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강릉, 동해 | 정동진 & 논골담길 & 묵호항 & 어달항
아주 평범한 목요일 아침 출근길이었다. 어떤 생각도 들지 않은 빈 시선은 버스 창 밖을 향해 있었다. 그러다 시청 즈음 갔을까 철썩하는 파도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마침 다음날은 연차였고, 늦은 오후 공연 예매가 있기 전까지 19시간 정도의 시간이 비게 된 날이었다. 내 손은 이미 코레일 어플을 열고 있었고, 정동진행 지차와 동해행 기차, 그리고 서울로 올라오는 열차까지 결제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다음날 오전 7시가 되었다.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고 떠나는 여행은 처음이었다. 나는 완벽한 계획형 인간이다. 당일치기 여행이라도 미리 어디를 갈지, 어느 식당에서 식사를 할지, 교통편은 어떻게 되는지 꼭 시간표대로 정리하며 여행을 떠나야 하는 성향이다. 아래 이미지는 지난여름 여수 여행 때 작성한 Google Sheets(어플만 설치하면 무료로 이용 가능하고, 휴대전화와 태블릿, PC 모두 사용 가능해 여행 시 매우 유용하다.)의 일부분이다. 1박 2일 이상일 경우 무조건 같은 일자에 두 가지 계획을 세워 시간대, 교통편, 이동 방향, 참고 이미지를 넣어서 여행 일주일 전에 완성 후 수정을 하며 현지에서 발생할 문제나 돌발 상황을 최소화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이지만, 이미 나는 너무 지쳐있었다. 그간 바쁘고 무리한 일정들의 연속으로 과부하되어 절실히 '쉼'을 원하는 몸은 강박에 가까운 성향을 이겼고, 그대로 아무 계획 없이 서울역에 도착했다.
아침에 눈에 보이는 대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물건을 가방에 챙겼다. 보조 배터리, 카메라와 여분 배터리, 전날 퇴근길에 새로 맞춘 선글라스, 저녁 공연 때 재관람 할인 혜택을 받을 이전 관람 티켓, 생수 한 병. 생각보다 단출하게 짐을 싸고 07:01 정동진행 기차에 몸을 맡겼다. 2시간이 조금 더 걸려 도착한 정동진은 잔뜩 흐린 날씨였고, 바람은 놀랍도록 많이 불었다. 흐린 구름 아래에서도 푸르게 빛나는 정동진 바다는 이날도 아름다웠다.
정동진역에서 동해역으로 가는 기차시간까지 2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어 바다 가까이 갔다. 귀에서 들려오던 파도소리를 직접 들으며 먼 지평선을, 잘게 부서진 부드러운 모래를 만지며 해변으로 역동적인 에너지를 쏟아내는 파도를 바라봤다. 아무 생각 없이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고, 아무 생각 없이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는 중년의 여성들과 거동이 불편한 노모를 안고 이동하는 아들 내외를 바라봤다. 머리를 비우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늘 귀에 꽂혀있어 내 몸처럼 느껴지는 이어폰을 빼고 모래사장 둔덕에 앉아 불규칙하게 철썩이는 소리는 늘 긴장하며 사는 몸을 풀어주고 있었다. 이날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보다, 유명 아티스트의 목소리보다 파도소리가 마음을 더 만져줬다.
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곳을 벗어나니 시간의 개념이 사라졌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파도소리를 듣다 보니 어느덧 동해행 기차를 타는 시간이 되었다. 누리로를 타고 가던 중 그냥 묵호에서 내리고 싶은 마음이 들어 묵호역에서 하차를 했고, 간단히 식사를 한 후 기찻길 뒷골목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걷고, 걷고, 걷다 보니 묵호항이 나왔고, 왼쪽은 벽화가 그려진 곳이 있어 길을 따라 올라갔다. 적막만이 가득한 길이었다. 소박하고 정겨운 소도시의 골목길. 인간미가 넘치고 옛 기억이 괜스레 떠오르는 그런 길이었다. 올라가는 길에 본 이 골목길의 이름은 '논골담길'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곳은 아니지만 왠지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언덕길을 올라가는 동안 약간의 기분 좋은 땀을 흘리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살짝 입이 마르는 기분은 꽤 괜찮았다.
언덕에서 내려와 또 하염없이 걸었다. 여전히 목적지는 없었다. 바람이 많이 불어 더 거세지는 파도소리는 가슴을 뜨겁게 했고, 그 소리는 발걸음을 더 빠르게 만들었다. 오후가 되어도 파도는 큼지막한 돌을 당장이라도 깰 듯이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바위를 휘감으며 다시 깊은 바다로 돌아가는 파도의 거친 소리를 하루종일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카메라를 들어 영상을 남겼다. 아마 지친 순간이 올 때 크게 위로가 될 소리가 될 것이며, 새로운 시작을 다짐할 때 듣고 싶은 소리가 될 것이다.
그렇게 20여분을 더 걸으니 어달항이라는 곳이 나왔다. 색색의 테트라포트가 이색적이었다. 높은 파도에서도 낚시를 하는 용감한 사람도 발견했다. 이 어달항에 있던 이 순간만 구름에 갇혔던 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등대에 앉아 때 아닌 추위에 얼었던 몸을 녹였다. 20,000보를 넘게 걸었던 발도 신발에서 꺼내 주물러줬다. 그리고는 등대에 기대 눈을 감았다. 정적만 가득했던 일상에 평온하지만 생동감 넘치는 소리가 입혀졌다. 눈을 감고 햇빛을 받으며 나는 나로서 충분했고, 나는 내 모습대로 잘 살아가고 있다고 스스로 보듬어줬다.
다음날 동행인과 함께 다른 지역으로의 여행이 이미 계획되어 있었음에도 무리하게 여행을 떠났던 건, 예상을 벗어난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던 것 같다. 반복되는 일상, 반복해 듣는 음악, 매일 같은 창 밖 풍경을 보며 정해진 시간에 나를 싣고 움직이는 버스의 움직임도 지쳤던 모양이다. 변주하는 파도의 모양과 소리, 예측할 수 없는 행선지, 낯선 냄새, 낯선 자극으로 하루를 꼬박 채웠다.
계획형 인간에게 무계획 여행이란 무엇일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탈피(脫皮)였다. 나를 속박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 주변 환경이건 아니면 내가 만들어 낸 강박적인 나이건 말이다. 그 짜릿한 전율을 느낄 순간을 위해 언젠가는 무계획 여행을 떠날 나를 응원하며. 마침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