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양산 | 통도사
적막을 뚫고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 소리가 들린다. 앞으로 나아가는 택시는 종착지인 서울역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비교적 가볍게 짐을 싼 배낭과 몸을 가로질러 매달려 있는 어깨에 맨 카메라는 서울역으로 향하는 이유가 여행임을 짐작하게 해주고 있었다. AM 05:27,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 잠자리에 들어 있을 시간, 울산(통도사) 역으로 향하는 기차에 탑승했다. 새벽 기차는 장단점이 뚜렷하다. 이용객이 적어 붐비지 않고, 이른 시간이기에 코를 고는 소리만 들릴 정도로 대체로 조용하다. 잠을 자지 않고 간다면 방향에 따라 일출을 볼 수도 있어 여행의 감성을 높이기 좋다. 단점은 단 두 가지다. AM 03:30 즈음 일어나 준비를 하고, 서울역 행 버스를 놓치면 새벽은 배차 시간이 길어 택시를 타고 서울역까지 가야 한다는 것. 하여 새벽 시간대 기차를 애용한다.
이날은 장단점을 모두 겪은 날이었다. AM 03:30에 맞춰 놓은 알람은 떠나는 날이 토요일이었지만 평일로 잘못 알람을 맞춰 AM 04:00에 눈을 떠 부리나케 준비를 했고, 길 건너편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가 지나가 택시를 탔다. 3호차 특실 1인석에 앉아 아직 어둑한 하늘을 바라보다 ‘인류 본사’라는 이슬람 문화권에 대한 책을 읽으며 가다 보니 어느덧 동이 터 10월의 첫 일출을 봤다. 그렇게 두 시간 반 정도를 달리니 울산에 도착했다. 울산(통도사) 역은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마 영남 알프스의 억새가 가장 예쁜 시기여서인 듯했다.
영남 알프스는 다음으로 기약하며 기차역 바로 앞 버스 정류장에서 13번 버스를 타고 통도사로 향했다. 통도사까지는 13번 버스를 타고 신평터미널에서 하차(소요 시간 30~40분)하면 신평터미널에서 우측으로 꺾어 그대로 직진해 걸어가면 10분 정도면 닿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였다. 통도사까지 가는 길은 조용한 소도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차창 양 옆으로는 논이 보이기도, 마트가 보이기도, 아파트와 저상 주택이 번갈아 보이는 그런 길이었다.
통도사로 가는 길은 ‘무풍한송길‘라는 이름이 붙는 길이었다. 무풍교 우측으로 난 소나무 길로, 통도사 계곡을 끼고 1km 정도 되는 길이의 소나무 숲이 우거져있다. 무풍한송길은 2018년 열린 ‘제18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인 ‘생명상’을 받는 등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길로 불리기도 한다. 처음 발길을 딛고, 눈길을 두는 순간부터 사랑에 빠진 느낌이었다. 높고 울창한 소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빛과, 언뜻언뜻 보이는 파란 하늘과 흰 구름. 그리고 적절히 불어오는 바람은 ‘춤추는 바람에 물결치는 찬(寒) 소나무‘라는 이 길의 이름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모양새였다. 수령이 100~200여 년 정도 되는 소나무들은 곧게 뻗은 모습이 아닌 구불해 운치를 더하고, 서로의 품을 찾듯 겹쳐 있기도 했으며, 멋진 소나무를 두고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시샘이라도 하듯 하늘을 가릴 기세로 푸른 솔잎을 뽐내며 자라 있었다. 1km가량 걷는 동안 세상과 나를 분리할 수 있었다. 말소리조차 묻힐 듯 고요한 산세 속에서 흐르는 계곡물의 힘찬 소리는 생동감이 있었고, 발 끝으로 전해지는 흙길은 몸에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아직은 약간은 더운 날씨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걷다 보니 통도사의 입구까지 도착했다. 통도사를 오게 된 이유는 최근 본 ‘아름다운 사찰 여행’이라는 도서를 포함해, 보는 도서들마다 우연히 통도사에 관련한 이야기들이 있어서 호기심을 자극했다. 특히나 이곳은 삼보종찰(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중 불보사찰이어서 대웅전에 불상을 모시지 않고, 불단만 마련했으며 금강계단에 진신사리를 봉안해 두었다(사리는 관람 시간대가 정해져 있어, 시간에 맞춰오면 직접 볼 수 있다). 이중 해인사는 다녀왔고, 내년까지 송광사를 꼭 다녀올 생각으로 통도사가 있는 양산과 인근 울산을 이번 여행지로 정하게 되었다. 나는 사찰 여행을 좋아한다. 경내에 울리는 목탁 소리와 불경을 외는 소리, 풍경 소리, 그리고 향을 피우며 안녕과 평안을 비는 모든 순간을 좋아한다. 가보고 싶은 사찰이 있다면 그곳을 여행지로 결정하는 순간들도 간혹 있다. 마치 이번 여행처럼 말이다.
이곳은 눈을 돌리는 모든 곳마다 박물관이 따로 없는 곳이다. 수수한 외관의 법당을 포함한 탱화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쉽게 시기가 맞지 않아 야외에 괘불을 거는 모습을 실제로 보지는 못했지만 괘불대를 볼 수 있어, 국립중앙박물관 불교회화관에서만 볼 수 있던 괘불을 이렇게 거는 구나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칠을 덧대지 않아 더 멋이 살아 있는 법당들은 마치 과거로 회귀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소견이 짧아 많은 설명과 감동을 글에서 표현할 수가 없어 너무도 아쉽다. 이 감동과 멋스러움은 직접 가서 경험을 꼭 해보기를 바란다.
세 시간 가까이 이곳에 머무른지도 모를 만큼 시간은 훌쩍 지나가 있었다. 공양 시간이 다가와 줄을 서 식사를 받았다. 자극적이지 않지만 정갈하고 단정한 나물들과 배춧국, 그리고 견과류 한 줌과 자몽으로 한 끼의 식사를 간단히 마쳤다. 계곡 앞에 앉아 흐르는 물을 보며 하염없이 시간을 더 보냈다. 근래 이렇게 평온한 마음 상태가 있었을까 싶었다. 그간 마음에 쌓인 근심과 반복되는 일상에서 오는 무력감이 씻겨 갔다. 최근 여러 사건이 있어 마음이 많이 지쳐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내가 나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경내를 빠져나와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울산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 안에서 촬영한 사진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꽤나 나를 다시 찾은 것 같다’고.
하늘을 높이 자란 소나무의 솔잎으로 가득 채울 수 없듯, 어스름한 마음이 나를 가득 채울 수는 없다. 여행이란 다시금 나를 나로 찾아가는 길을 알려주는 길잡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