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군산 | 동국사 & 히로쓰 가옥
여행의 둘째 날. 구름에 빛이 가려졌지만 더위의 기세는 맹렬했다. 여름 뚜벅이 여행이 힘든 건 날씨 탓이 크다. 배낭을 멘 어깨와 등이 땀으로 흠뻑 젖어 불쾌감까지 높아지면 여행의 즐거움이 반으로 줄어들고는 한다. 이날도 역시 꽤나 고생을 했다. 고생을 하면 기억에 많이 남는데 아마 군산도 그렇게 기억될 듯싶다. 높은 습도, 때때로 살갗을 따갑게 하는 태양빛, 거기에 그늘 없이 걸어야 하는 길. 적잖이 고생을 했다. 동행인은 몰아치는 더위에 보이는 벤치마다 앉아서 쉬었고, 쉴 새 없이 땀을 닦았고,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고, 말수가 줄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유명 중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동국사까지 도보 20분 정도 걸린다는 지도 앱을 믿고 걸어본다. 암막 기능이 없는 우산을 펴 그늘을 만드니 우산 아래를 통과하는 미지근한 바람이 반소매 옷 위로 드러난 팔을 스치고 지나간다. 한여름에도 주로 긴팔을 입지만 이날만은 반소매 옷을 입고 싶어 잠옷으로 입을 예정이었던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나왔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잘한 일이었다. 동행인은 더위를 잘 타지 않지만 유독 이날은 더위를 많이 느낄 정도였다. 젊어서 할 수 있는 고생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는 고생을 넘어서 고통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흐르는 땀을 닦고, 작은 기념관에서 잠시 땀을 식히기도 하며 걷다 보니 동국사에 도착한다. 동행인이 이번 여행을 계획할 때 한결같이 가고 싶다 외친 곳이다. 우리 둘은 불자는 아니지만 여행을 가면 지역의 사찰은 되도록 보고 오는 편인데, 국내 유일 일본식 사찰이어서인지 건물의 구조와 외벽, 종에서 익숙한 듯 낯선 모습이 보인다. 사찰의 뒤편에 자리한 백 년 동안 자리를 지켜온 작은 대숲은 더욱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공간은 오롯이 나의 공간이었다. 주말임에도 찾는 이가 없어 고요하기 그지없다. 건물 외벽에 그려진 탱화의 화려한 색채감,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이 흔들리며 내는 청아한 소리도 없다. 바람도 이곳을 지나지 않아 바람결에 춤추는 대숲의 소리조차 없다. 비로소 지친 머리가 쉰다. 정체된 듯한 시간, 멈춰있는 풍경, 멀리 자리한 드높이 솟은 대숲을 바라보는 공허한 눈. 목덜미를 타고 등의 곡선을 흘러내리는 땀방울의 속도가 유난히 빠르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어떤 자극도 없으니 몸이 나른해진다.
동행인은 더위에 무릎을 꿇어 벤치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동안 어느새 나는 더위를 즐기고 있었다. 만약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피어났던 어제의 하늘과 같았다면 자갈밭에 앉아 고개를 잔뜩 뒤로 젖혀 오랫동안 하늘을 쳐다보고, 눈을 감아 그 풍경을 기억하는데 많은 시간을 썼을 것이다. 못내 아쉬웠다. 얄궂은 날씨다.
대숲으로 쉼터를 옮겨 본다. 바스락바스락, 떨어진 댓잎을 밟는 소리가 잠시 잠들어있던 청각을 깨워준다. 올해만큼 대나무를 많이 본 해는 없었다. 아마 대나무가 생육하기 좋은 환경을 갖춘 아랫지방을 위주로 여행을 다녀서일 것이다. 여행지마다 반겨주는 대나무의 푸릇함은 언제 봐도 청량하다. 유난히 진한 색감을 가진 한 그루의 나무가 눈에 띈다. 낙서 없이, 상처 하나 없이 자란 그것이 나로 인해 상처 입지 않도록 멀리서 바라만 본다. 손끝으로 나뭇결이라도 만져봤다면 여행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음 목적지로 이동할 시간이 된 듯하여 천천히 걸음을 돌려 히로쓰 가옥(신흥동 일본식 가옥, 이하 히로쓰 가옥)으로 걸어본다. 걸으며 맞닥뜨린 더위에 또다시 굴복했다. 배낭의 무게는 더욱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마침 보이는 근대 건축물 양식으로 세워진 가게들이 모여 있는 곳 중 한 곳에서 마른 목을 적시고, 현대 문명이 이룬 쾌거 중 하나인 에어컨 아래에서 땀을 식혀 겨우 목적지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매실차와 수박주스가 없었다면 이 여행은 더 이른 시간에 끝났을지도 모른다.
원래 일정이라면 이곳을 오지 않았겠지만 점심 메뉴로 정한 소고기 뭇국 식당에서 멀지 않아 들러 보기로 했다. 아기자기한 정원과 일본식으로 지어진 가옥은 수년만에 다시 찾아도 아름답다. 다다미가 깔린 바닥은 굳게 닫힌 문 너머로만 바라본다. 전에는 실내도 개방했었는데 오랜만에 오니 개방을 하지 않는다. 아쉽지만 외관만 둘러본다.
이런 구옥은 사람이 같은 풍경에 존재할 때 더 가치가 있다. 서로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담아주는 가족과 연인들의 모습은 유난히 다정해 보인다. 혼자 왔다면 외로웠을게 분명하다. 우리도 그 다정한 모습이 되어 본다. 땀에 젖어 지저분하고 자외선 차단제만 발라 밋밋한 얼굴이지만 그래도 사진 속에 이날의 기분과 감정, 추억을 남겨 본다. 세월이 지나면 기억은 흐릿해지겠지만 잊지는 못할 것 같다.
깔끔한 소고기 뭇국과 감칠맛이 살아있는 반찬과 쌀밥을 먹고 기운을 내 아쉬움에 주변 마을을 거닐어 본다. 무성한 잡초 사이로 노란 얼굴을 빼꼼 내미는 어린 길고양이가 보인다. 눈이 마주치고는 풀숲으로 숨어버린다. 누군가가 꼬박꼬박 식사를 챙겨주는 듯 공터에 덩그러니 놓인 고양이용 식사 그릇 앞에 앉아 있는 고양이도 보인다. 그 옆은 사람 손길이 익숙한 치즈 냥이도 작은 그늘 아래 쉬고 있다. 동물을 좋아하는 동행인의 눈빛은 온기가 가득하다, 귓불까지 닿을 듯 한껏 올라간 입매는 사랑스럽다.
낮은 건물,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아 적절히 들리는 대화 소리, 공터를 집 삼아 몸을 쉬는 고양이들, 피어있는 주황색 능소화. 눈과 머리가 느리게 움직인다. 여행을 하면 어김없이 드는 약간의 긴장감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 넓은 공간은 언제부터인가 나와 그, 둘만으로 가득 찼다.
여행의 마지막. 채소 빵이 유명한 가게를 들러본다. 반질반질 윤기 나는 단팥빵과 채소 빵을 구매하기 위해 늘어선 줄. 내가 기억하는 군산의 모습이다. 쉴 틈 없이 수레 가득히 오븐에서 갓 나온 빵이 빈 쟁반을 다시금 채워진다. 차가운 커피와 함께 입 안으로 들어온 특유의 채소 빵 맛은 다른 곳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맛이다. 뜨거운 오븐 안에서 오래 구워졌지만 아삭함이 살아있는 양배추의 식감, 부드러운 빵, 자극적이지 않은 입 안에 도는 감칠맛은 처음 맛보았던 옛 기억까지 끌어온다. 코 끝을 타고 들어오는 고소 하면서 부드러운 버터의 향, 익힌 계란의 향. 언제나 여행의 마지막은 빵집의 향으로 마무리한다.
익산으로 가는 무궁화호. 창밖을 바라보니 전날 관람한 뮤지컬 '팬레터'의 넘버 중 하나인 '럭키 세븐'이 불현듯 떠오른다.
"아무리 점령당한 땅이라 해도, 예술마저 점령당할 수는 없잖아. 캄캄한 밤 헤매일 때, 영혼을 구하는 한 줄 시가 시대의 가치가 아니라 누가 말할 수 있나? 그리하여 물결은 퍼지는 법. 나비 한 마리에도 봄은 오듯이. (중략) 그리하여 이 삭막한 도시에도 조금은 낭만과 예술이 남기를."
군산은 'Muse'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