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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Nov 29. 2020

May day, 그날을 기다린다




 습관처럼 웅얼거리는 말이 있다. 명언도 마음을 다스리는 글귀도 아니다. 달랑 두 단어인 'May day'를 반복한다. 그것은 한 가지 엉뚱한 오해로 인해 비롯됐고 두 발로 땅을 굳게 딛고 살게 끔 만들었다. 원래 May와 Day는 띄어 쓰느냐 붙여 쓰느냐에 따라 뜻이 전혀 다르다. 띄어 쓰는 May day(5월 1일)는 노동절이다. 반면에 붙여 쓰는 Mayday는 항공기 비상 구조요청 신호다. 꼭 세 번을 반복해서 외쳐야 한다는 것이 전 세계 항공 규정이다. 그러나 그는' 메이 데이! 메이 데이! 메이 데이! (May day! May day! May day!)'라고 띄어 쓴다. 분명히 잘못된 어법이지만 그에겐 맞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1886년 5월 시카고에서 '헤이마켓' 사건이 발생했다. 하루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전 국적 파업에 나선 노동자 시위대에게 경찰이 발포하여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다음 날 헤이마켓 광장에 폭발물이 터져 경찰이 숨지고 많은 사람이 다쳤다. 경찰은 범인을 색출하겠다고 노동 지도자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였다. 그중 8명을 재판에 회부했다. 폭발물을 터트렸다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유죄 선고를 받았다. 모든 것은 각본에 짜인 듯 일사천리로 돌아갔다. 언론은 몰아가고, 경찰은 체포하고, 검사는 구형하고, 판사는 판결했다. 단지 노동시간을 줄이고 노동자를 인간답게 취급해 달라는 급진적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에서였다. 그중 4명은 교수형 당하고 1명은 감옥에서 자살했다. 급기야, 충격과 분노에 휩싸인 전 세계 지식인들까지 들고일어나 나머지 3명에 대한 구명 활동을 벌여 석방시켰다. 훗날 이들을 가리켜 '시카고의 8인'이라 부른다.


부패한 권력과 자본주의의 결탁은 반드시 야만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준 대표적 사례다. 그로부터 3년 후, 1889년 프랑스 파리에 전 세계 노동자 자신들의 권리를 스스로 찾기 위해 모였다. 거기서 헤이마켓 사건을 기리기 위해 5월 1일(May day)을 노동절로 정했다. 당시 자본가들은, 정부는 간섭하지 말고 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맞게 노동시간과 임금, 근로조건 등 모든 경제활동을 시장에 맡겨 놓으라고 했다. 현재도 많이 듣는 소리다. 지금이나 132년 전이나 똑같다. 그들은 변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가 노동절(May day)과 항공 구조요청 신호(Mayday)를 연결 지어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의 학창 시절엔 '노동'이란 말 자체가 금기어였다. 북한 노동당이 연상 돼서다. 대신에 일본 어인 '노가다'가 사용됐다. 하다못해 '노동' 이란 단어는 시험에 단 한 글자도 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헤이마켓 사건도 대학에 들어가서 알았다. 그래서 우린 아직도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이라고 한다. 요즘처럼 인터넷이 있었다면 그런 엉뚱하고 무식한 오해는 하지 않았겠지만, 그땐 별수 없었다. 조종사가 얼마나 다급했으면 노동자가 외친 May day를 절박하게 외쳤을까 했다. 사실, 구조 요청 신호 'Mayday'는 메데 (m’aider)에서 유래했다. 그것은 프랑스어로 '도와주세요'라는 뜻이다. 당시의 영국과 프랑스 간의 항공편이 많았다. 당시 영국 크러이던 공항의 목 포드(F. S. Mockford)란 무선통신사가 프랑스어와 영어의 비슷한 발음인 Mayday로 통일하자고 한 것이다.


한번 결합된 생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깊숙이 파고들었다. 시카고의 8인은 왜 순응하지 않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을까. 생과 사를 오가는 순간에 조종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광장 군중들에 둘러싸여 있던, 비행기에 있던 절박하긴 마찬가지다. 다른 것은 떠오르지 않고 마음에 담겨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잠시 떠올랐다 이내 사라졌을 것이다. 광장에 모인 군중들의 함성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고, 조종사는 조종간을 꽉 붙잡고 온 힘을 다해 비상 착륙할 것이다. 세포 하나하나가 꿈틀거리며 들고일어나 암울한 현실과 죽음에 저항하고 맞선다. 그는 여기서 위기가 찾아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지를 터득했다. 그가 언젠가 자신의 어린아이들에게 말했다.


"위기 때는 말이야, 마음에 담을 수 있는 것만 빼고 다 버려... 그것도 빠르게 버려... 그럼 살 수 있어!"


두 남매는 아빠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뭘 알까 싶지만 그래도 늦기 전에 해야 했다. 내일은 아이들 곁에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성공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고 실패할 때 다시 일어나는 법을 알려줬다. 두 아이는 어느새 커서 자신들의 길을 간다. 살다 보면 많은 우여곡절이 있다. 다 버리고 맞서야 한다. 지위, 체면, 물질 등 그깟 것들이 아까워 우물쭈물하다간 죽는다. 잃을 것이 없기에 무서워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삶에 끌려가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있다.


그는 이렇듯 어법에 맞지 않는 'May day'를 '스스로 자신을 구하기 위해 일어나 맞서라'란 뜻으로 통합해 쓴다. 어차피 상관없다. 발음이 비슷하다고 구조 요청 신호로 만든 인간이나, 두 개의 의미를 통합해서 쓰는 인간이나 거기서 거기다. 없던 길도 사람이 지나가면 길이 되는 것처럼 없던 글도 사람이 쓰면 글이 된다. 그는 끊임없이 소리친다. 그 대상은 가망 없는 그들과 부역자들이 아니다. 이 땅의 새로운 주인인, 기회조차 가질 수 없는 청춘들이다. 인제 그만 일어나라. 인류 역사 그 어디에도 참는 자의 자리는 없다. 갑갑하고 억울한 현실에 복종하고 순응하며 살다 간 노예밖에 되지 않는다.


May day! May day! May day! 그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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