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 Feb 21. 2022

영혼의 종족 4- 마녀의 기억

 '각각의 우주는  물리적 법칙이 존재하고, 시간의 흐름은 엔트로피 증가로 일어난 착각에 불과하다.'- 별을 바라보는 마테


 12.

 오전 7시,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다. 누운 채로 기지개를 켰다. 하복부에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방광이 느껴졌다. 지난밤 침대 아래 벗어놓은 옷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카린과 함께 속 옷까지 몽땅 사라졌다. 주방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와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옷을 훔쳐 간 범인을 짐작게 했다. 손 갈 일 없는 남자였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나저나 알몸으로 나갈 순 없는 노릇이다. 급한 김에 행거에 걸린 그의 티셔츠를 걸쳐 입고 방을 나왔다. 짭짤한 고등어찜 냄새에 절로 침이 고였다.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하는 그의 뒤 머리가 어제보다 길게 느껴졌으나 바로 욕실로 직행했다. 변기에 앉자마자 쏟아져 나왔다. 볼일을 끝내자 마침내 안도감이 들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몸 상태가 평상시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챘다. 몸안에서 아드레날린이 용솟음치는 기분이었다. 배출된 오줌에서 심한 악취가 났다. 딱딱한 변기 커버를 누르고 있는 엉덩이는 물먹은 스펀지처럼 납작해지지 않고 탱탱했다. 벌린 가랑이 사이로 오줌 색깔을 확인했으나 어두워 보이지 않았다. 일어나 살펴봤다. 샛노란 액체는 하수 종말 처리장처럼 거품이 잔뜩 끼었다. 얼굴과 피부는 마스크 팩이 굳어 갈라진 듯 이질감이 들었고, 손톱은 자랐고, 손등은 촘촘한 거미줄 모양의 선이 잔뜩 그어져 있었다. 들고일어난 얇은 표피는 물만 닿아도 금방 벗겨져 나갈 것 같았다. 근질거리는 얼굴을 더듬거렸다. 너덜너덜한 얇은 피부 껍질이 힘없이 이탈됐다.

 그녀는 밤새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흥분으로 들썩였다. 그렇다고 해서 원인에 대해서는 놀라지 않았다. 혜림 살던 기괴한 세상에서 기적이라 불리는 것들도 브리지트의 기묘한 세상에선 대수롭지 않은 현상이기 때문이다. 어제 로운이 미처 조절하지 못하고 뿜어낸 초록의 생명력에 대한 반응이었다. 어쩌면 영악한 로운이 일부러 그랬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강한 생명력은 모세혈관을 통해 전신 세포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세포분열을 촉발해 빈약한 살과 근육의 빈틈을 채워갔다.

 그녀는 당장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일단 샤워를 한 다음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다. 티셔츠를 벗고 샤워기 아래로 가 물을 틀었다. 들고일어난 각질이 샤워기 물살에 미끄러져 쓸려나갔다.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낡은 표피와 머리카락이 옅은 자기질 회색 타일 바닥으로 흘러갔다. 이물질이 배수구 캡을 막아 물이 고였다. 여러 번에 걸쳐 걷어내고서야 샤워를 마쳤다.

 긴장감에 휩싸인 그녀는 바닥을 보고 걸어가 세면대 위 거울 앞에 섰다.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고개를 쳐들자 수증기가 잔뜩 낀 테두리 없는 사각 거울만 보였다. 희뿌연 표면을 손바닥으로 슬쩍 문지르자 이십 대 후반의 여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숨을 헉하고 들이마셨다. 얼른 욕실 타월 장에서 수건을 꺼내 거울을 싹싹 닦았다.

  "헐 세상에..."

 거울 속 젊은 여자는 말도 안 되게 건강해 보였다. 활기찬 기운이 넘쳐났다. 자신이 이십 대 후반에도 이러진 않았다. 허접한 육체로는 브리지트의 발칙한 영혼을 감당할 수 없다는 듯 까마득히 오래전 기억할 수 없는 그 시간대로 되돌렸다. 물에 젖은 풍성한 머리카락은 언 듯 붉은 기가 감돌며 윤기가 흘렀고 더 길어져 가슴께에 닿았다. 나이 들수록 조금씩 선명해지던 눈가와 이마의 주름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뒤로 물러나 몸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엉덩이는 힙라인 팬티를 착용한 듯 바싹 올라붙었고 허리를 비틀면서 힘이 들어간 오른쪽 허벅지엔 부드러운 근육 선까지 보였다. 피부색은 해변에 온종일 누워 광합성이라도 한 듯 까무잡잡한 게 카린의 피부색과 닮았다. 뼈대마저 굵어진 것 같았다. 배꼽 보이는 크롭 탑을 입고 철인삼종경기에 출전해도 될 성싶었다. 전체적 분위기는, 원시 야생의 들판을 멋대로 뛰어다니던 풋풋한 인디언 계집애가 성장해 여인이 된 모습.

 "브리지트?"

 풍겨 나오는 강렬한 이미지는 지난밤 꿈에서 본 브리지트였다.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특히 희다 못해 푸르스름한 흰자위와 투명한 검은 눈동자는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주변의 모든 물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검은 태양이 맑고 잔잔한 호수에 잠겨 일렁거렸다. 지극히 고요한 것이 지극히 악마적이었다. 사람들 스스로 부끄러움을 떠올리게 한다는 브리지트 영혼의 눈동자였다. 붙잡힌 시선을 도저히 뗄 수 없었다. 거울 속 무언의 눈빛은 '너의 부끄러움을 떠올려 봐'라고 묻고 있었다. 수많은 부끄러움이 떠올랐다. 모으면 책 한 권은 족히 쓸 것 같았다. 그중에 유독 걸리는 게 있었다.



 그녀의 부모는 예의 바르고 선량한 사람들이었다. 교회 봉사활동도 열심히 했다. 당연히 신앙심 깊고 좋은 사람들이란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른 형제들과 주변 사람에게 해당 사항이자 연출된 모습이었다. 남들이 볼 수 없는 디테일은 은밀하게 잔인했다. 집에서 부르는 호칭부터 달랐다. 형제들은 엄마 아빠라 친근하게 불렀고, 그녀는 어머니 아버지라 거리감 있는 호칭을 썼다. 그들은 뭐가 됐든 의견 일치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나 그녀만은 예외였다. 두 사람 모두 그녀를 불필요하고 귀찮은 존재로 취급했다. 정자와 난자가 우연히 만나 만들어진 생산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부모와 자식이라기보다 사육자와 피 사육인 관계로 봐야 했다. 그들이 제공해 준 것은 일용할 양식과 의복 그리고 추위를 막아 줄 잠자리였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기절하지 않고 버티는 것밖에 없었다.

 어릴 적 그녀는 그들이 성경 그림책에 나오는 천사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신의 말씀을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전달하지 인간의 말은 듣지 않는 것처럼 꼭 필요한 말 이외엔 건네지 않았다. '자라' '먹어라' '이거 해라' 등의 명령어와  '네가 교회를 나가지 않아서' '네가 설거지하지 않아서' '네가 양보하지 않아서' 등 탓하는 원망어만 제외하면 부모와 자식 간 이렇다 할 교감은 일절 없었다. 그마저도 말할 때 어린 딸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성급히 피했다. 항상 고개를 살짝 내리 틀어 아이의 어깨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들은 그녀의 모든 행동에 비판적이었고 탐탁지 않게 여겼다. 무척 차갑게 느껴졌다. 천사들이 내려와 으스스한 예언을 남기고 간 후에는 어김없이 가혹한 형벌이 세상을 휩쓸었다. 믿지 않는 자들은 돌로 변하거나 불치병에 걸리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교회를 나가지 않는 그녀는 무서웠다. 자신도 곧 벌을 받아 죽을 거라 여겼다. 잠잘 때도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경계할 정도로 늘 불안감에 시달렸다.

 그녀는 바로 밑 연년생 여동생과 한방을 썼다. 그녀는 1월생이고 동생은 이듬해 12월 생이였다. 개월 수로는 22개월 차이가 나지만 체격은 비슷했다. 그녀의 부모는 겉으로 보이는 공정에 유달리 집착했다. 여동생 예림과 항상 똑같은 스타일의 옷을 사줬다. 색깔만 달랐다. 교회에서 낯선 손님이 집에 오면 '이 아이가 우리 큰 딸'이라며 다정한 목소리로 자랑스럽게 인사를 시켰다. 가까운 이웃과 친척들조차 아이가 학대받는다는 사실을 몰랐을 만큼 교묘했다. 어떨 땐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 놓고 기다린 적도 있었다. 그러면 자신도 다른 형제들처럼 사랑받는다고 종종 착각했다. 훗날 그 이유를 알았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쌓인 죄를 씻어내기 위한 구원 의식이었다는 것을.

 더 슬픈 이야기는, 권력자인 부모로부터 외면받는 자식은 형제들에게조차 무시당한다는 것이다. 짐승인 맹금류 둥지에서 일어나는 '형제 경쟁'이 발생한다. 그녀는 둥지 밖으로 밀어 떨어뜨려야 할 약한 새끼였다. 고만고만한 아이들도 권력자의 방임 아래 날카로운 부리로 쉼 없이 쪼아댔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매일 가는 독서실은 도피처이자 유일한 안식처였다. 칸막이 있는 개인용 작은 공간에 낀 듯 앉아 있으면 누구도 그녀를 무시하지 않았다. 실내엔 조심스러운 숨소리와 볼펜 끄적거리는 소리만 났다. 어느 날 독서실 야간 알바가 갑자기 그만둔 일이 있었다. 독서실 주인이 새 알바를 구할 때까지 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일주일간 봐준 대가로 수고비를 받았다. 그 돈으로 맘에 드는 부츠컷 스타일 청바지를 샀다. 여태껏 어머니가 사준 옷만 입다 처음으로 직접 산 옷이었다. 사람 상대를 많이 해본 옷가게 젊은 여주인은 단번에 그녀의 상태를 간파했다. 옷가게 여주인이 이것저것 입어 보라고 귀찮게 권하지 않았다면 대충 골랐을 정도로 내성적이었다.

 며칠 후 옷가게 탈의실에서 잠깐 입어보고 걸어둔 옷이 사라졌다. 말끝마다 자신을 무시하고 하찮게 취급하던 여동생 예림이 몰래 입고 교회 수련회를 갔다. 교회 청년부 오빠와 막냇동생도 수련회를 가고 소규모 건축 공구상을 하는 아버진 일찍 출근해서 집엔 어머니만 있었다. 속이 부글거렸으나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너무나 무기력하고 나약했다. 설령 동생 예림이 있었다 해도, 따져 묻는 것은 고사하고 뼈 있는 말조차도 던지지 못했을 것이다. 미치도록 화가 치밀면 말이 삼켜지고 눈물부터 나기 때문이다. 오히려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예민하게 굵고 질질 짠다며 반격당하기 십상이다. 편들어 줄 사람 하나 없이 교묘하게 학대받고 자란 아이의 전형적 특징은 다 가졌다. 서러움에 질질 짜도 집에서는 불가능했다. 어머니에게 들키면 또 한 소리 듣는다. 유일한 안식처인 독서실로 가야 했다.

 그녀가 방에서 나오자 어머니가 불러 세웠다. 아침에 둘째 딸 예림이 못 보던 청바지를 입고 나가는 것과 그녀의 표정을 보고 짐작했다.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그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살짝 틀어 말했고 주눅 든 아이도 어머니의 짜증 난 표정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청바지 때문에 그러니? 언니 물건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내가 예림이 돌아오면 얘기할게."

여기까진 그래도 들을만했다. 다음이 항상 문제였다.

 "어차피 넌 교회 나가지 않아 친구도 없고 갈 곳이라곤 독서실밖에 없잖니?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라. 그래야 주님이 사랑하신다."

 어머니는 불리할 때면 그녀의 아픈 약점을 파헤쳐 기선을 제압한 후 형제간 우애를 강조하고 신을 끌어들였다. 바꿔 말하면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하란 소리고, 핵심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둘째 딸이 상처받을까 하는 염려였다. 엄격함과 잔인함이 결합한 거룩한 말에 감히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는 '네'라고 대답했으나 입술만 달싹거렸지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등신이 따로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한심한 눈길로 쳐다봤다. 다행히 그날은 그녀와 어머니만 있었다. 형제들 앞에서 등신 취급받는 것만큼 수치스러운 일도 없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언젠가 너에게도 좋은 가족이 생길 거야'라고 무의식 중에 그냥 떠오른 생각을 주문처럼 외웠다. 하지만 이루어질 거라 믿지는 않았다.



 그녀가 정작 부끄럽게 여긴 것은 어린 시절이 아니다. 쓸모없는 분노와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삶을 낭비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20여 년 전 한국 사회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젊은 여자가 집을 나와 홀로 독립할 수 있는 개방적 문화와 거리가 멀었다. 결혼만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도피처를 독서실에서 사회가 권하는 남자로 옮긴 것밖에 되지 않았다. 비극을 피하려다 더 큰 비극을 맞이한 경우였다. 순종하는 습성은 변함없이 이어졌고 시련은 계속됐다. 부모·형제를 피해 제 발로 시댁으로 들어간 멍청한 선택이었다.

 가부장제와 서열문화가 확실한 집단주의 수직 사회에서 남자는 절대 권력이고 윗사람은 섬김의 대상이다. 잘하면 잘할수록 같은 여자이면서 스톡홀름 증후군은 앓는 시어머니의 요구 사항과 불만은 늘어만 갔다. 매달 생활비를 보태주고, 일일이 경조사를 챙기고,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냉장고를 채워줘도 만족할 줄 몰랐다. 한쪽이 의무라면 다른 한쪽은 권리였다. 친정 부모처럼 열성 교회 신자인 시부모는 며느리가 아닌 보이지 않는 신과 잘난 아들에게 감사했다.

 결과적으로 시댁에 대한 미움까지 보태져 괴롭혔다. 친정 식구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분노가 치솟았다. 그럼에도 관계를 끊지 못했다. 부모 형제와의 단절은 패륜에 해당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시댁을 포함해 주변으로부터 손가락질당하고 혼자가 된다는 극심한 불안감에 떨었다. 더욱이 유교적 예의범절과 충효를 강조하는 학교에 소문이라도 나면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했다. 내 자식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사나운 학부모들의 광기와 근엄한 규범을 몸에 잔뜩 새긴 동료 선생들의 평가가 두려웠다. 그런 주변 환경에서 흠잡을 데 하나 없는 단정한 캐릭터만이 자신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라 그녀는 생각했다. 겉으론 멀쩡해 보였으나 속으론 완벽히 길든 노예였다.

 무엇보다 그녀를 더욱더 힘들게 만든 것은 '용서 화해 사랑'이라는 세상을 지배하는 엄한 율법이었다. 도저히 그럴 수 없기에 하늘에 죄짓고 사는 것 모양 찜찜했다. 정직한 미움은 죄가 아니라 인간이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임에도 세상은 죄악시한다. 지독한 가스 라이팅이었다.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아는 수천 년 인간의 역사에서 가해자의 권력이 유지되는 동안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용서해 달라고 한 자들은 없었다. 늙고 병들어 죽을 때가 가까워져 천국이 욕심나거나 권력이 위태로울 때 마지못해 용서와 화해를 청했다. 권력을 가졌거나 가지려는 자들의 편리한 사고방식이다. 본인들이 저지른 죄악의 크기를 감당할 수 없어 회피하고 합리화시킨다.

 심지어 탐욕스러운 자본가와 합세한 오만한 언론은 수많은 사람을 죽인 독재자까지 용서하고 화해하라고 강요한다. 무제한 번영과 안정을 위해 과거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앞으로 나가자는 소리다. 그래야 본인들의 뻔뻔한 이익이 지속할 수 있다. 신호가 주어지면 낡고 이상한 논리로 무장한 역겨운 애국주의자들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광장에 모여 군사독재 시절을 버젓이 찬양하고 인터넷 기사에 질 낮은 혐오성 댓글을 남긴다.

 용서와 화해가 내포한 순고한 의미는 저 멀리 사라지고 치졸한 수단으로 변모했다. 시대를 불문하고 억압에 길든 약자들은 마지못해 순응한다. 그러면서 범죄는 되풀이되고 가정이든 세상이든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이 됐다.

 그녀는 인간을 넘어서는 신의 율법을 따르지 않기로 했다. 거룩함으로 포장된 사회 공동체 가치관에 반하는 악마적 결론을 냈다. 굳이 억지로 용서하고 화해하려 애쓰고 싶지 않았다. 타인으로 인해 한때 불쾌했던 감정쯤으로 치부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

 고통을 주었던 가해자들이 그녀의 가슴속에서 빠져나갔다. 그녀는 무섭도록 평온해졌다. 나약한 혜림에서 발칙한 브리지트로 돌아온 그녀는 육체뿐 아니라 성격도 변했다. 나비가 답답한 고치를 뚫고 날아오르고 뱀이 옥죄는 허물을 벗는 이치와 같았다. 언제까지 비좁고 단단한 껍질 속에 갇혀 있을 순 없다. 그러다 보면 안으로부터 썩기 시작해 끝내 악취를 풍기며 죽고 만다.

 그녀는 자신의 결론에 만족한 듯 미소 짓자 거울 속의 브리지트로 따라서 발칙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미소라기보다 차라리 마소에 가까웠다.

 "이 정도는 돼야, 숲속의 사냥꾼 카린을 사랑할 자격이 있지. 그도 변했겠지, 얼마나 멋질까?"

 그녀는 카린을 떠올렸다.

 좀 전에 모아놓은 이물질을 욕실 쓰레기통에 넣을 때 이미 들어있었다. 그에게서 나온 것이라 확신했다. 오래도록 자신의 자리를 비워 놓은 채 기다린 남자였다. 그새 보고 싶었다.



 카린은 지금 욕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초록의 생명력이 자신과 그녀의 몸 안에 들어와 엔트로피를 조절한 것이라 여겼다. 기존 관념대로라면 지구 자연계에서는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현상이다. 이 세계에서 시간이란 엔트로피의 증가를 나타내고 사람들은 그것을 세월이라 한다. 하지만 절대법칙은 될 수 없다. 역설적으로 세상은 완벽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능력 또한 자연계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뭐라도 해야 했다. 밥을 안치고 반찬을 만들고 빨래하는 수고는 순박한 남자의 초조함에서 비롯된 단순 행위였다. 그는 평소 답지 않게 허둥댔다. 쌀을 씻다 뭉턱 흘리고, 냄비도 올라가 있지 않은 가스 렌지에 불을 켜고, 하마터면 이불을 베란다 난간에서 털다 밑으로 떨어뜨릴 뻔했다. 신경은 온통 욕실에 있는 그녀에게 가 있었다.

 이윽고 브리지트가 욕실에서 나와 사방을 둘러보며 그를 찾았다. 카린이 베란다에서 턴 이불을 더미를 감싸 들고 주방 옆문으로 나왔다. 두 사람이 마주치자 붉게 달아오른 그녀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는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우두커니 멈춰 브리지트를 바라봤다. 그녀는 정말이지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아침 햇살처럼 싱그럽게 피어났다. 어떤 미사여구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그가 이불 더미를 던지듯 내려놓고 다가와 양팔로 껴안고 몇 바퀴를 돌았다. 허공에 뜬 그녀의 입에서 까르르하는 해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덩굴처럼 얼굴을 가린 그의 머리카락을 제쳤다. 숨어있던 순박한 모습이 나타났다. 천진난만한 소년 미가 풍겨 나왔고 눈빛은 더 맑고 깊어졌다. 그럼에도 서툴고 엉성한 겉 표정은 그대로 편안하고 무한정 다정했다. 깊이를 측정할 수 없는 남자였다. 한동안 두 사람의 시선이 변한 모습을 자세히 보려는 듯 서로에게 맴돌았다.

 "브리지트, 자기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맞아."

 그가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렇게 순수하고 멋진 남자가 내 사랑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

 그녀가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들의 가슴이 숨 가쁘게 오르내리고 소용돌이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카린은 그녀의 허리를, 브리지트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닿았고 다음은 콧잔등 그리고 혀가 엉켰다. 달라붙은 두 사람은 열렬히 사랑하고 사랑받는 감정에 빠져들었다. 멈출 수 없었다.

 그때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그래도 옷은 좀 입지."

 로운이 자신의 방문 앞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말했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 그에게서 떨어졌다. 한참을 지켜본 것 같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그의 헐렁한 티셔츠가 허벅지까지 내려왔으나 한쪽 엉덩이는 그의 거친 손이 차지하고 있는 바람에 불쑥 올라가 있었다. 민망한 나머지 그녀에게 헛웃음이 새어 나왔으나 기분은 여전히 들떠있었다.

 그녀는 달려들 듯 뛰어가 로운을 껴안으며 말했다.

 "고마워 로운아. 나도 이제 너처럼 머리를 땋고 싶어 졌어."

 "어제 귀걸이를 찰 때 갑자기 떠올랐어요. 정말 될까 싶었는데 됐네. 그리고 잘 됐어요. 서로 머리를 이리저리 땋아주면 엄청 재미날 것 같아요."

 "둘이 빈티지풍 원피스도 사 입었으면 해."

 "맞아요. 우리 둘이 그렇게 입고 나가면 언니 동생으로 볼 것 같아요."

 "넌 웜톤으로 볼터치하면 무척 예쁠 거야."

 "난 그동안 카린과 살면서 못해본 것이 너무 많아요. 남자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죠."

 그녀들의 대화는 엔트로피가 감소된 초자연적 현상보다 더 놀랍고 더 복잡하게 흘러갔다. 머리 스타일로 시작한 이야기가 신발까지 내려가더니 다시 위로 올라왔다. 그는 미로처럼 생긴 대형 쇼핑몰을 휘젓고 다니는 두 여자 뒤에서 쇼핑백을 양손에 한가득 들고 있는 남자가 연상되자 불안감에 휩싸였다.



 13.

 며칠간 그들은 로운이 기억해낸 정보로 수수께끼를 푸는데 몰입했다. 하지만 로운은 누구나 그러듯 네다섯 살 때 짧게 끊어진 두루뭉술한 기억만 떠오르는 듯했다. SF 소설과 영화에서 주인공이 한꺼번에 정보를 받아들여 변화를 이루는 것과 달랐다.

 그곳엔 고대 신전처럼 생긴 사방 6개의 기둥이 있는 탁 트인 넓은 홀이 있었다. 왜 '6'이란 기독교에서 말하는 불완전한 숫자를 기억하는지 알 수 없었다. 눈 덮인 높은 산자락 푸른 계곡 아래로 마을이 보였고, 반대편엔 바다가 보였다는 것으로 보아 바닷가 언덕에 있는 것 같았다. 밤에는 두 개의 달이 대지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떴다. 커다란 푸른 달과 그보다 작은 붉은 달이었다. 뉴욕 레오 작업실에 걸려있는 그림과 비슷했다.

 거기엔 아이들이 있었고 소년을 아담이라 했고 소녀를 하와라 불렀다. 여러 명의 아담과 하와가 맨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아 있었다. 어쩌면 신전이라기보다는 학교 비슷한 장소가 아닐까 생각했다. 아이들은 브리지트로 보이는 젊은 여자를 전달하는 사람이란 뜻을 지닌 '움미아'라 불렀고, 움미아 또한 남녀 이렇게 여럿이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말하는 짐승'이 되면 안 된다고 전달했다. 여기서 로운은 특이하게 '가르친다'라고 하지 않고 '전달'이라는 표현을 썼다.

 한 번은 공간을 찢어발기는 천둥소리가 나고 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기둥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저 멀리 허공이 칼로 배인 듯 한 줄기 검은 선이 생겨 벌어지더니 곧 닫혔다. 이쉬쿠르라고 부르는 검은 새가 하늘 높이 떠 한 점으로 보였다. 아이들은 함성을 지르며 뛰어나갔다. 하지만 누구보다 브리지트로 보이는 움미아가 제일 먼저 달려 나갔다.



 로운의 몽환적 기억은 모두가 공유했다. 식탁에 둘러앉아 뉴욕 헬렌에게 전화로 설명하면 스피커 폰으로 듣던 레오와 마날까지 왠지 모르게 뭉클한 감정에 휩싸였다. 잊어버린 고향이라 여겼다. 그리고는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해 구글과 고대 전설, 구약 성경을 샅샅이 뒤졌다.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나름대로 추측하여 정리하면 이랬다.

 숫자 6- 불완전한 숫자.

 아담과 이브- 소년과 소녀를 부르는 명칭.

 움미아(전달하는 사람)- 가르치는 선생님.

 말하는 짐승- 짐승처럼 행동하는 사람.

 두 개의 달- 지구가 아닌 외계 행성.

 이쉬쿠르- 수메르(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 만신전에 속하는 천둥과 폭풍의 신이고 북서 셈계는 '하다드'라 불렀다. 때론 '쿠르'라고도 불렸으며 지하세계와 거대한 산이란 뜻도 있음.


 카린이 줄여서 쿠르 쿠르 투르... 하며 중얼거렸다. 친숙하고 익숙한 이름이었고 뭔가 기억날 듯한데 나지 않는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옆에 앉은 브리지트가 테이블 아래로 그의 손을 잡았다. 이쉬쿠르가 하늘에 뜨면 사냥꾼 카린이 돌아왔다는 신호였고, 그래서 브리지트가 제일 먼저 달려 나간 것이라 그녀는 생각했다. 그때도 지금처럼 서로 무척 사랑했다는 생각에 그녀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카린은 그녀가 꿈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쿠르를 귀염둥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를 로운에게 해줬다.

 "천둥과 폭풍의 신이자 어두운 지하세계와 거대한 산을 일컫는 영물을 귀염둥이로 부른 브리지트는 얼마나 당찼을까?"

 얼마 전까지 그녀는 단정하고 숫기 없는 여자란 사실을 알고 있는 로운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큭큭대며 말했다. 카린의 표정도 다르지 않았다. 

 순간 브리지트는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당찼다... 당찬... 아담... 하와... 전달... 말하는 짐승... 그보다 다른 큰 뜻이 있어."

 브리지트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어떤 다른 뜻?"

 카린이 반문했다.

 "응, '말하는 짐승'의 의미 말이야. 그것은 고대 그리스 로마 아니 그 이전부터 쓰여왔을 수도 있던 자유를 상실한 사람, 즉 노예를 일컫는 말이었어. 정복자가 정복한 도시의 시민을 노예로 만들어 짐승 취급한 것이지. 그런데 우리가 살던 세계에선 어릴 때부터 짐승이 되면 안 된다고 가르쳐. 언어란 것은 원래 세월이 흐르면서 그 고유의 의미가 약간씩 변한다는 것이야. 어떨 땐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지. 원래대로 라면 노예처럼 순종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해. 나의 자유의지와 타인의 자유의지를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사회가 우리가 살던 세계야. 이곳 아이들은 유치원에서 예절과 배려부터 배우지만, 우리 아이들은 태어나면서 자유의지부터 배워 아니 대를 이어 전달한다는 표현이 적절해. 매우 현명한 방식이지. 가르치고 배운다는 표현엔 지시와 순종을 슬며시 섞어놨거든. 그러나 우리의 세상은 달라. 생각해 봐, 로운인 그곳에 수많은 아담과 하와 중에 하나야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 로운이처럼 자존감 강하고 당찬 아이들이 모였다면, 처음엔 엄청난 갈등이 일어나고 툭하면 싸울 거야. 거의 난장판 수준이지. 그러면서 점차 균형을 잡아가. 혼돈의 질서라고 보면 돼."

 반박할 수 없을 만큼 매우 정교한 논리였다. 하지만 브리지트는 자신이 몇 가지 단어만으로 그 세계를 예측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인간의 뇌는 2650억 GB가량의 용량을 가졌지만 간단한 영어 단어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은 극히 일부분만 사용해서다. 초록의 생명력은 그녀의 뇌 신경계를 이루는 뉴런을 증가시켜 점차 많은 뇌의 영역이 활발히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그녀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곳은 아마, 신도 왕도 통치집단도 없고, 물질을 섬기지 않고, 유명세에 관심 없는 사회가 분명해. '6'이란 숫자가 그런 의미야. 불완전을 인정한다는 것이지, 다르게 말하면 전혀 소유하지 않는 다는 것이 아니라 뭐든 적당히 가지고 살겠다는 의미이기도 해. 이 집만 해도 그렇잖아, 가구라 불릴 것도 별로 없고 그마저 집주인이 설치해 준 것이 전부야 그래도 있을 것은 다 있잖아. 그리고 여기에는 구성요소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이 있어. 우린 그래야 자유롭게 삶을 즐길 수 있으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오히려 단단히 뭉쳐, 카린과 로운 헬렌 레오 마날처럼. 자유가 얼마나 편안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그 어떤 억압도 용납하지 않아. 처음에 카린과 로운을 봤을 때, 둘의 자유로운 행동 방식을 난 이해하지 못했어. 아무리 자유분방하다 못해 무작정 총질부터 해대는 미국에서 자랐다고 해도 그러지 않아. 영혼은 기억하고 있던 것이야. 그리고 헬렌을 포함해 누구도 종교가 없잖아. 카린의 말대로 다른 존재를 섬기는 것 자체가 자유의지에 반하는 것이니까. '영혼의 전쟁'은 자유의지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을 것이야. 결국 우리가 풀어야 하는 수수께끼는 언제, 누가, 왜, 무엇 때문에 우리의 자유의지를 침범했냐는 것이지. 진실은 바보들만 찾는 것이라고 하지만 우린 진실을 찾을 거야 그래야 거짓으로 살지 않을 테니까."

 브리지트 뭔가 달라진 사람처럼 말했다. 부드럽지만 설득력 있었고, 평온하면서 강렬했고, 역사 전공자답게 논리적이었다. 명연설 후에 감동한 청중이 침묵하듯 카린과 로운은 잠시 멍한 상태를 유지했다. 그녀는 자신도 해냈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자신들이 떠나온 고향 행성 관한 중요한 내용이었다. 카린이 로운에게 눈짓을 하자 뉴욕으로 전화를 했다. 잊어버리기 전에 서둘러 전달해야 했다. 그들은 모두가 개별이자 하나였다.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영혼의 종족 3-기괴한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