이름을 얘기해도 아무도 모르는 지방공기업에 최종합격했다. 워낙 주변에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취업 준비를 많이 하는 학과여서 누가 몇년을 공부해서 어디 합격했다더라, 누구는 결국 포기했다더라, 누구는 공무원만 바라보고 학점 관리를 안해서 취업할데도 없다더라 등 동기 선후배들의 진로에 서로 지대한 관심들이 많았다. 그때만 해도 이름만 대면 다 아는 탑급 대기업, 공기업에 취업하는 것만이 최고의 찬사와 부러움을 받을 때였다. 

부연설명을 해야만 겨우 아 그런곳도 있느냐 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작은 지방공기업이었지만, 무수히 탈락만 거듭되던 나에게 최종합격이라는 큰 기쁨을 준 곳이었다. 공무원 준비하는 사람들 성향이 으레 그렇듯 안정적이고 업무가 편안하며 오래 다닐 수 있는 곳을 선호했던 나로서는 더할나위없이 좋은 직장이었다. 취업했느냐는 주변 선후배들의 물음에 부연설명을 곁들이며 설명을 하고, 그래도 나름 공기업에 취업했구나 하고 축하와 격려를 받았다.

 

그러다 같은 학과의 누군가가 유명한 공기업에 취업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선배 OO공사에 들어갔대."

"오 정말요? 대단한 능력자이시네요!"

"그러게말이야. 거기가 진짜 공기업이지"


소식을 전하던 선배 언니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내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진짜 공기업? 순간적으로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나를 보면서 웃으면서 '진짜공기업' 이라고 말 하는 의도가 뭘까? 나는 그럼 가짜 공기업에 들어갔다고 말하고 싶었던걸까? 뭔가 발끈 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라 그냥 '아... 그렇죠....' 하고 넘어갔지만 그 묘한 미소와 말투가 내내 꺼림칙했다.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신혼을 보내며 남편과 이직을 결심했다. 같이 자격증 공부를 해서 퇴사하고 새로운 진로를 갖기로 했다.(회사가 메이저공기업이 아니어서 이직을 결심한건 아니다. 그냥 진로를 바꾸기로 결심했을 뿐.) 그러한 결심을 시댁에 알리고 맞이한 첫 명절이었다. 얼굴도 잘 모르는 친척분들이 바글대는 시댁에서 혼자 설거지를 하고있는데, 어떤 분(아직도 누군지 잘 모르겠다.)이 다가와서 설거지를 거들어주시겠다며 옆에서 같이 수세미를 잡으셨다. 


"그래, OO시험 준비를 한다고?"

"아... 네, 한번 해보려구요."(역시 친척들 사이에 비밀이란 없구나.)

"응~ 내가 아는 사람들 공무원한다 뭐 한다 하면서 공부한다고 들어앉은 사람들 죄~다 떨어졌어."

"......???"


뭐라고 대꾸를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웃으며 앞만 보고 설거지 하는데 내 귀에 대고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셨다. 다들 시간낭비하고 다 떨어지더라. 공부가 그렇게 쉬운게 아니다. 한명도 붙은사람을 못봤다....

얼굴도 잘 모르는데다 거의 첫 만남에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그분의 속내가 참으로 궁금했다. 종가집인 시댁에 들어온 며느리가 착실하게 아들 낳을 생각은 안하고 딴짓을 하는 모양새가 가소로왔던 모양이다. 


지난 주말에 오랜만에 대학 친구들을 만났다. 원래는 넷이서 친했는데 졸업하고 몇년 뒤부터 한 친구가 슬금슬금 연락이 안되더니 급기야는 잠수를 타듯이 사라져버렸다. 남은 셋은 사는게 바쁘기도 했고 워낙에 죽고 못사는 사이까지는 아니어서(씁쓸하다...) 그냥 그 친구의 부재를 그러려니 하면서 가끔 누가 연락이 되는지 묻곤 했다. 그러다가 왜 우리랑 연락을 끊은걸까 이런 얘기를 하는데 한 친구가 말했다.


"뭐, 그 남편도 이상하고 경제적으로도 좀 어려웠을테니 더이상 우리와 연락하기 싫은게 아닐까 싶어."


이 친구 말대로라면, 우리의 남편들은 안 이상한 사람들이고 우리는 부유하다는 뜻인데, 절대 그렇지 않다. 굳이 차이점을 찾자면 잠수탄 친구의 남편이 외모가 좀 화려하고 언행에 장난기가 많은 반면, 우리의 남편들은 누가봐도 모범생같이 조용하거나 숫기가 없는 편인데, 배우자에 대한 자기의 잣대를 왜 타인에게 들이대고, 그것땜에 우리와 멀어졌다고 지레 짐작하는걸까. 그 친구는 성격이 좀 세고, 다른 한 친구는 순하지만 얌체같은 구석이 있고, 나는 지나치게 해맑고 생각이 없다. 손절당한 이유가 우리에게 있을 가능성도 크다.


물론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런데 내뱉지 말고 그냥 속으로 삼키는 게 좋지 않을까. 진짜 공기업이라고 말하는 선배언니에게 "그럼 저는 가짜공기업이란 말이에요? 언니 말 참 이상하게 하시네." 라고, 다 떨어질거라는 친척 어른께 "시작하는 사람에게 격려는 못해주실지언정 왜 초를 치고 그러세요?" 라고, 이상한 잣대로 제멋대로 평가해버리는 친구에게 "문제가 너한테 있었을거라는 생각은 안해봤니?" 라고 말했으면 참 사이다였겠지만, 그것 또한 내뱉어봤자 서로 기분만 상할 말들이라 삼키고 말았다. 삼키는게 능사는 아닌데, 갈등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독인지 약인지 모르겠는 '삼킴' 을 나만 실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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