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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길의 애정 Mar 22. 2024

누군가 내게 '쉴 곳'을 묻는다면

전남 순천, 광양 |  순천만습지 & 국가정원박람회 & 전남도립미술관

 몹시도 안개가 자욱한 산간을 지나고 있었다. 입자가 다 보일 듯 공기를 떠다니는 것이 보일 정도로 짙은 안개 사이로 해가 비치고 있었다. 운행 시간이 지연된 열차는 속도를 더욱 높이고 있었고, 반쯤 걷은 블라인드 너머의 세상은 어느새 나를 등지고 있었다. 작은 연꽃 군락지와 석재 조각, 초록으로 가득 찬 들판이 아주 찰나의 순간 눈에 담겼다.


 오랜만에 홀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카메라와 아주 간단한 짐만 챙겨 떠난 종착지만 정해진 여행. 낯선 풍경과 덜컹이는 열차, 그간 잘 사용하지 않았던 유선 이어폰은 괜히 기분을 들뜨게 했다.


 익산역을 지나니 거짓말처럼 날이 개었다. 타들어 갈 것 같은 태양 아래로 무심히 달리는 열차. 서울을 벗어나면 보이는 높은 것에 막히지 않아 눈앞을 가리지 않는 넓은 평야와 그것을 가로지르는 야트막한 강가는 여행의 설렘 지수를 높이곤 한다.


 그리고 도착한 순천역.

 2023년에 가장 자주 여행한 곳이 순천이었다. 뚜벅이로 혼자서도 여러 번 방문했고, 짝꿍과도 두어 번 갈 정도였다. 봄, 여름, 가을 할 것 없이 휴식이 필요할 때면 순천으로 가는 KTX 열차를 예매하고는 했다. 어떤 날은 새벽 일찍 출발해 저녁 늦게 서울에 도착하는 당일치기 여행으로, 어떤 날은 이틀을 꼬박 순천에서 걷고, 먹고, 쉬기도 했다. 대단히 볼거리가 많은 도시도, 뚜벅이가 여행하기에 친절한 도시도 아니지만 오로지 이곳이 너무 좋았다. 불현듯 버티듯 살아가는 일상에 지쳤을 때, 이유 없이 무료해질 때, 바람소리를 듣고 싶을 때면 순천의 이곳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순천만습지'가 바로 그곳이다. 

 '순천만습지'는 갯벌에 정착한 갈대가 군락을 이루는 모습이 장관이다. 람사르습도시로 지정된 순천은 그 어느 도시보다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생'에 진심이라고 느껴졌다. 국내 최대 철새 도래지로도 잘 알려진 순천만습지는 발길이 닿는 곳마다 인상적이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공생' 포인트 중의 하나는 탐방로였다. 철새의 눈높이에 최대한 맞춰 제작된 탐방로의 나무데크는 멀리서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띄게 인위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무언가가 없었다. 그저 높게 자란 갈대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잿빛 갯벌 위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짱뚱어 떼와 게들이 보인다.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면 어느새 밀물이 들어와 바닷물이 들어차 있고, 그 위로 윤슬이 반짝인다. 더 높이 고개를 들면 맑은 하늘과 바람을 따라 흘러가는 구름들이 보인다. 간혹 불어오는 바람은 높은 갈대 사이를 훑고 지나가며 마른 댓잎 같은 건조하고 청량한 소리를 낸다. 


 그곳에 있으면 머리를 가득 채웠던 밀도 높은 걱정과 고민이 납작해지고는 했다. 그러면서 생긴 머릿속의 빈 공간은 애써 다른 것으로 채워 넣지 않았다. 대신 원초적인 감각을 느끼는 것에만 집중했다. 모자를 쓰고 싶다, 덥다, 목이 마르다, 하늘이 파랗다 같은 아주 쉽고 단순한 감각들. 


 얕잡아 봤다 혼쭐이 났던 등산 후 도착했던 용산 전망대에서 석양을 바라보는 순간도, 첫 방문 당시에는  신분증을 들고 오지 않아서, 두 번째 방문 때는 물 시간이 맞지 않아 삼고초려 끝에 겨우 탑승할 수 있었던 생태체험선을 타고 순천만의 S자 수로를 따라 선상에서 갈대 군락을 바라보는 순간도, 현재의 기분과 현재의 감정에 충실히 몰두해 불안과 걱정이라는 잠시 나를 떠난 부정적인 요소들을 내게로 다시 불러들이지 않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다. 


 가장 싫어하는 계절의 무더위에도, 쓰릴 정도로 따가운 볕을 피할 곳이 없어 열사병을 얻음에도 순천만습지를 계속 찾게 되는 이유였다. 

 여행에는 여러 목적이 있다. 누군가는 '보는 것'에 목적을 두기도 하고, 누군가는 '먹는 것'에 목적을 두기도 한다. 나 또한 여행지마다 각각의 테마를 가지고 여행을 하고는 한다. 순천은 늘 비교적 정확했다. '쉼'. '휴..' 하는 한숨이 절로 날 때, 무작정 찾아가도 휴(休)를 얻을 수 있는 곳. 순천에 대한 나의 정의는 이렇다. 

 순천만습지에서 걸어서 20여 분, 버스를 타도 20여 분 정도 걸리는 순천만 국가정원박람회장은 많은 관람객들 속에서 나 역시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열정과 웃음소리, 뛰어노는 아이들, 꽃 속에 파묻혀 가장 예쁜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서는 사람들, 붉게 물든 양귀비가 다리를 간지럽히는 끝없이 펼쳐진 흙 날리는 산책로를 걷는 사람들, 그 옆으로 흘러가는 작은 개울물의 소리들, 푸른 하늘에 붓질하듯 바람에 나부끼는 키 큰 팜파스들, 곳곳에 있는 넓은 정자에 메고 갔던 배낭을 베고 하늘을 바라보며 부신 눈을 감아도 느껴지는 주황빛의 볕도, 표현이 부족해 끝내 말하지 못하는 수많은 순간들이 그렇다. 


 순천을 여행했던 모든 날은 해가 저물어 가는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 아쉬웠고, 하루종일 걷고 또 걸어 아파오는 발과 다리가 아쉬웠고, 끝없이 심미를 탐하는 욕심 많은 마음이 귀여우면서도 싫었다. 위장이 비어 느껴지는 배고픔보다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더 눈에 담지 못해 느껴지는 '고픔'이 더 크게 느껴졌다. 

 순천에서 1박 2일 이상의 여행을 하며 약간의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전남 광양에 위치한 전남시립미술관을 다녀오는 것도 꽤 괜찮다. 순천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부전역에 광양역에 내려 20여분 정도를 걸으면 전남도립미술관이 위치해 있다. 붐비지 않고, 조용히 사색하며 관람하기 좋은 곳이다. 2023년 여행 당시에는 '이건희 컬렉션 - 한국 근현대미술 특별전'과 '영원, 낭만, 꽃'이라는 기획전을 하고 있었다. 미술관은 주기적으로 전시가 바뀌어서 매번 새로운 곳을 가는 것 같은 신선함이 있고, 소란하지 않은 차분함과 고요함, 정적인 휴식이 가능한 곳이어서 여행 중에 들러보는 것도 추천한다. 


 2023년은 순천이 있어 넘어지면 쉬어 가고, 기별 없이 찾아온 혼란에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누군가 내게 '쉴 곳'을 묻는다면 침대 위가 아닌, 각진 네모의 내 집이 아닌, 순천이라고 말하고 싶다. 계절마다 다른 맛과 멋, 순박함까지.. 순천을 사랑할 키워드가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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