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죽음을 안타까워할 사람 몇 명이나 될까.
오늘 우연히 부고를 보다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아직 세상을 떠날 나이는 아닌데 별세했다는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고인이 그다지 친분이 깊은 관계는 아니다. 젊은 시절 업무상 알고 지냈던 사이일 뿐이지만 그래도 마음이 무겁다. 업무 현장을 떠나고도 아주 가끔씩 SNS를 통해 소식을 듣긴 했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많은 이들과 소통하며 좋은 관계를 가졌던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허무하다. 너무도 젊은 나이에 세상과 이별이라니.
그의 사망 소식에 나의 죽음을 생각해 본다.
별안간 생을 마감하거나 천수를 누리다 가거나, 어떤 경우든 나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명복을 빌어줄 사람은 몇이나 될까. 나는 그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 주지 않고 잘 살았나.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해 줄까. 스스로에게 평판조회하듯 물어본다. 자신이 없다. 후회가 든다. 사람들에게 욕먹을 짓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밀려든다. 저승에 가면서까지 손가락질받으면 어쩌나.
지금부터는 죽음에 대비한 평판 관리다.
자식에게는 "올곧게 인생을 개척해 살아가도록 지혜를 주신 아버지, 항상 성실하게 자기 관리하며 사신 아버지, 자식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 주신 아버지"로 기억되고 싶다.
그러나 그러기엔 너무나 부족하다. 따뜻한 말 한마디보다는 매서운 꾸짖음이 많았다. 관심보다는 무관심, 방치의 시간이 길었다. 남은 생은 관심과 따뜻한 말, 조건 없는 내리사랑으로 베풀자.
지인들로부터도 "세상을 참 열심히 살아온 사람, 늘 상대를 배려하고 베풀 줄 아는 친구, 적극적으로 자기 일을 개척하며 세상에 도움이 되려 노력한 사람, 책임감 있고 업무 추진력이 강한 사람, 온화하고 너그럽고 도량이 넓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그러나 지금 죽는다면 그런 평가는 받기 어렵다.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는 건 어느 정도 인정받을 수 있겠지만 남을 배려하고 뭔가를 베풀고 너그럽고 도량 넓다는 말을 해줄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인생의 거울을 보면 알 수 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 배려심 깊고 가슴이 따뜻하고 마음이 넓은 사람은 누구니"라고 물으면 "일단 당신은 아닙니다"라는 답이 돌아올 것이다.
부고를 보고 생각하게 된 나의 죽음. 언젠가 닥쳐올 죽음에 대비해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기억될 것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족에 대한, 주변 사람들에 대한, 그리고 삶에 대한 나의 태도에 변화가 오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하여 나의 부고를 본 누군가가 나와의 친분은 그다지 없었어도 잠시나마 안타까워할 정도는 되어야 내 인생이 슬프지 않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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