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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Apr 07. 2023

서로 다른 종족들

영혼의 종족-7. 

 '땅구덩이에 사는 그들의 생각과 행동은 은 종족인 우리도 이해할 수 없었다.'- 천국의 가브리엘.



 18.

 로운이 새롭게 떠올린 기억은 7, 8살 때였다. 지난번 5살 때의 기억보다 훨씬 선명했다. 그 이야기는, 오래전 이 행성에 잠시 머물렀던 초록의 영혼을 가진 위대한 여인의 삶에 관한 서사시이자, 브리지트 그녀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브리지트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흥분감에 떨어야 했다. 말아쥔 손에 땀이 나고 그녀의 심장이 비명을 질렀다. 자신에게 초록의 영혼이 있고 로운은 자신을 닮으려 했다. 심지어 바람의 영혼을 가진 남자와의 사랑까지도 부러워했다는 말에 그녀는 들썩였다. 몇 달 전 꿈처럼, 그때도 숲 속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햇살 아래 카린과 살랑이는 얘기를 나누며 행복해했을 것이다.

 그들의 고향은 아틀란이었다. '세상은 이미 가득 차 있고, 우리 아틀란인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말에서 알 수 있었다. 고대로부터 사람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전설의 초 고대 문명 아틀란티스가 맞다면, 그곳은 서쪽 바다 어딘가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갈 수 없는 웜홀 반대편 다른 우주 항성계에 존재했다. 환상의 아틀란티스 문명은 모든 것을 물질의 풍요로움과 연결 지어야 직성이 풀리는 영장류 특유의 과잉 망상에서 비롯됐다. 사람들이 기대한 것처럼 완벽한 세상도 아닐뿐더러 황금빛 찬란한 유토피아도 아니었다. 불편해 보일 정도로 거칠고 단조롭고 투박한 것이 어느 미개발지 같았다.

 로운의 기억에 의하면, 그곳 아이들인 아담과 하와는 기묘하리만큼 반사회적 성향을 띠었다. 공동체라는 개념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처럼 이기적으로 행동했다. 나뭇가지 뻗어 나오듯 제 멋대로인 작은 악마들은 온종일 햇살, 바람, 숲, 바위, 물 등에 노출되어 있었고, 밤이면 두 개의 달과 별빛이 쏟아져 내리는 대지에서 잠들었다. 그 모든 거칠고 단조롭고 투박한 것들조차 우주의 일부였고, 그것들로부터 양분을 섭취하며 자라난 아이들 또한 예측 불가능한 우주의 일부였다. 영혼을 볼 수 있는 아이들은 자신의 영혼을 무엇으로 채울까 하는 형편없는 꿈을 꾸었고, 벌써 자신들이 원하는 이성과 함께하려는 한심한 생각을 했다. 이곳 기괴한 세상의 아이들처럼 훗날 대단한 인물이 되어 뭔가 큰일을 하겠다는 거창한 목표도 없었다.

 오래전 브리지트는 그 귀가 뾰족한 작은 악마들에게 짐승(노예. 짐승)처럼 살면 안 된다고 말했고, 손끝에서 거대한 다중의 평행 우주와 웜홀을  펼쳐 보여주었다. 브리지트는 이 전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전달해야 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었고, 웜홀을 자유롭게 오가며 광대한 우주를 여행하는 바람의 영혼을 가진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였다.

 몰입해서 듣고 있던 로운의 이야기가 끝났다. 그녀의 머릿속은 정적이 흘렀고, 심장은 아찔한 감동으로 인해 몹시 시끄러웠다. 브리지트가 앉은 채로 허리를 구부려 로운을 끌어안았다. 초록의 영혼을 가진 자신을 닮고 싶어 하던 발칙한 그 아이가 찾아왔다. 이번엔 반대로, 자신에게 초록의 영혼이 있음을 알려주려고 수천억 광년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시공간이 다른 우주 항성계에서 웜홀을 지나왔다고 생각했다. 껴안고 있는 두 사람으로부터 초록의 향기가 진하게 퍼졌다.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듣고 있던 카린이 두 사람을 바라봤다. 브리지트와 로운의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바람은 항상 나부끼는 곳으로 분다.




 두 사람을 지긋이 바라보던 카린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서 뉴욕의 헬렌과 통화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카린이 노트북을 들고 방에서 나왔다. 그가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짐작한 브리지트는 격렬한 감정에서 깨어났다. 그녀의 가슴을 가득 채웠던 광대한 우주와 항성계를 연결해 가던 웜홀도 사라졌다. 대신  또 다른 감정이 밀려왔다.

 뉴욕은 지금 밤 10시였다. 로운의 기억을 뉴욕의 세 사람과 공유하기 위해 영상 통화를 하려는 것이다. 브리지트는 로운의 폰에 저장된 헬렌의 사진을 보거나 얘기를 들을 때면 속에서 뭔가 움직거리는 듯했다. 그 느낌은 이번 생에서 그녀가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카린이 노트북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전기 코드를 꽂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바닥에서 소파로 옮겨 앉은 그녀는 두 손을 가슴에 얻고 연신 심호흡했다. 긴장과 기대감 사이에 놓인 그녀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했다. 절정에서 내려오자 다시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려서 보여주면 좋을 것 같아."

 어려서부터 레오에게 그림을 배운 로운은 그림을 쓱쓱 잘 그렸다. 잽싸게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 크로키북을 들고 나와 브리지트 옆에 앉았다. 준비를 마친 카린도 그녀 옆에 앉았다. 양쪽에서 카린과 로운이 호위하듯 바싹 붙어 있음에도 그녀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카린, 이상하게 떨려. 아니 뭐랄까, 마치 울림 같아. 내 안의 영혼이 요동치는 느낌이야."

 그녀가 카린에게 말했다.

 "좀 전에 영상 통화를 하자고 하니까, 헬렌의 목소리도 떨렸어. 그녀도 그런 것 같아."

 카린이 브리지트의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

 "헬렌이? 뭔지는 몰라도 두 사람 관계가 있는 것 같아."

 로운이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카린이 구글로 들어가 영상회의 앱을 클릭하고 헬렌의 계정을 입력했다. 드디어 노트북 화면에 세 사람이 나타났다. 연한 갈색톤 수염이 까칠하게 난 건장한 체격의 후덕하게 생긴 프랑크족 남자, 짙은 눈썹에 머리를 길게 땋은 뚜렷한 인상의 히말라야 파슈툰족 여자, 그 둘 사이에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대충 뒤로 말아 올린 마른 체형의 육십대 중반 앵글로색슨족 여자가 주름진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레오, 마날, 헬렌이었다. 그들은 모두 인종과 생김새는 달랐으나 눈빛에 유난히 맑고 살짝 붉은 기운을 띠는 머리칼을 가졌다. 다른 때 같았으면 서로 반갑게 손을 흔들며 난리법석을 피웠을 테지만 이번엔 그럴 수 없었다. 뉴욕의 세 사람의 브리지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카린, 너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거야. 난 로운이 저 어리숙한 녀석을 이십대로 만들어 준 것보다 브리지트를 만났다는 것이 더 놀라워."

 한동안 넋 놓고 바라보던 레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카린, 넌 살면서 가장 위대한 일을 한 거야. 그런데  하루 종일 저런 여인과 함께 있으면 그걸 어떻게 견뎌?"

 마날도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손으로 가린 상태로 말했다.

 "사라져."

 로운이 말했다.

 "사라져?"

 "둘이 갑자기 사라졌다가 한참 후에 나타나. 여기 집들은 층간 소음뿐 아니라 벽간 소음도 심각한 사회 문제거든 게다가 이 집엔 미성년자도 있고..."

 로운의 의미심장한 설명에 레오와 마날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물론, 그들의 떠들썩한 대화는 유창한 영어였다. 처음에 그녀는 그들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점점 쉽게 들렸다. 그것은 그녀의 운동, 감각, 사고력을 관장하는 신경세포 뉴런의 빠른 반응으로 인해서다. 인간은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양의 정보를 뇌라는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하고 있지만 정작 아무것도 모른다. 무엇인가 뉴런의 활동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귀로 들리는 주변 분위기와 상관없이 앞에 있는 앵글로·색슨족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헬렌도 마찬가지였다. 보이지 않는 끈이 두 사람을 연결한 것처럼 무의식 비슷한 상태로 서로가 바라보고 그저 좀 더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알 수 없는 감정에 이끌린 헬렌이 손으로 화면을 집자 브리지트도 손을 마주 대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한 채 손을 마주 대고 그대로 있었다. 뉴욕과 서울 간 11,046km 떨어져 있고, 인종과 언어가 다른 두 사람이 공간을 뛰어넘어 느낌의 언어로 대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말로는 표현하기 부족한 안타까운 언어들이 촉감을 통해 서로에게 전달됐다. 친근함, 그리움이 뒤섞인 애틋한 언어였고, 그녀들의 영혼이 이만 년 동안 간절히 기다려오던 느낌이기도 했다. 헬렌과 브리지트 눈가에 물기가 고이더니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금 헬렌과 브리지트의 영혼이 엄청나게 빛나기 시작했어. 이렇게 빛나는 것은 처음 봐. 환하게 웃는 것 같아."

 영혼을 볼 수 있는 로운이 신기한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사실, 이러한 소통방식은 오래전 영혼의 종족이라 불리던 그들이 즐겨 쓰던 원시적 대화방식이었다. 대지와 나무, 햇살과 숲, 개울물과 자갈이 서로 소통하듯 그들은 영혼을 가진 다른 생명체들과 소통해 왔다.




 분위기는 다시 흥미롭게 흘러갔다. 로운이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하면 각자의 생각을 말했다.

 "다른 방식으로 진화."

 카린이 말하자, 모두가 이어지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 문명의 중심축은 사람이 아니라 물질이라고 생각해. 다들 물질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하지. 인류는 처음부터 전쟁을 일삼으며 같은 종족들마저 노예 혹은 종이라 부르며 소유권을 주장하고 사용가능한 물질로 취급했어. 인류가 위대하다고 말하는 성경과 수많은 문학작품에도 버젓이 등장하지. 절대 권력을 가진 사제와 맹신하는 신도, 왕과 충성스러운 신하, 은혜를 베푸는 주인과 복종하는 종의 관계. 인간은 누구나 신처럼 행세하고, 왕처럼 대접받고, 주인처럼 지배하려 해. 그러자면 권력이 있어야 하고 권력은 물질에서 나와. 크든 작든 그 어떤 권력도 물질 없이는 생겨날 수 없어. 물질은 거짓 추종자와 비굴한 부역자를 만들고, 삶과 죽음을 가르는 전지전능한 신으로 굴림하면서 모든 것을 통제해. 인간의 도덕성과 생각까지. 누구도 물질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의 호모 사피엔스는 물질의 발전을 유일한 문명의 진화로 여겨, 그들의 머릿속은 물질에 관한 방대한 지식으로 꽉 차 있어. 그래서 위험천만한 것들을 쉼 없이 만들고, 그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새로운 것을 빠르게 만들어내지. 누군가 새로운 것을 만들고 팔아 큰돈을 벌거나 많은 재산을 물려받으면 열렬히 칭송해. 낮은 신분인 노예가 주인을 대하듯 하지. 그러나 물질로 이룬 문명은 지속 가능하지 않아. 누군가 많이 가지면 대다수는 적게 가져야 하거든. 노예의 꿈은 자유가 아니라 주인이 되는 것이고, 짐승의 욕망은 지배를 원하니까. SF 영화처럼 고도로 지능화된 외계인이 침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무너지게 돼 있어. 고도로 지능화된 외계인이라면 그런 골치 아픈 일은 벌이지 않아. 가만히 놔둬도 극심한 갈등으로 인해 붕괴할 것이고, 그들의 과학 기술로도 어떻게 해볼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된 행성 따위는 필요치 않으니까. 그렇다고 아쉬워할 것 없어. 광대한 우주의 시각으로 본다면, 어느 행성의 한 종족이 생겨나 수천 년간 문명을 이루다가 사라지는 현상은 평범한 사건이자 찰나일 뿐이야."

 카린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섬찟한 이야기였으나 모두가 될 대로 되라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외계 행성에서 온 무심한 관찰자 같았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반면에 우리 아틀란인들은 물질이 아닌 영혼을 기반으로 진화한 것이 분명해. 이제 이해가 됐어. 왜 우리가 혈연관계로 맺어진 부모 형제와 섞이지 못하고 떨어져 나왔는지. 두 생명체는 애초부터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야. 그들은 본능적으로 우리를 이질적인 존재로 느꼈겠지. 우리의 공통점은 물질에 그다지 관심 없고 무엇을 섬기거나 추종하지도 않아. 신에게 기도할 줄도 모르지. 아틀란의 아이들처럼 거칠고 개성이 강해. 그렇다고 폭력적이란 소리는 아냐. 규격화되어있지 않고 규정된 도덕률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야. 영혼은 본래 자유로운 존재고, 자유로운 생명체만이 영혼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지. 결국 우리는 그들로부터 떨어져 나왔어. 아니 그럴 수밖에 없게끔 내몰렸다고 봐야지. 그리고 그들도 우리를 찾지 않았어. 전에 한번 꽃가게 건너편 호텔로 꽃 배달을 갔을 때 아버지와 마주친 적이 있어. 마치, 언젠가 한 번 본 사람인데 생각나지 않아 머뭇거리듯 한 표정으로 나를 잠시 쳐다봤어. 그러다 그의 아버지가 내게 지어준 이름을 짧게 뱉어내더니 그냥 지나쳐버리더군. 내게 별다른 감정을 못 느끼는 사람처럼 보였어. 아마도 루시안이 우리에 대한 그들의 감정을 지운 것 같아. 가해자가 느껴야 하는 피해자에 대한 죄의식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은 오로지 악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사람의 뇌는 어떤 사람에 대한 좋거나 싫거나 하는 다양한 감정이 없다면 굳이 떠올리지 않거든. 우연히 마주쳤다 해도 그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지. 우린 그들에게 잊힌 존재야. 그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지. 본인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자식과 형제에게 저지른 끔찍한 실수를 기억하고 산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니까."

 모두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카린 너의 말은, 우린 그들과 다른 종족이고 거기서부터 수수께끼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뜻이야?"

 레오가 질문하듯 말했다.

 "맞아. 호모사피엔스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전혀 다른 종족이야. 우린 그들보다 훨씬 이전의 종족이기도 하고. 지속 가능한 문명을 이룬 종족이기도 해."

 "난 카린의 생각에 동의해, 브리지트가 아틀란 아이들에게 보여준 평행 우주에는 매우 느리게 회전하는 거대 우주와 빠르게 회전하는 작은 우주가 모래알처럼 많았어. 또 각각의 우주에는 수많은 은하와 지구와 같은 환경을 가진 행성도 셀 수 없이 많지. 그렇다면 아틀란 행성은 느리게 회전하는 거대 우주에, 지구는 빠르게 돌아가는 작은 우주에 속해 있지 않나 싶어. 우린 나태하게 보일 만큼 여유로운 습성을 가졌고, 이곳 사람들은 정신없이 빠르게 사는 습성이 배어있으니까. 그곳과 이곳의 시간 흐름도 달라. 루시안과 로운이 이만 년 전 그때도 있었고 현재도 있는 것으로 보면 짐작할 수 있지. 그리고 카린의 말처럼 우리 아틀란인들은 물질이 아닌 영혼을 기반으로 진화한 것이 맞아. 우주에 수많은 생명체가 똑같은 방식으로 진화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억지야. 게다가 진화 과정에서 묘한 능력도 생긴 것 같아. 물론, 우리끼리는 능력이라기보다 일반적 현상에 불과하지만, 이곳 사람들에겐 영향을 끼쳐."

 레오가 말을 이었다.

 "난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충동적으로 좋아했어. 내키는 대로 온종일 그렸지. 그런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 그림을 무척 싫어했어소름 끼친 표정으로 내 그림을 바라봤지. '넌 그림에 소질이 없다'라고 하면서 그리지 말라해도 난 계속 그렸어. 범죄라도 저지르는 기분이었어. 다들 아는 것처럼 내 그림은 사이코페스가 그린 것처럼 잔인한 것은 없어. 바람 부는 숲, 바다 위에 뜬 별, 분출하는 화산, 두 개의 달이 뜨는 험준한 지형의 행성이 대부분이야. 구글 이미지 검색만 해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그림이지. 10살 때로 기억해, 하루는 어머니가 나를 정신과 상담의에게 데려갔어.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그림만 그린다고 말이야. 정신과 상담의는 사십 대 중반 남자였는데 고등학교 때 수영 선수였어. 그의 책상 뒤편 벽에 수영대회 우승 매달을 목에 걸고 있는 고등학교 때 사진이 자랑스럽게 걸려있었거든. 어머니는 '얘가 그림을 그리면 집안에 물이 차오르는 느낌이 들고 그림에서 뭔가 튀어나올 것 같다'라고 정신과 삼담의에게 말했어. 돌이켜보면, 내가 아닌 그들이 정신 상담을 받아야 했는데 말이야. 그는 내게 종이와 연필을 내밀며 아무거나 그려보라고 했지. 그래서 난 그가 좋아할 만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 숲으로 둘러 쌓인 호수에서 헤엄치는 사람이야. 그림을 다 그린 다음 앞에 앉은 정신과 상담의를 쳐다보는 순간 내 예상이 빗나갔다는 것을 알았어. 그는 숨이 막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허공에 양팔을 휘젓고 있었지. 마치 깊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가라앉는 사람처럼 보였어. 그 후로 부모와 형제들은 그림이 아닌 나를 불길한 아이 취급하고 소름 끼친 눈길로 바라봤지.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아. 그들의 본능은 내 그림 속에 숨어있는 자유로운 거친 존재들에게 공포를 느꼈던 것이야. 난 풍경을 그렸지만 내 영혼은 카린, 브리지트, 로운, 마날, 헬렌 등 우리 종족과 아틀란 행성을 그렸던 것이지. 다들 알잖아, 저 어리숙해 보이는 카린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그리고 브리지트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들고, 마날의 춤은 모든 것을 녹여버릴 만큼 뜨겁고, 로운은 생명체를 피어나게도 하고 시들게도 해. 그리고 헬렌은 그런 이상한 우리를 아무렇지 않게 감싸주지."

 "나도 그랬어."

마날이 말했다.

 "난 어려서부터 춤추는 것을 좋아했어. 이슬람 사회에서 여자애가 춤추는 것은 아버지나 남자 형제들에게 명예살인을 당해도 싼 중 죄악이지만 말이야. 내가 춤을 추면 집안이 달아올랐어. 아버지와 어머니는 방탕한 계집처럼 보인다며 춤추지 말라고 했어. 그래서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추고, 숲에서 추고, 밤하늘에 별빛이 쏟아지는 들판에서 췄어. 난 몸이 반응하는 대로 춘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어. 되돌아보면, 내 영혼이 그리워하는 것을 춤으로 표현했던 것 같아. 레오의 그림처럼 바람, 숲, 물, 별, 대지 등을 춤으로 그렸던 것이지. 춤에 빠져있으면 누군가 다가와도 모를 때가 많아. 14살 때쯤으로 기억해, 그날은 땔감으로 쓸 나뭇가지를 주우러 동네 아이들과 먼 숲으로 갔어. 그곳엔 포탄에 쓰러진 나무가 많았거든. 한 짐을 가득 등에 지고 마을이 보이는 언덕 위로 올라섰는데, 눈 덮인 히말라야산맥 너머로 해가 지지면서 사방이 붉게 타올랐어. 나도 모르게 등짐을 벗어던지고 춤을 추기 시작했지. 밤하늘에 별이 뜰 때까지 계속 췄어. 내가 춤에서 깨어나자 마을 사람들이 저만큼 떨어져 바라보고 있었어. '부정한 년' '주변이 새까맣게 다 타버렸어.' '춤이 뱀 혓바닥처럼 날름거려. '악마의 불꽃이야.''라고 전에 한 번쯤 악마를 본 사람들처럼 수군거렸어. 처음부터 혼자였지만 그때부터 더 혼자가 됐고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로부터 명예살인을 당할 것으로 생각했지. 하지만 그런 율법에 딱 맞는 일은 생기지 않았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는 전통 방식이 있었거든. 다른 마을에 사는 부인이 둘씩이나 딸린 나이 든 남자에게 팔아버리는 것이야. 글쎄, 그 나이 든 남자의 막내딸이 나보다 세 살이나 더 많더라고... 혼인을 빙자한 합법적 강간이지."

 가혹했던 이야기였으나 마날은 그저 그런 추억처럼 말했다.

 "그리고 몇 년 후, 탈출해서 이곳으로 와 핼렌, 카린, 레오 그리고 아기인 로운을 만났어.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내가 춤을 추면 즐거워해. 나는 지금도 카린이 소개해준 클럽에 가끔 나가 사람들 틈에 섞여서 춤을 추고 약간의 돈을 벌어. 내가 춤을 추면 분위기가 금방 달아올라 클럽 사장 포터에겐 이득이지. 물론, 내키는 대로 신나게 추진 않아. 내가 만약 집에서 추는 것처럼 맘껏 춘다면 클럽은 불타버리고 말 테니까. 레오가 거리에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듯 아주 많이 절제해서 춰. 그런데도 사람들은 내 춤이 무척 뜨겁다고 해. 사실 뜨거운 것은 내 춤이 아니라 본인들의 야릇한 욕망이지."

 마날의 끝말에 모두 헛웃음이 터뜨렸다.

 "너희는 가족과 집을 떠나 이곳으로 왔지만 난 떠날 수 없었어, 이 집은 처음부터 내 명의로 되어있거든. 대신 그들이 떠났지."

조용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헬렌이 말했다.

 "루시안이 왜 가난한 성당 묘지 정원사였던 아버지에게 이 집을 사주고 꽃가게를 차려주었는지 알 것 같아. 여기서 너희를 기다리라는 뜻이었어. 오빠와 언니들은 이 집을 본인들이 나눠 갖기를 원했어. 자폐아처럼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온종일 혼자 노는 막내인 나는 안중에도 없었지. 한참 모자라 보이기도 했고. 그들은 내 방을 '비밀의 동굴'이라 불렀어.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 나오는 동굴처럼, 내가 들어가거나 나오면 저절로 잠겨 아무도 열 수 없었지. 인체를 감지해서 스스로 작동하는 스마트키가 있던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들은 나를 '동굴의 여왕님'이라며 비아냥거렸지. 성탄절이었던 것으로 기억해, 오빠와 언니들이 부인과 사위까지 대동하고 우르르 몰려와 아버지에게 말했어. 이 낡은 건물을 헐고 주변 건물들처럼 고층으로 지어 임대하면 큰 이익을 볼 수 있다고. 똑똑한 그들은 아버지가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것 같아. 화려한 전광판과 사람들로 넘쳐나는 거리에 허름한 꽃집이라니 스타벅스가 들어와도 부족하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아버지는 꿈도 꾸지 말라고 소리쳤고, 어머니는 불쌍한 여자처럼 떨고 있었어. 그들은 아버지로부터 성탄 선물을 받아낼 수 있을 거라 확신했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갔지. 그날 밤, 물을 마시러 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주방에서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어. '다 죽었어, 그동안 이 집에 손대려던 부동산 컨설팅 업자뿐 아니라 연관된 공무원과 은행 대출 담당자까지. 물에 빠져 죽고, 화재로 죽고, 교통사고로 죽고, 심장마비로 죽었어. 내 자식들을 죽일 수는 없잖아.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돼. 난 루시안이 무서워. 그리고 애들은 모르지만, 이 집은 막내인 헬렌과 브리지트라는 여자의 공동 소유로 되어있어'라고 했어."

모두가 의문스러운 시선으로 브리지트를 바라봤다.

 "내가 결혼하고 집을 잠시 떠났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짧은 결혼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돌아온 1년 후에 어머니도 성당 공원묘지 아버지 옆으로 가셨어. 두 분이 부동산개발 관련자들처럼 비명횡사했다는 뜻은 아냐. 누구나 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일반적인 현상일 뿐이지. 그리고 얼마 후 루시안이 16살 된 동양인 남자아이를 데려왔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자제품을 만드는 기업을 경영하는 집안 아이였어. 뉴욕 시내 어디를 가도 그 기업 광고를 볼 수 있지. 그런 집안에 짐승 냄새가 나서 도저히 못 살겠다고 뛰쳐나온 재미난 아이였어. 처음 볼 때부터 가슴이 두근거렸어.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니까. 카린이라고 했어. 즉흥적으로 지었다고 생각했지만, 꽤 어울리는 이름이었지. 그때부터 우린 꽃가게를 함께 운영했어. 카린이 꽃을 다듬는 손놀림은 경이로웠지. 루시안이 떠나면서 흑빛 소도를 카린에게 줬어. 날이 어찌나 뭉툭한지 자르기보다 으깨는데 더 적합해 보였어. 하지만 카린이 손에 쥐면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악마의 칼로 변신했지. 못 자르는 게 없었어. 뭉툭한 흑빛 칼이 줄기 근처만 가도 휙휙 잘려 나갔지. 꽃은 자기 몸통과 이파리가 잘려 나간 몰랐을 거야. 꽃을 사러 오는 손님은 대부분 남자야. 그들은 카린의 꽃다발을 원했어. 희한하게도 꽃다발에서 여인에 대한 진한 그리움이 풍겼거든. 생각해 봐, 그 꽃다발을 받는 여자의 마음이 어땠을까 하는..."

 모두의 시선이 황홀감에 빠져 몽롱한 상태인 브리지트에게 향했다. 

 "어느 날 카린이 내 방문을 노크하길래 들어오라고 했더니, 정말 들어왔지 뭐야. 순간 깜짝 놀랐어. 단 한 번도 내가 직접 열어주기 전에 들어온 사람은 없었거든. 그리고 계속해서 가슴 두근 거리는 일이 생겼어. 아이슬란드 병원에서 로운을 데려오고 이어서 레오와 마날이 온 것이야. 이 세 사람도 내 방을 자유롭게 드나들어. 아틀란의 고분고분하지 않은 아이들처럼 각자의 성격이 달라. 그럼에도 우린 묘하게 잘 어울렸어. 그러나 정작 처음부터 있어야 했던 브리지트는 나타나지 않았지. 그날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를 엿듣고 난 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를 상상했어. 그럴 때마다 애틋한 감정에 들곤 했지. 방금 다들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야. 브리지트는 왜 처음부터 있어야 했고, 로운의 기억도 브리지트를 중심으로 펼쳐나가냐 하는 것이지. 로운의 귀걸이를 누군가 의도적으로 브리지트에게 전달하고. 여기서 누군가는 로운과 루시안이라고 확신하지만, 로운은 그 부분에 관해선 전혀 기억을 못 하니까. 하여간 로운의 귀걸이가 브리지트를 카린과 만나게 했어. 무척이나 공들인 치밀한 계획이야. 우리가 풀어야 할 수수께끼의 최종 해답은 브리지트가 분명한데, 그 해답이 뭘 의미하는지 우린 아직 모른다는 것이 내 생각이야. 오 년 전, 그 차가운 것들이 나타나는 통에 뉴욕이 소란스러워졌어. FBI가 은밀히 캐묻고 다녔지. 그래서 카린과 로운이 소란스러움을 피해 한국으로 떠나고 얼마나 허전했는지 몰라. 그러나 이제 브리지트와 함께 곧 이곳으로 온다니까 됐어."

 이야기를 마친 헬렌이 정감 어린 눈길로 브리지트를 바라봤다.

 "아직 한 영혼이 나타나지 않았어."

 로운이 말했다.

 "별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야. 내 기억으로는 그때 뒤에 있던 움미아들에게 각각 불, 물, 별의 기운이 느껴졌어. 그렇다면 불의 영혼은 마날, 물의 영혼은 레오, 초록의 영혼은 브리지트와 나, 바람의 영혼은 카린 그리고 헬렌은 항상 포근하게 감싸주는 느낌을 줘. 바로 대지의 영혼이지. 그러나 걱정하지 않아. 그도 곧 나타날 테니까. 하지만 그전에 뉴욕으로 돌아가할 일이 있어. 난 헬렌의 주름살이 정말 맘에 안 들어."

 갑작스러운 로운의 끝말에 당황한 헬렌은 민망한 듯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내... 내가 브리지트처럼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

 "어차피, 일가친척 중에 찾아오는 사람은 린다밖에 없잖아. 그것도 가끔. 그리고 뭐, 손님들은 꽃가게 주인이 바뀐 줄 알겠지."

 "그럼 나는?"

 마날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치듯 물었다.

 "마날의 가로 목주름도 맘에 들지 않아, 겨우 오 년 만에 그렇게 깊게 생겨버리다니 도대체 피부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나도?"

 레오가 물었다.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어, 그리고 이건 본인이 선택하는 게 아니야. 어쩌면, 그것이 내가 여기로 온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모두의 육체를 영혼의 나이로 돌려놓는 것. 단순히 젊어진다는 의미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다는 느낌이 들어. "

 로운이 결심한 듯 앙큼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로운이 정 그렇다면 뭐 할 수 없지. 다시 귀찮게 생리를 한다 해도...."

 헬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지만 기대감에 찬 표정까지는 숨길 순 없었다. 모두가 웃음이 터뜨렸다.

 "헬렌과 브리지트 그리고 로운,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 넷이 뉴욕 거리를 걷는다는 생각만 해도. 너무 흥분돼."

 마날이 뮤지컬 배우처럼 양팔을 펼치며 말했다.




 그들의 기묘한 대화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천체물리학회와 의학계뿐 아니라 세상을 뒤집어 놓을 이야기였으나 그들은 아틀란인 다웠다. 꽤나 진지한 대화임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웃음이 터졌다. 그들은 전혀 인간답지 않았다. 과거에 겪었던 지독한 외로움과 슬픔을 보물처럼 가슴에 담아두고 수시로 꺼내보며 만지작거리지 않았다. 그런 불필요한 감정들은 무가치한 쓰레기에 불과했다. 그들은 뇌 손상을 입은 사람들처럼 비정상적 사고방식을 가졌고, 브리지트 그녀 또한 비정상적인 관계로 편안함을 느꼈다. 그녀는 그들과 대화에서 '우리'라는 단어가 가장 듣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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