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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명재 Sep 07. 2024

킬 빌, 킬 디멘투스

1. '어벤져스' 말고 '리벤져스'


영화 속 악당은 대체로 두 가지 타입이 있다. 공공에 해를 끼치는 무리와 개인(주인공)에게 해를 끼치는 무리. 특정 개인을 괴롭히는 인간은 불특정 다수에게도 해가 되는 경우가 많아 그 경계가 애매할 수도 있다. 어쨌든 영화는 둘 중 한 가지 특징을 더 부각한다. 첫 째 유형을 혼 내주는 사람은 '어벤져'이고 둘 째 유형을 응징하는 사람은 '리벤져'이다.


사전에는 두 단어 다 '복수자'라고 해석되어 있다. 조금 더 세심하게 분류해 보자. '어벤져' 공공의 적을 응징하는 사람이라면 '리벤져'는 개인적 원한을 갚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구인을 괴롭히는 적들을 응징하는 마블 히어로들은 '리벤져스'가 아니라 '어벤져스'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더 큰 존경심을 바쳐야 하는 대상은 '어벤져'이지만 감정적으로는 '리벤져'에게 더 이입된다. 공공의 적은 우리 같은 소시민이 감당하기 힘들다. '맨'자 돌림으로 끝나는 슈퍼 히어로나 초 엘리트들로 구성된 특수요원들이 - 미션 임파서블의 IMF 팀 같은- 나서줘야 한다. 우리와 아예 차원이 다른 듯한 그들에게는 나 자신을 투영하기 힘들다.


반면에 개인적 원한을 갚아나가는 주인공에게는 깊은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평소 세상을 구해야겠다고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언젠가 피 끓는 원한을 갚아주고야 말리라는 생각은 누구나 해보지 않는가.


< 세상을 구하라, 미션 임파서블 / 내 개의 원수를 갚아라, 존 윅 >

다시 말 해, '더 이상 세상의 불의를 두고 볼 수 없다'며 종종 흥분하기도 하지만 일상의 풍파를 헤쳐나가다 보면 '나를 괴롭힌 그 인간을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영화를 고를 때도 '정의실현' 보다도 '원한해결'이 더 끌리는 경우가 많다.


오래전 홍콩 무협영화부터 이경규 감독의 복수혈전,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 최근의 존 윅과 - 존 윅의 그 많은 살인은 반려견의 죽음에 대한 원한이 발단이다. - 더 글로리까지. 복수를 다룬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특히나 '킬 빌'과 '퓨리오사'를 좋아한다.


두 작품 모두 여성이 주인공이고 복수의 과정은 처절하기 짝이 없다. 두 영화 모두 챕터로 구분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연출도 유사하다. 그 외에도 몇 가지 다른 듯하면서도 비슷하고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른 설정 혹은 연출이 있다.


< 킬 빌  5장. 청엽정 결투 / 퓨리오사 예고편(본편과 챕터가 다르다.) >


강하고 매혹적인 그녀들의 복수 여정을 되짚어보자. 참고로 아래 이야기는 영화의 진행 순서대로 작성하지는 않았다. 아울러 스포도 포함되어 있음을 미리 밝힌다.




2. 복수로의 여정


Chapter 1. 원한

< 린치를 당한 브라이드 / 십자 문양의 불빛을 등지고 죽어가는 바사 >

- 킬 빌 -


복수 영화의 주인공은 대게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빼앗기고 원한을 품게 된다. 뒤에 얘기할 퓨리오사는 엄마를, 존 윅은 아내가 남겨준 애견을 잃었다. 당연한 애기지만 복수를 하려면 일단 살아있어야 한다. 영화 속 주인공의 원한이 '나를 죽인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것'이라는 설정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킬 빌의 브라이드는 자기 자신이 죽어버렸다. 동시에 사랑하는 배우자와 하객들도 잃었다. 게다가 이런 엄청난 재앙을 가져다준 무리들은 한 때의 스승이자 동료들이다. 원한의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지경이다.


- 퓨리오사 -


퓨리오사는 말 그대로 엄마의 죽음을 '지켜본다'. 디멘투스는 어린 퓨리오사가 엄마의 죽음을 외면할 수 없도록 억지로 눈을 뜨게 만든다. 치가 떨리는 장면이다. 죽어가는 바사(퓨리오사의 엄마)의 등 뒤로 십자 모양의 불빛이 교차한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해 죽었고 바사는 딸을 위해 죽어간다. 이름 그대로 퓨리오사와 분노는 한 몸이 된다.


Chapter 2.  준비


< 보검을 전해받는 브라이드 / 원수의 심장부에 있는 퓨리오사 >

- 킬 빌 -


브라이드는 칼이 필요하다. 아주 좋은 칼이. 일본에서 가장 흉악한 야쿠자 집단, 크레이지 88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장비가 필요한 것이다. 브라이드는 재야에 숨어있는 한조를 찾아간다. 다시는 칼을 만들지 않겠다던 다짐을 깨고 인생 최고의 역작을 만들어낸 한조는 브라이드에게 칼을 건네주며 얘기한다. '이 칼이라면 신도 베어버릴 것이다'.  


히 복수를 준비하는 과정을 '칼날을 간다', '칼 끝을 겨눈다'라고 한다. 칼보다는 총(혹은 펜)이 강하지만 복수에는 칼이 더 잘 어울린다. 조는 브라이드의 칼을 갈았고 브라이드는 한조의 칼을 빌의 심장에 겨눈다.


- 퓨리오사 -


퓨리오사는 원수의 심장부에서 오랜 세월 단련해 나간다. 그 녀를 보면 이슬람 역사에 전해오는 두 집단이 떠오른다. 맘루크와 아사신. 과거 이슬람 세력은 점령지의 아동을 거둬들여 병사로 양성했는데 이들을 맘루크라고 불렀다. 즉 맘루크는 원수의 손에 길러진 것이다.


아사신은 암살로 유명했던 이슬람의 한 분파이다. 암살을 뜻하는 영단어 어쌔신의 어원이기도 하다. 아사신공포스러웠던 이유는 신비한 암살 기술 때문이라기보다 인내심 때문이었다 한다. 이들은 타깃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면 수십 년을 기다리기도 했다. 언젠가 죽여야 할 그 대상에게 충성을 다하면서 말이다.


퓨리오사는 자신의 원수인 디멘투스 밑에서 자라났고 시타델에서 7,000일을 버텼다. 맘루크의 기구한 사연과 아사신의 인내심. 7,000일은 웬만한 원한도 의지도 희미하게 만들 수 있을 만큼 긴 시간이지만 퓨리오사는 잊지 않았다.


(행여나 하는 마음에 덧 붙이지만 이슬람을 폭력적인 종교로 오해하지는 않기 바란다.)


Chapter 3. 부활


< 무덤에서 살아나온는 브라이드 / 한 쪽 팔을 끊고 탈출하는 퓨리오사 >

- 킬 빌 -


브라이드는 두 번 부활한다. 병원에서 한 번, 무덤에서 한 번. 데들리 바이퍼스는 두 번 브라이드를 죽이지만 그 녀는 기어이 지옥에서 기어올라온다. 니체는 '나를 죽일 수 없는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라고 했다. 킬러 시절에도 이미 막강했던 브라이드는 두 번의 부활을 거치며 더더욱 강해진다. "나를 죽이려면 제대로 죽였어야지?!"


- 퓨리오사 -


퓨리오사는 두 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엄마의 죽음과 잭의 죽음. 엄마 이후 유일하게 마음을 열어가던 동료, 잭의 죽음과 마주하게 된 퓨리오사. 디멘투스는 이번에도 잭의 죽음을 지켜보라며 그 녀를 매달아 놓는다.


하지만 디멘투스는 새디스트적인 행태에 심취해 퓨리오사를 과소평가했다. 모래 바람친 후 디멘투스의 눈에 들어온 것은 퓨리오사의 한쪽 팔 뿐이었다. 퓨리오사는 스스로 팔을 자르고 달아난 것이다. 이 장면은 정말이지 전율이다. 지친 듯 하지만 독기가 살아있는 퓨리오사의 눈빛. "나를 죽이려면 제대로 죽였어야지?!"   



Chapter4. 추격


< 도쿄 시내를 가로지르는 브라이드 / 사막을 질주하는 퓨리오사 >

- 킬 빌 -


이제 브라이드는 원수를 향해 질주한다. 액셀을 밟을수록 분노는 더욱 맹렬해진다. 분노가 타오르는 불이라면 스피드는 불에 끼얹는 기름이다. 브라이드가 질주하는 저녁 시간대의 도쿄는 교통체증이 심각하지만 그 정도 고증 오류는 넘어가자. 목적지는 청엽정. '푸른 잎사귀의 정자'라는 뜻이다. 오늘 밤, 푸른 잎사귀는 붉은 피로 물들 것이다.


- 퓨리오사 -


퓨리오사는 한쪽 팔을 의수로 채워 넣고 바퀴 한쪽이 없는 고물 차를 몰아 디멘투스를 추격한다. 뭔가 결핍된 상태에서 복수를 행하는 장면은 과거 무협 영화의 단골 소재였다. '서극의 칼'이라는 영화 속 주인공은 '반쯤 타버린 무림비서'로 수련하고 '반으로 부러진 칼'을 ' 팔'로 휘두르며 복수한다.


암행어사 출두하듯 화려하게 복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사실 복수자는 고독하고 상처 투성이다. 그런 주인공에게 우리는 더더욱 몰두할 수밖에 없다. 사람에게는 언더독을 응원하는 심리가 있는데 더구나 원한에 가득 차 있으며 상처까지 입은 언더독이라면 더더욱 큰 소리로 응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Chapter 5. 복수

< 소피를 내려다보는 브라이드 / 디멘투스를 내려다보는 퓨리오사 >

- 킬 빌 -


청엽정에서의 사투를 마친 브라이드는 데들리 바이퍼의 끄나풀, 소피를 인근 병원으로 데려간다. 이때 소피가 브라이드를 올려다보는 시점으로 앵글이 잡힌다. 악당은 추락했고 주인공은 우뚝 섰다. 브라이드의 헬멧 아래서 바들거리는 소피를 보며 통쾌함을 느낀다고 해서 나무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실 영화 속에서 데들리 바이퍼 킬러들보다 소피가 더 가증스러웠다. 권력자보다 권력자 옆에서 기생하는 인간이 더 미운 법. 이렇게 브라이드는 복수의 첫 여정을 마치게 된다.


- 퓨리오사 -


부하들을 모두 잃은 디멘투스는 퓨리오사 발 밑에 나뒹굴게 된다. 역시 이 장면에서 디멘투스가 퓨리오사를 올려다보는 앵글이 나온다. 퓨리오사가 서서히 가면을 벗으며 내가 누군지 알겠냐고 묻는 장면에서는 또 한 번 전율이 엄습한다. 디멘투스의 최후에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다고 영화는 설명하는데 어찌 되었던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퓨리오사의 복수는 끝났다.




3. 영화 속 복수, 현실 속 복수


'그리하여 암사자는 새끼를 되찾았고 정글은 평화를 되찾았다.'


킬 빌의 마지막에 흐르는 문장이다. 과연 정글은 평화로워졌을까. 만약 킬빌의 속편이 나온다면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는 개를 보여주리라는 예측이 많다. 퓨리오사의 속편 격인 영화는 이미 나와있다. '매드맥스:분노의 도로' 퓨리오사는 복수 후에도 고달픈 삶을 이어간다.


복수 후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만신창이가 된 심신, 복수가 잉태한 또 다른 원한, 인생의 허무함, 달라진 것 없는 세상살이의 고달픔 같은 것이 아닌가 한다. 복수에 대해 아예 다른 차원으로 가르침을 주는 존재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달라이 라마는 무려 원수를 사랑하라고까지 가르쳤다.


그렇다면 복수를 꿈꾸는 사람은 어리석거나 나쁜 사림인가. 그렇지는 않다. 일단 우리는 신의 아들도 아니고 티베트 고승도 아니다. 원수를 사랑하지 못한다고 해서 흉이 아다. 복수가 남기는 씁쓸함에 대해서도 조금 더 생각해 보자.  '명문대 진학', '승진', '십억 모으기'. 이런 목표 역시도 그것을 달성하고 나면 복수 후에 남게 되는 것과 별 다를 바 없는 것들이 남겨질 것이다. 상처, 원한, 허무함, 고달픔.


속세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은 마음속 상처를 가지고 있는데 그 상처의 원인을 복잡하고 추상적인 시스템에게 돌리기보다 구체적인 사람에게 돌리기 쉬운 법이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그 인간을 떠올리다 보면 '복수'를 꿈꾸게 된다. 비록 복수의 맛이 사이다처럼 시원 달콤지 않고 에스프레소처럼 씁쓸할지라도 혹은 성인들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브라이드나 퓨리오사처럼 무시무시한 복수를 실행할 도리 없고 실행해서도 안 된다. (그런 처절한 복수를 해야 할 만큼 엄청난 사도 잘 생기지 않는다.) 평소 나를 괴롭히는 상사를 따돌리고 팀 회식을 하는 정도의 소한 복수꿈꿀 수 있겠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그 조차도 쉽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이 뭐가 있겠는가. 브라이드와 퓨리오사의 복수를 보며 환호라도 해야 한 많은 이 세상을 살아갈만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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