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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길의 애정 Aug 07. 2022

내게 안부를 묻는 사람

강원 강릉 | 선교장 & 경포생태저류지 & 경포가시연습지 & 경포호

 군산을 다녀온 후 아무 계획 없이 강릉행 KTX-이음을 결제했다. 안 가본 곳을 가보고 싶어 선교장만 결정하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당일치기 여행이니 차차 계획하자 했지만 출발 당일까지 전혀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강릉을 뚜벅이로 가본 적이 없어 계획을 세웠어야 했지만 기차를 예매한 다음날부터 출발 전 금요일까지 매일 야근을 했고, 심지어 새벽까지 야근을 한 날이 있을 정도였다. 주말은 밀린 잠을 자야 했고, 연인과의 데이트도 해야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출발 하루 전의 저녁이었다. 


 여행 당일 집에서 눈 뜨는 시간부터 집에 돌아오는 시간까지 모두 계획을 해야만 마음이 편한 성향이다. 아직까지 유행하는 MBTI의 전형적인 J형(INTJ)인데, 무계획 여행은 30년이 넘는 인생살이 중 처음이었다. 설레고 기대되고 걱정되고 불안한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기차표를 취소할까도 생각해봤지만 쉼이 필요했다. 이 여행은 절대 쉼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바다를 보고 오면 회색으로 가득한 머릿속이 잠시나마 푸르러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떠났다. 


 새벽 4시. 울리는 알람 소리에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6시 기차를 타기 위해 서울역으로 향한다. 집을 나서는 순간 적막한 거리와 대기를 꽉 채운 습도를 맞이한다. 눈앞에서 버스를 놓쳤지만 아쉬워하지 않기로 한다. 어차피 출발 시간 20분 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서울역에 도착해 생수를 한 병 샀다.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가 있어 주문한 3단 우산은 이날 새벽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했지만 결국 도착하지 않아 사갈까 했지만 판매를 하지도 않았거니와 가방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어 판매 여부를 묻지 않았다.

 비어 있는 선로로 KTX-이음이 들어선다. 처음 타보는 이음의 매끄러운 외형은 돌고래처럼 보였다. KTX처럼 특실 1인석은 없어 아쉽지만 좌석마다 개별 창문인 점이 마음에 쏙 든다. 좌석에 앉아 창문을 바라보다 용산을 지나는 순간부터 잠이 들었다. 기차에서는 잠을 잘 자지 않는 편인데 이날만큼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졸음이 쏟아졌다. 잠시 눈을 뜨니 양평을 지나고 있었고, 바로 다시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뜨니 온 몸에 땀이 났다. 더워서 잠이 깼나 보다 생각하고 다시 잠을 잤다. 눈을 떠보니 원주를 지나고 있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어지러웠고, 몸에 기운이 없었고, 속은 메스꺼웠고, 온몸은 식은땀이 나고 있었다. 그러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급하게 다음 정거장인 평창역에서 내렸다. 택시를 타러 나가는 길이 어찌나 멀게 느껴지는지, 시공간이 멈춘 공간 속에서 혼자 걷는 느낌이 들었다. 택시를 타고 가장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가고 싶다고 하니 기사님은 평창은 응급실이 없고 강릉이나 원주로 가야 응급실이 있다고 하며 보건소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중간중간 룸미러로 나를 보시더니 속도를 높였다. 


 창에 머리를 기대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저혈압일까, 코로나일까,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는 걸까. 8시 6분. 평창 보건소에 도착했다. 그 와중에 '기차를 쭉 타고 갔으면 이미 강릉에 도착했을 시간이었겠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10여 분쯤 달렸을 때부터 상태는 괜찮아져서 안개 낀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평창도 좋은 곳이지만 뚜벅이 여행은 힘들 수 있겠다 생각하면서 일단 여행 리스트에 포함하는 철없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보건소에 내려 열을 재고 잠시 기다리다 진료를 받았다. 미주신경성 실신인 것 같다며 딱히 치료를 해줄 것이 없다며 난색을 표하는 의사를 보니 다행이다 생각이 들었다. 별다른 조치가 없던 것을 보면 혈압도 괜찮았던 것 같다. 일전에도 이런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예민한 성격 때문이겠지라고만 생각했었다. 내 안부를 묻는 사람은 나여야 했다. 그간 나는 내게 안부를 묻지 않았다. 그냥 '이 또한 지나가리라'로 치부하고 애써 외면해왔다. 정확히 말하면 괜찮냐 묻는 게 두려웠다. 아니라고 대답할게 눈에 선했으니까.


 결과적으로는 큰 문제는 아니라니 여행을 이어가기로 했다. 택시를 잡아 다시 평창역으로 돌아간다. 보건소와 평창역은 30분이 조금 넘는 거리였다. "9시 기차를 탈 수 있을까요?" 조심히 묻는 질문에 노력해보겠다며 긴장하지 말라고 사탕을 건네주시는 기사님 덕에 바깥 풍경을 보며 여행을 즐긴다. 8시 56분. 평창역에 도착했다. 왕복 택시비가 80,000원 가까이 나왔지만 평창역에 내리길 잘했다고 생각하니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잰걸음과 가벼운 뜀박질을 하니 마침 선로로 진입하는 KTX-이음을 탈 수 있었다. 

 강릉역에서 출발해 정동진으로 향하는 오후 기차를 결제하다 보니 강릉역에 도착했다. 2시간 거리를 3시간 만에 도착했다. 서울처럼 최근 며칠간 매일이 열대야와 폭염이 이어지는 강릉은 한증막 그 자체였다. 택시는 먼저 도착한 승객들이 이미 다 타고 나갔고, 시내버스는 한 시간 뒤에나 온다고 했다. 강릉역에서 선교장까지 차로 9분 거리니 자전거를 타면 30분도 안 걸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강릉역 앞에서 대여할 수 있는 '강릉 패스' 전기 자전거를 대여했다. 자전거 앞 바구니에 가방을 담고 헬맷을 쓰고 페달을 살살 밟으니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아도 자전거가 힘 있게 나가니 신이 난다.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달리니 입 밖으로 '신난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수십 번을 내뱉다 보니 강릉 생태저류지에 도착했다. 메타세콰이아길이라 불리는 작은 나뭇길을 달리니 여행의 달콤함이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얼굴로, 조향기에 닿은 손 끝으로, 페달을 돌리는 발 끝에 닿아 엔도르핀이 샘솟는다. 자전거를 세우고 카메라를 들고 주변을 탐색한다. 비릿한 물 비린내, 나무의 쌉싸름한 내음, 발아래로 밟히는 풀, 군락을 이룬 연꽃들을 보고 맡고 느껴본다. 


 한껏 날 서 있던 기분이 누그러진다. 여행에서 오는 보람은 이런 곳에서 느껴진다. 얼마 전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라는 책을 보다 여행 전날 밤 1522-2290으로 전화를 걸어봤다. 신호가 가고 녹음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한숨과 먹먹함 끝에 하고 싶지만 타인에게 쉬이 말하지 못하는 마음을 털어놨다. 진한 원색의 물감이 물에 풀어져 옅어지듯 마음속 '그것'도 약간이나마 풀어졌는데 여행길에서 만난 이 나무길 사이에 서 있으니 미처 풀리지 못한 '그것'이 풀리며 그 색이 더 옅어져 간다. 

 자전거의 페달을 밟아 선교장으로 이동해본다. 선교장은 사대부가의 주택으로 입구부터 건물 곳곳에서 여유로움과 품격이 느껴졌다. 99칸에 달하는 규모는 부유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여행을 떠나면 절이나 향교, 전통 가옥을 많이 찾는데, 한옥이 내뿜는 고고함과 섬세함, 선의 유려함은 양옥과는 다른 매력에 매료되어서다. 특히 한 채, 한 채 걸린 현판에서는 가주의 성향과 취향도 은근히 엿볼 수 있어 재미를 더한다. 


 입구를 들어서면 바로 만날 수 있는 활래정은 수상 정원처럼 보였는데, 연못 가득 자라난 연잎과 피어난 연꽃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특히 활래정의 열린 문 너머 보이는 풍성한 연잎은 물 위에 떠 있는 기분이 들게 했다. 양옥은 외부에서 건물을 바라볼 때 아름답도록 미적 설계가 되어 있고, 한옥은 집 안에서 바라보는 문 너머의 풍경을 중점으로 설계가 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 활래정을 보면 그 의미가 정확하게 와닿는다. 이번 여행에서 무엇이 가장 좋았는지를 꼽는다면 이 활래정을 처음 만난 순간이다. 매년 여름마다 찾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경복궁보다 비싼 입장료(5,000원)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관람 시간 동안 사람을 거의 보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는데, 고요한 환경은 주변을 더 집중할 수 있게 했다. 

 아직 기차 시간과 식사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자전거를 타고 경포호로 향했다. 경포호를 가는 길에 만난 경포가시연습지를 자전거를 끌며 천천히 걸으니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더위를 피하는 '피서'가 아닌 정면으로 '맞서'고 있었지만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았다. 강릉은 셀 수 없이 많이 와 봤지만 이날 오전 여행은 처음 가보는 곳들이어서인지, 아니면 지친 일상 속에 만난 단비 같은 순간이어서인지 유난히 설레었고 좋았다. 오전에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조차 잊을 수 있었다. 되려 오전보다 컨디션이 훨씬 좋았다. 

 이날 오전 내 발이 되어 주었던 자전거를 반납하고 강릉역으로 향했다. 강릉을 자전거로 여행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날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서울의 따릉이보다는 대여소가 적은 점은 다소 불편하지만 한 번쯤 자전거 여행을 계획했지만 내 자전거가 없거나, 미니벨로가 아니어서 자전거 거치가 걱정된다면 강릉패스로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오후는 바다를 보러 떠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레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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