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이 예뻐서 일을 안하고 살거라는, 새하얀 거짓말
고모들은 애를 많이 낳았다. 큰 고모는 딸 셋과 막내아들 하나, 작은 고모는 딸 둘과 막내아들 하나. 모두 두어 살 터울이다. 큰 고모의 딸이 가장 먼저 태어났다. 먹성이 좋은 아이였다. 늘 뭔가를 입에 가득 넣은 채로, 배가 불뚝해 티셔츠가 배꼽서 한뼘은 올라간 사진을 많이 남겼다.
아이는 자랄수록 갸름해졌다. 유독 손가락이 길고 희었다. 어른들은 손을 어루만지며 “피아노 잘 치겠다” “일 안하고 편하게 살 손이다” 했다. 언니의 손은 반지를 끼던, 팔찌를 차던, 우아하게 어울렸다.
네 살 터울인 언니와 내가 둘 다 대학생이던 어느 여름방학에 우리는 미국 사촌동생네 놀러갔다. 언니는 말투가 느릿느릿하고 서두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묘하게 청력이 멀쩡한데도 잘 듣지 못했다. 사오정 같이 딴 소리를 수시로 했다. 도대체 왜 못 듣냐 타박하면 “응? 뭐라고 했어?” “얘는, 내가 잘 못 듣잖아”하면서 배시시 웃었다.
언니는 특이한 버릇이 있었다.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지 않고 옆에 걷는 사람 팔꿈치 위쪽을 손가락 세 개로 살그머니 잡았다. 왜 거기를 잡느냐 물으면 살이 말랑말랑해서 만지면 기분이 좋다고 했다. 언니의 어딘가 나른한 몸짓과 하얀 얼굴, 길쭉한 손가락을 보고 있으면 세상에 별로 급한 일이 없었다. 언니는 별 말을 안해도사람을 안심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우린 몇 계절을 건너 뛰어 가끔 고속터미널에서, 시내 어딘가에서, 언니의 병원 근처에서 만났다. 언니는 공부하느라 유행을 잘 몰랐다. 요즘 사람들이 뭘 하고 지내는지 큰 관심이 없었다.
20대의 언니는 서울 남쪽의 병원에서 수련해 소아과 전문의 자격증을 땄다. 그녀는 30대 즈음에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 되었다. 큰 병원에서 월급 의사로 일할 때 하루에 백 명 넘게 코흘리개 아이들이 몰려왔다. 감기와 수족구가 도는 계절에는 무척 바빴다. 그 사이 언니는 성실한 남자와 결혼을 했다. 동생 둘을 결혼시켰고, 자격증 시험을 오래 준비한 남동생에게 매달 용돈을 줬다. 세상 무서울 게 없고 목소리 큰 고모가 큰 딸을 제일 의지했다.
창문이 없는 진료실은 답답하다. 그래도 언니는 하루 종일 밀려오는 환자들에 내색하지 않았다. 마음이 불안한 젊은 엄마들에게 시간을 많이 내주는 선생님은 인기가 높았다. 언니에게 영유아검진을 받으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작 언니는 자기 아이와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걸 미안해했다. 엄마가 아픈 아이들을 많이 보니까, 집에 바이러스를 많이 묻히고 가서 아이가 더 자주 앓는 것 같다고 했다.
언니 아이와 내 아이는 50일 차이로 태어났다. 아이 몸에 갑자기 두드러기가 나거나, 이유 없이 열이 떨어지지 않을 때, 병원에 가야할지 고민하는 늦은 밤에 내가 다급하게 보내는 메시지에 언니는 늘 늦지 않게 답했다. 의사가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을 여러 장의 사진들을 언니는 자세히 보고, 나름의 처방을 내렸다. 내 아이가 병원에 열 번 갈 것을 다섯 번 갔다면, 그건 전적으로 언니의 공이다.
일 안하고 편히 산다던 길고 흰 손가락은 오늘도 바삐 움직인다. 진료실 문이 열리면 언니는 차트를 보던 얼굴을 들어 눈을 맞추고, 상냥하게 인사할 것이다. 언니의 손가락은 청진기 끄트머리를 잡고 아이의 배와 등을 천천히 짚는다. 달력 빨간 날에도 어김없이 오후 세 시까지 진료하는 언니가, 올해는 자신한테도 시간을 많이 내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