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이야기
청년 암 경험자에서 주된 이슈 중에 하나가 이성관계에서 내가 암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가입니다. 어차피 암을 치료하는 중에는 주변 친구들도 아는 경우가 많고, 자신도 여러 상황을 일부러 감출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런 고민은 덜합니다. 그렇지만 내가 암을 다 치료하고 일상적인 생활을 똑같이 하고 있는데 이성관계에서 굳이 썸을 탈 때부터 암을 알릴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고민이 됩니다. 암이 무슨 딱지도 아닌데 미리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마치 내 몸에 문제가 여전히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마음도 불편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건 본능입니다. 사랑의 감정에는 국경도, 나이도, 조건도 없죠. 암 역시도 사랑을 막을 순 없습니다. 그런데 암 경험자는 소개팅을 나갔을 때 첫날부터 암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처럼 인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연애 가능성이 있는 상대방에게 과거의 암을 숨기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거고 상처를 줄 수 있다고 하면서 말이죠. 여기는 당연히 암에 대한 오해가 그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이 오해는 모든 암을 불치병이나 죽음으로 동일시해서 생각하거나, 암이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생기는 특별한 질병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앞선 여러 이야기를 통해서 암을 그렇게 바라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는 줄곧 해왔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사회적으로 암에 대한 왜곡된 시각은 연애에서도 드리워져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 모두는 상처와 같은 마음속 숨기고 싶은 비밀이 몇 가지씩 있습니다. 그 비밀 중에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문제도 있고, 아직까지 남아 있는 문제도 있고, 또는 훗날 영향을 줄지도 모를 문제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반적인 관계에서 그런 비밀을 처음부터 다 이야기하면서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깊은 관계가 되었을 때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면서 우리 마음 깊숙이 넣어두었던 자신만의 이야기를 조금씩 하게 됩니다. 이런 비밀은 암도 마찬가지입니다. 암은 그만큼 더 힘든 트라우마이기에 어떤 비밀보다도 꺼내기 힘든 주제입니다. 그리고 만남을 시작하는 단계부터 이런 비밀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거나 거짓말을 한다고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상대방을 오히려 존중하고 이해해 주는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암 경험자 입장에서는 썸이나 연애 관계에서 먼저 조심스럽고 주눅이 드는 경우가 더 흔합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나 스스로 먼저 위축됩니다. 나의 암으로 인해서 상대방이 나를 받아주지 않을 거라 먼저 주눅이 드는 거죠. 여기에 유럽에서 발표된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젊은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연구에서 암 경험자와 데이트를 하는 과정에서 인식조사를 한 것이죠. 결과는 조사 대상에서 암 경험자와 연애관계로 만나는 것에 대해 암을 경험한 바 없는 대상에 대한 선호와 통계적으로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만났을 때부터 암 경험자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는 경우는 2-5% 정도로 아주 적었죠. 대부분은 만남을 이어가면서 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회문화적인 차이가 다소 있을 수는 있겠지만 현재나 앞으로 우리 사회의 암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인식의 공유는 필요합니다.
물론 암이라는 상황은 소중한 관계가 되면 서로 알고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신체적인 후유증상이 있을 수도 있고, 암의 상황에 따라 재발 등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깊은 관계가 되어 간다면 서로 이 부분에 대해 같이 공유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다만 암 경험자 입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언제, 어떻게 나누어야 할지는 참 어려운 숙제입니다. 외국의 암 지원 단체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썸을 타기 시작할 때가 아니라 3번 이상의 만남을 지속하면서 서로에 대한 마음이 생기면서 이야기를 나누라는 조언을 합니다. 횟수가 꼭 중요하다기보다는 서로 마음이 생겨가는 단계에서 서로에 대한 존중과 이해의 측면으로 이야기하라는 거죠. 또한 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꽤나 힘든 과정이기 때문에 가까운 친구나 가족, 선생님 중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과 상의하고 연습을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암 경험자 중에서는 암으로 인한 상황이나 진행 상태로 인해서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고 서로를 배려하는 측면에서 암 경험자를 만나기를 선호할 수도 있습니다. 꼭 이성 관계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유사한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과 정보와 함께 마음도 나누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일종의 또래집단(peer group) 같은 관계이죠. 코로나 상황으로 다소 위축되기는 했지만 관련된 웹사이트나 앱도 있고 주기적으로 파티나 모임을 가지기도 합니다. 암 경험자가 암 경험자를 만나야 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나를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사회적 지지자원을 넓히는 과정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삶을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게 하는 동력원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건 암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한 누군가와 사랑은 나누며 살가야 합니다. 누구에게 그런 사랑의 기회는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며 서로 이해하고 의지하며 함께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위해 썸으로 만나기 시작할 때는 서로를 한꺼번에 아는 것이 아닌 조금씩 알아가고 이해해 가는 과정에서 사랑의 미묘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아! 그리고 이 주제로 글을 마무리하면서 꼭 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암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했을 때 썸을 타고 있는 상대방이 이 상황을 공감하고 이해하며 관계를 이어나갈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암에 대한 이야기 이후 관계가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이건 암 때문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디까지나 이건 암이 있었던 나의 탓이 아니라 암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방의 탓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살면서 암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관계에서 서로의 어려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건 그 사람이 가진 사랑의 역량 때문입니다. 이건 원망의 영역도, 비난의 영역도, 아쉬움의 영역도 아니라 그저 사랑이 연결되는 과정에서 인연의 영역입니다. 그러니 그저 인연이 아닌 것 때문에 사랑에 주눅 들지 않아야 합니다. 이 역시 암과 관련 없이 사랑의 일반론이죠.
Tuinman MA, Lehmann V, Hagedoorn M (2018) Do single people want to date a cancer survivor? A vignette study. PLOS ONE 13(3): e0194277.
https://journals.plos.org/plosone/article?id=10.1371/journal.pone.0194277
Dating and Sex for Young Adult Cancer Survivors: Expert Answers
https://www.cancer.net/blog/2018-10/dating-and-sex-young-adult-cancer-survivors-expert-answers
Dating and Intimacy
https://www.cancer.net/navigating-cancer-care/dating-sex-and-reproduction/dating-and-intim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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