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강릉 | 정동진 & 안목해변
점심 식사 후 카페에 앉아 2시 10분 정동진으로 향하는 누리로 열차를 기다리며 달궈진 몸을 식혔다. 카메라 사진을 휴대전화로 옮기며 많은 일이 있었던 오전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내 기억 속의 강릉은 푸른 바다와 금빛의 보드라운 모래, 허리 높이까지 쌓인 흰 눈이었는데 사진 속 강릉은 초록의 생동감이 넘치는 도시였다. 여러 번 방문한 여행지는 이미 익숙하기에 진부하고 단조로운 풍경이 나열돼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예기치 못하게 만난 이런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을 때, 여행의 즐거움은 폭발한다.
강릉은 내가 기억하는 인생 첫 번째, 서울을 떠난 여행지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온전한 네 가족이었던 그 시절은 강원도 여행을 자주 갔다. 어느 날은 작은 티코로, 또 어느 날은 고속버스를 타고 갔다. 아직도 또렷한 몇몇 여행은 지금 떠올리면 아주 사소한 에피소드이지만 왜 아직도 그게 기억에 오랫동안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다.
때는 1996년 전후로 기억한다. 작은 티코로 대관령을 넘어가던 그날은 지겹도록 눈이 왔다. 네 본의 타이어에 칭칭 둘러맨 체인으로도 역부족이었는지 티코는 고개를 넘지 못했고 결국 견인차에 매달린 차의 뒷좌석에 앉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언니와 함께 따라 부르며 내려갔던 날도 있었고, 고속버스를 타고 가던 어린 시절의 나는 꽉 막힌 도로 속에서 배탈이 나 두 시간가량 식은땀을 흘리며 고생했던 기억도 소소히 난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얼굴 끝을 할퀴던 어느 날 주문진 항에서 먹었던 오징어회와 오징어순대도, 쪼르르 소리가 나는 수산 시장의 풍경도 정확하게 기억이 난다. (그때 기억이 너무도 선명해서인지 지금은 너무도 변해버린 주문진, 대포항 등은 잘 가지 않는다.)
이날 떠난 정동진도 내겐 그런 곳이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가득한 곳. 내 기억 속의 정동진은 '모래시계' 그 자체였다. 정동진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목, 조각 공원으로 가는 길목마다 색색의 모래시계를 판매하는 좌판으로 빼곡했었다. 두꺼운 패딩, 칭칭 감은 목도리, 귀까지 덮은 모자, 목에 건 흰 털실 장갑으로 무장한 나는 많은 인파 속에서 엄마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모래시계 구경보다는 익숙한 엄마의 뒷모습을 바삐 따라간 종종걸음이 참 기억에 남는다. 정동진에서 바라본 주황빛의 떠오르는 태양은 엄청난 추위를 상쇄하는 뜨거운 정서 충족을 주었고, 어렸던 나에게 감성과 낭만을 주었던 게 분명하다. 정동진 조각 공원에서 먹었던 그 당시 꽤 값이 나갔던 빙수도, 가슴속까지 얼릴 듯 세차게 움직이는 바다의 파동도, 곱디 고운 백사장도 기억에 선명했다.
그 기억을 안고 몇 년 전 갔었지만 많이 변해버린 모습에 크게 실망했다. 굳이 다시 올 필요가 없겠다 생각했지만 뚜벅이에게 기차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쉽게 갈 수 있다는 점은 축복 같은 일이었고, 태양이 작열하는 날씨라면 바다는 그 어느 때보다 파랄 것이 자명했기에 가보기로 했다.
역시나 기억 속 정동진은 전혀 없었다. 침식이 일어나고 있어서인지 모래사장의 규모가 작아진 것 같았다. 경사도 물론 가팔랐다. 그렇지만 푸른 바다는 여전히 좋았다. 동해 바다만이 주는 푸른 바다의 감동은 세월에 지나도 여전했다. 살아가는 삶에서 느낀 권태와 괴로움, 고단함이 질병처럼 온몸을 장악했었는데 푸른 바다는 물약처럼 나를 잠시나마 치유해주고,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는 가루약처럼 나를 잠시나마 편안하게 해 준다.
그늘 하나 없는 뙤약볕의 백사장에 서 있었다. 오랜 시간. 물속에서 더위를 잊는 사람들을 바라보기도 하고, 파도에 쓸려 나가는 모래를 걱정하기도 했고, 개인이 가져온 돗자리는 반입이 안 된다며 피서객들의 돗자리를 접게 하는 모습을 쳐다보기도 했지만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 매번 색다른 형태로 다가오는 파도를 아주 오랫동안 바라봤다. 마음에 안식이 찾아온다. 파도 소리를 듣고 싶어 이어폰도 꽂지 않았다.
물이 흐르는 곳에 오랫동안 살면 우울증이 높아진다는 글을 어디선가 봤다. 물가에서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생각이 많아지는데 평소에는 애써 감춘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강릉역으로 다시 돌아가는 기차 시간까지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있었는데 끊임없이 자잘한 고민과 생각들이 지나갔다.
그중, 누군가 나에게 20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얼 하겠냐고 물었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나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20대는 너무 힘들었고, 괴로웠다. 예민했고, 첨예한 칼끝 같았다. 30대가 되니 모든 면에서 여유를 찾았다. 전에 없이 넉살도 생겼고, 마른 가지 같던 감정도 여름날의 나무처럼 잎이 돋아나 풍성해졌고, 포용력도 조금은 생겼다. 어린 날 놓쳤던 것들에 대한 아쉬움도 물론 있지만 앞으로 보듬고, 채우며 그것들을 가꾸며 살아가고 싶다.
다시 기차를 타고 강릉역에 도착했다. 서울로 올라가는 KTX-이음 탑승시간까지는 두 시간 반 정도 남았다. 더운 날씨에 무리하지 말까 고민을 잠시 했지만 딱 한 곳의 바다만 더 보기로 마음먹고 택시를 타 안목 해변으로 향했다.
어느 날부터 사람들로 북적이는 안목 해변은 어린 내 기억 속에는 조용한 바닷가였다. 인파 속에서 더 빛이 나는 곳이 되었는지, 빛이 바랬는지는 쉽게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높은 건물이 들어서고, 빼곡히 들어선 차, 외부에 설치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로 뒤덮인 해변은 시릴 정도로 푸른 바다의 아름다움을 조금은 빼앗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자연은 때 묻지 않았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최근 강릉이나 속초, 양양을 잘 찾지 않은 이유도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깨질까 두려워서이다. 언제나 추억 속에 갇혀서 살 수는 없지만, 좋은 추억은 조금은 오랫동안 고이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 카메라의 SD카드를 꺼내 휴대전화로 옮겨 담으며 여행을 마무리했다. 기차 예매를 취소했다면 푸른 바다와 하얀 파도, 녹음이 우거진 곳들에게 받는 치유는 없었을 것이다. 때로는 무리하게 일정을 이어나가는 것이 옳은 판단일 때가 있다. 이 여행이 그랬고, 보름 간의 내 직장 생활 또한 그랬다.
"잘 살고 있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하고 싶어 아등바등 살아왔던 나에게 고함량의 물약과 알약을 처방했고, 그 약은 내일의 나를 다시 살아가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