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라고 믿고 싶을 만큼 섬세한 이야기
<줄거리>
- 다빈치와의 만남, 그리고 풍경화
소설에서 노비 신분으로 신분의 한계를 느끼며 결국 그로 인해 조선을 떠나야 했던 장영실은 긴 항해 끝에 이탈리아에 정착한다. 그는 훗날 피렌체에서 중년의 나이로 어린 다빈치를 만나게 되는데, 뛰어난 재능을 가졌음에도 서자라는 이유로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다빈치가 꼭 어릴 때 자신의 모습 같았다. 장영실은 다빈치가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가기 전까지 스승으로서 다빈치에게 자신의 모든 과학적 지식을 전수해준다. 장영실은 그리운 고향 풍경을 산수화에 담곤 했는데, 다빈치는 이 그림들에 관심을 가졌다. 이런 소설적 배경에서 등장하는 그림이 다빈치가 1473년 발표한 풍경화 <Landscape drawing for Santa Maria della Neve>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풍경화는 유럽 최초의 풍경화로 회화사에 남아있는데, 실제로 그는 습작 초기에 몇 편의 풍경화를 그린 이후 다시는 풍경화를 그리지 않았다.
작가 이상훈은 당시 산수를 즐겨 그리던 동양과는 달리 서양에는 풍경화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으며 그 최초가 다빈치라는 점을 놓치지 않는다.
소설에서 다빈치는 장영실의 산수화를 보고 피렌체의 풍경을 담아 그려보았고,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비웃음을 당한다. 공방 사람들은 다빈치에게 풍경 속에는 아무런 미의식이 들어 있지 않으니 풍경화를 그리는 것은 시간낭비라며, 신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라고 말을 한 것이다. 장영실은 서양에서는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을 신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물감은 강렬한 색상이 선호되고 화폭 중앙에 위대한 신들이나 성서의 모티브들이 배치되지만, 동양에서는 비움을 중요시하고 인간이 아닌 자연 속에서 질서를 찾고 마음의 정화를 얻으며 자연을 동경한다고 말한다. 또한 자신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에서 비우기 위해 그림으로 그려낸다고 말한다.
이에 다빈치는 늘 풍경 속을 채우려는 생각으로 화면을 바라보는 자신에게는 풍경화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고향에 날아가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죽는 날까지 비차에 집착하던 장영실을 보며 다빈치는 비차 설계도를 자신이 꼭 완성하리라고 다짐한다.
작가는 이것이 나중에 다빈치가 비차 설계를 한 이유라고 추측한다.
<구성, 문체, 묘사>
방송국 다큐멘터리 PD인 진석이 루벤스의 그림 <한복 입은 남자>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다큐멘터리를 기획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꼬레아라는 성을 가진 이탈리아 여자가 진석에게 오래된 비망록을 건네고, 이것을 국어학 박사를 딴 친구인 강배가 해석하며 이야기가 흘러간다. 진석이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역사적 사실을 찾아나가는 현재의 이야기와, 비망록 속에 담긴 15세기 장영실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면서 나온다. 작품의 전반적인 내용은 물론이고 그 안의 수많은 에피소드들의 기승전결이 확실하고 박진감 넘친다.
소설은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서술되어 담백한 문체로 인물들의 감정을 표현한다. 섬세한 묘사 덕에 독자는 장면을 그리며 읽어나갈 수 있다. 그러면서도 에피소드의 마무리가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중요한 장면에서 긴박하게 끝날 때가 많다.
다소 황당한 이 역사적 가정의 공백을 치밀하게 채운 이른바 ‘팩션’이다. 지루할 틈 없이 계속 새로운 이야기와 책 초반부터 중반까지 장영실이 항해를 떠나기 전 장영실과 세종 그리고 조선에 대한 시각이 매우 섬세하고 성찰이 깊다. 하지만 이에 비해 후반부에 다루는 서양과 동양의 가치관 차이, 중세 로마 교황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밝히고자 하는 장영실을 압박하는 것과 현재 시점에서 진석이 한복 입은 남자가 장영실이라고 뒤집는 것을 압박하는 부분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서술 속도가 급하고 시각이 평면적이다.
작가가 이 소설을 집필하는 데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이렇게 방대한 이야기를 이렇게나 치밀하게 쓰려면 그 10년도 온전히 소설을 위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루벤스의 그림부터 시작하여 작가 본인의 생각이 투영되었을 PD로서의 가치관, 그리고 방송 제작에서 부딪히는 정치적인 갈등, 장영실과 세종, 다빈치, 조선, 명나라, 이탈리아에 대한 깊은 연구, 역사적 사실을 뒤집는 것에 대한 용기와 두려움 등으로 꽉 찬 한 권이다.
뛰어난 상상력으로 역사를 채우는 이야기. 오랫동안 놓았던 소설책을 다시 잡아든 터닝포인트가 된 작품. 한복 입은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