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의 과정을 정서적으로 버텨나가기
중년 남성 A는 위암 진단 이후 모든 복잡한 생각이 밀물 들어오듯 경험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부터 남아있는 가족에 대한 염려, 그간 자신이 살아오면서 겪은 여러 회한들. 그런 생각들은 어쨌든 암이 악화돼서 나쁜 결과가 오면 어떡하지에 대한 불안, 걱정, 염려였다. 진단 후 1달가량 기다려야 하는 수술의 기간 동안 암이 더 자라나서 치료결과가 달라지면 어떡하나 전전긍긍했다. 그러다 드디어 수술을 하는 날. 솔직히 수술이 겁나고 혹시나 수술이 잘못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그냥 막연히 기다리는 것보다는 후련했다. 수술을 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은 편안하다. 내가 뭔가 본격적으로 암과 싸우고 있고 내 몸에서 암이 떠나가는 느낌도 든다. 그렇게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치료 의지도 다지고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먹는 것도 챙기고 몸도 더 움직이려 노력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제는 마음이 약해진다. 치료 전에는 치료가 시작되기만 하면 더 기운을 내고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그런데 항암치료를 하면서 하루하루 몸살처럼 몸이 아프고 입맛도 뚝 떨어지고 피로감에 아무것도 할 힘이 없다. 문득 이렇게 점점 약해져 가는 자신에 익숙해져 가는 느낌이 든다. 항암치료 날짜가 다가오면 치료를 받고 난 후 며칠간 신체적으로 몸살처럼 고생하는 그 기간이 두렵다. 간혹 이런 치료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이 든다. 이전에는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 불안했다면 지금은 그냥 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문득 그런 자신이 예전의 자신과 사뭇 다르게 느껴지고 가족들 역시도 점점 약해지는 자신을 걱정하는 게 느껴진다.
암 진단 이후 치료 전까지의 시기에 암 환자는 일종의 막연함과 싸우는 시기입니다. 암이라는 질병에 놀라기도 하고 이 병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일지, 앞으로 치료가 어떻게 진행될지, 어느 정도의 치료 가능성이 있을지 등등 불확실한 상황에 우리의 정서는 "불안"으로 가득 찹니다. 다만 이 불안은 아직까지 현실의 영역이 아닙니다. 앞으로 내가 어떤 상황이 될지에 대한 향후 미래에 대한 영역이죠. 그렇기 때문에 불안은 우리의 생각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아직 현실로 닥치지 않은 미래의 여러 상황들을 가정해서 사소한 결과부터 극단적인 결과까지 머리 안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립니다. 생각이 많으면 우리는 몸이 긴장되고 잠드는 것도 어렵게 되죠.
다만 어떤 형태로든 그 불확실성이 줄어들면서 치료가 시작되면 상황은 바뀝니다. 암의 상태가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도 알게 되고 앞으로 어떤 치료를 받게 될지, 치료가 가능할지 등등도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여러 변수에 대한 불안은 남지만, 이전에는 불안의 정중앙에서 항상 시달렸다면, 이제는 불안이 자극될 때만 문뜩문뜩 영향을 받는 정도죠. 그렇지만 이렇게 치료가 시작되면서 찾아오는 다른 복병이 있습니다. 바로 "우울"입니다. 불안이 막연한 미래에 기반한다면 우울은 현실의 괴로움에 기반합니다. 처음에는 견딜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암 치료의 과정이 점차 현실의 여러 고통과 괴로움으로 다가오면서 우리의 정서는 우울이라는 색깔에 점차 물들게 됩니다.
암 치료 상황에서의 여러 어려움은 현실의 영역입니다. 수술 이후 통증이 지속될 수 있고 암과 함께 신체 장기를 떼어내면서 몸의 생리기능에 여러 변화가 생길 수 있습니다. 수술 이후 몸에 여러 관을 넣은 채 불편한 생활을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수술로 신체 외모가 바뀌거나 항암치료를 하면서 모발이 빠지는 등 타인에게 보이는 내 모습이 바뀌는 것이 힘들 수 있습니다. 주기적인 항암 치료 과정에서 매번 일정기간 동안 심한 구토감으로 낮밤 괴로울 수 있고 심한 몸살 기운이나 손발에 피부가 벗겨지고 손발이 저려 꼼짝할 기운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신체적인 어려움뿐 아니라 치료비 등 경제적으로 힘겨울 수 있고, 이제까지 열심히 해왔던 학업이나 직장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위축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 관계에 외로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어느새 암은 막연한 공포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나의 삶을 갉아먹는 괴로움이 되었습니다.
우선 이 말씀부터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암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불안이 정상적인 반응이듯, 우울도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암에서의 정서적 반응입니다.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현실적인 어려움에 정서적인 괴로움과 우울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암으로 인한 정상적인 우울에 대해 추가적인 정신적인 질병으로 바라보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이러한 우울한 감정이 치료과정이나 일상생활에 실질적인 부작용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보완하고 관리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관리는 별도의 정신건강의학과 진료가 아니라 통상적인 암 치료의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하죠.
물론 우울로 인한 실제의 피해가 우려되는 경우라면 약물치료를 포함한 정신종양학에서의 진료도 암 치료체계 안에서 병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만 이러한 정신의학적 접근과 별도로 암 치료 과정에서 동반될 수 있는 현실적인 문제를 관리하기 위한 다방면의 노력도 병행되어야 합니다. 이 부분은 암 환자 개인의 영역일 수도 있고 가족의 영역일 수도 있으며 의료영역이나 사회 제도의 영역까지도 포함됩니다. 암 환자의 입장에서라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그래도 찾아 먹으면서 체력을 유지하고,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을 직접 하려고 노력하고,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일상에서 내가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활동을 억지로라도 하고, 삶에서 소중한 사람이나 가치를 계속해서 붙잡아가야 합니다. 가족의 입장에서도 그런 과정을 옆에서 같이 바라봐주고 들어주고 지지해 주는 것이 필요하죠.
동시에 의료진의 입장에서는 암 치료과정에서 동반될 수밖에 없는 신체적인 어려움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의학적인 도움을 제공해야 합니다. 동반되는 여러 합병증이 있다면 어쩔 수 없으니 참아야 한다가 아니라 그래도 그 영향을 줄여줄 수 있는 방법을 가능한 제공 해 주어야 하죠. 과거에는 암치료가 생존에만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치료과정에서의 불편감은 당연히 견뎌야 하는 것으로 치부되었다면, 지금의 암치료에서는 암 치료 과정에서 환자가 경험하는 삶의 질 역시 중요한 관리대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암 치료에서 생기는 신체적 불편함이 있다면 환자의 입장에서도 의료진에게 적극적으로 알리고 의료진도 이에 대한 관리를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사회제도적인 측면에서는 암 치료에서 과도한 경제적 부담이 환자에게 전가되기 않도록 의료보험 등을 통한 지원체계가 계속 보완되어야 합니다. 현대의학이 계속 발전하면서 표적치료를 포함한 새로운 암 치료가 계속 나오고 있지만 새로운 치료일수록 개인이 부담하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드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환자와 가족입장에서는 의료에 대한 지식이 부족할 수밖에 없기에 의료진이 새로운 치료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밖에 없는 심정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상황에 대한 지원 및 제도, 지침의 보완은 사회가 해야 합니다. 암 환자가 경험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교육 및 경력의 단절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이나 일상생활에서 가사, 육아를 포함한 실제적으로 처한 어려움을 도와줄 수 있는 지원책도 민간단체를 포함한 사회적 영역에서 의료복지차원에서 접근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암은 현실입니다. 이 현실이란 앞서서도 계속 강조해서 말하였듯 암이 이제는 더 이상 일부 운 없이 병에 걸린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나 일생 중에 직간접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런 암으로 인한 개인적인, 사회적인 영향은 막역한 공포나 상실이 아니라 암을 가진 채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암 경험자에게 현실적인 영역인 셈입니다. 그렇기에 나도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하고 사회적으로도 대처해야 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