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동안이라니까
엄마는 마흔이 될 때까지 전업 주부로 지냈다. 엄마는 못하는 게 없었다. 점토로 포도장식이 멋스러운 잡지꽂이를 만들었고, 요리 수업을 듣고 코코넛 새우를 튀겼다. 한동안은 퀼트를 했다. 천 조각을 모아 바늘꽂이와 쿠션, 내가 좋아했던 분홍 고양이 쿠션 세트를 만들었다.
전업주부는 주부에 전념한다는 뜻이 아니다. 집에 돈을 가져오는 일을 제외한 모든 일(全業)을 한 사람이 도맡는다는 의미였다. 늦게 퇴근하는 아빠 대신 엄마는 전구를 갈았다. 못을 박았다. 연탄 때는 낡은 아파트에서 연탄 꼬챙이로 쥐를 잡았다.
비오는 날 우산 없이 비 맞고 울적하게 가는 일이, 나에게는 정말로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엄마는 언제나 때맞춰 왔다. 준비물을 빠뜨렸다 해도 엄마가 뛰어와 가져다줬다. 엄마는 어떤 일도 허투루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학교 방학숙제였던 ‘탐구생활’은 방학이 끝나고 나면 두 배 두께가 됐다. 책에 나오는 모든 실험 페이지에는 엄마가 찍은 내 사진으로 체험을 ‘증명’했고, 칸이 좁아 답을 다 쓰지 못하는 곳에는 일일이 미농지를 붙여 긴 줄글을 썼다.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단 한 번도 방학 숙제로 칭찬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부모님을 모셔와 특별 수업을 하는 날에 엄마는 맞춤법 선생님으로 나섰다. 엄마가 얼마나 멋지게 차려입고 왔는지, 수업은 또 얼마나 활기차고 재미있었는지! 그 날 칠판 앞에 선 엄마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엄마의 꿈은 선생님이었다. 엄마는 사범대에 가고 싶었다. 가정 상황이 녹록치 않아 졸업하면 바로 취업을 해야 하는 경우도 대비해야 했다. 영양사 자격증과 교원자격증을 같이 딸 수 있다는 식품영양학과에 갔다. 들어갈 때는 수석이 아니었지만, 졸업은 수석이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자, 엄마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다만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엄마가 서울의 4년제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무역회사를 다닌 재원이었어도, 이력서 상으로는 내밀 이력이 없는 가정주부였다, 엄마가 손대는 일마다 얼마나 야무지게 해내는지, 양가 도움 없이 시작해 어떻게 돈을 모아 십 년 만에 집 한 채를 갖게 됐는지, 남매를 얼마나 반듯하게 키워냈는지는 도저히 계량해 보여줄 방도가 없었다.
엄마는 경력 단절 여성도 진입할 수 있었던 보험설계사와 학습지 교사 중에 고민했다. 그리고 학습지 쪽을 택했다.
처음에는 방 하나를 공부방으로 꾸몄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부터 중학교 아이들까지 아이들 수십 명이 집으로 왔다. 엄마는 몇 년을 공부방을 운영하다가 방문 교사로 전환했다.
엄마는 점심 먹고 오후 2시쯤부터 시작해 아이들 열댓의 공부를 봐주고 저녁때를 놓치고서야 들어왔다. 학습지 교사의 방문 시간은 10~15분 남짓이다. 그래도 이동시간을 고려하면 한집에 20~30분씩은 걸렸다. 아이들은 제 시간에 집에 있는 법이 적었다. 간혹은 말도 없이 수업을 취소했고, 어떤 아이는 아프고, 어떤 아이는 바빴다. 엄마는 교재를 잔뜩 넣은 가방을 조수석에 던져놓은 채 경차를 타고 동네를 누볐다.
엄마는 안경을 쓰지 않았다. 난시도 있고, 노안도 왔는데, 안경을 맞추지 않고 버텼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교사 일이었다. 안경을 쓰면 ‘할머니 같을까봐’안 썼다. 나중엔 안경을 하나 맞추긴 했지만 그마저도 가끔 밤에 교재 정리를 하거나 성경을 필사할 때만 썼다.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엄마는 안경과는 타협하지 않았다. 안경을 바꾸러 가면 안경점에서는 노상 엄마를 꾸짖었다. 안경을 더 오래 쓰셔야 한다, 불편해도 적응하셔야 한다, 이제는 안경을 써야 시력이 그나마 유지된다 했다. 그래도 그때뿐이었다.
엄마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료 교사들이 일고여덟 정도 있었다. 엄마는 그 중에서도 당연히 왕고참 언니였다. 대부분이 아이를 키우다가 늦게 취업했어도, 엄마처럼 장성한 딸이 있는 집은 없었다. 엄마와 동료교사들을 관리하러 본사에서 파견 나오는 지국장들도 엄마보다는 열 살 씩 어렸고, 엄마는 종종 인생 선배로 그 사람들의 고충을 들어 주었다.
엄마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이에 나와 동생은 대학을 마쳤다. 이때쯤이면 끝났겠지, 하고 9시 반쯤 전화를 걸면 엄마는 집에 돌아가는 차안이었다. 그렇게 밤이 또 지나고, 또 지나고, 20년이 됐다.
엄마는 결혼한 딸을 둔 선생님에서, 손주를 둔 선생님이 됐다.
엄마의 환갑을 기념해 온 가족이 해외여행을 갔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엄마는 “20년을 했으니 일은 그만두겠다”고 했다. 이렇게까지 오래 하게 될 줄은 몰랐다면서. 엄마는 해를 넘겨 둘째 외손주가 14개월이 되는 2월까지 근무했다. 봄부터는 아이를 돌보러 매주 기차를 타고 우리 집에 왔다.
엄마는 손주들이 열한시가 다 되어 잠이 들면, 비로소 조용히 안경을 끼고 성경을 쓴다. 안경 쓴 엄마 모습은 엄마가 밤늦게까지 다음날치 교재를 정리하던 모습과 포개진다. 묵직한 택배박스에서 엄마는 아이들의 이름을 짚으면서 진도에 맞는 교재를 꺼내뒀다. 교재를 포장한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었다. 12시가 넘어도 엄마 방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엄마는 마흔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엔 늦은 나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20년이 지난 다음 돌이켜보니, 마흔은 정말 뭐든 할 수 있는 나이였다고, 마흔을 향해 가는 딸에게, 뭐든 시작해보라고 말한다. 정말 그렇다.
엄마야말로 뭐든 시작했으면 좋겠다. 인생은 기니까. 엄마는 아직 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