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해피-뉴-무비-이어
크리스마스가 지났다. 일주일 후면 이미 2024년이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는지. 올해를 돌아보고, 내년을 준비해야 할 때가 성큼 다가와 버렸다. 나는 매 연말, 다음 해의 목표를 세운다. 목표를 세웠다고 지키려 부단히 노력하지는 않지만,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 계속 세우고 있다. 2018년부터 시작했는데, 해가 지나면서 살아남는 목표도 있고 지워지는 목표도 있다. 계속 살아남는 목표는 영화 00편 이상 보기, 책 00권 이상 읽기, 일기 쓰기 같은 것들인데, 00에 들어가는 숫자가 매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일기 쓰기는 달성한 경우가 거의 없지만 꾸준히 넣고 있다. 내년의 나에게 가하는 일종의 압박이랄까.
그동안 내가 세웠던 영화 보기 목표를 돌아보았다. 2018년에는 24편 이상 보기가 목표였고 38편을 봐서 달성했다. 이에 목표를 상향 조정해 2019년에는 50편 이상 보기를 목표로 삼았으나, 41편을 보면서 달성에 실패했다. 다시 목표를 살짝 낮추어 한 달에 4편인 48편 이상 보기를 목표로 삼았고, 74편을 보면서 달성했다. 이 해에는 교환학생으로 독일에 갔었는데, 가서 한 일이 여행 다니기, 요리하기, 영화 보기밖에 없었다. 2021년에는 60편 이상 보기를 목표로 삼았고, 무려 85편을 봤다. 코로나로 인해 밖을 거의 나가지 않고 집에서 영화만 봤던 기억이 있다. 이에 한껏 자신감이 차오른 나는 2022년 목표를 영화 100편 이상 보기로 삼았으나 35편밖에 못 보며 처참히 실패했다. "퇴근하고 집에서 영화를 잘 안 보게 된다. 집중력도 없고, 기력도 없고."라고 작년 말에 써 둔 글이 있다. 회사 일에 지쳐 영화에 쏟을 에너지가 없었다. 윗은 이렇게 끝난다. "최근에 읽은 변영주 감독님의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면 그 누구보다 영화를 많이 봐야 합니다." 내년에는 조금 더 영화를 많이 보는 한 해가 되기를." 이 바람대로 올해의 목표도 100편 이상 보기로 삼았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 이미 110편을 보며, 100편이라는 기념비적인 목표를 달성하고 말았다.
영화를 보면 항상 왓챠피디아에 별점을 남긴다. 올해 몇 년 만에 만점(5.0점)을 준 작품이 생겼다. 사라 폴리 감독의 '우리도 사랑일까'라는 작품이다. "인생의 빈틈은 누군가가 메워줄 수 없다. 나 자신만이 메울 수 있다. 아니다. 굳이 메우지 않아도 괜찮다."라는 코멘트를 8개월 전의 내가 남겼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섬세한 감정에 매혹되어 꼼짝도 못 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하며 봤던 영화였다. 집중력이 떨어져 긴 영화를 틀면 자꾸 핸드폰을 켰었는데, 이런 경험은 오랜만이었다. 좋은 영화를 만났을 때의 그 흥분감이란. 주변 사람 모두에게 이 영화를 보라고 추천해 주고 싶었다. 그다음 4.5점을 줬던 영화로는 '괴물', '비밀의 언덕', '우주전쟁', '토니 에드만', '스포트라이트',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6편이 있다. 괴물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최신작으로 오랜만에 극장에서 혼자 본 영화였다. 2시간 내내 이야기와 배우들이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는데, 그래서 기뻤다.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쉽게 자리를 뜰 수 없는 영화였다. 다른 5편의 영화도 너무나 좋아 구구절절 쓸 말이 많지만, 각각의 글로 올리기로 하고 넘어가겠다. 4.0점을 준 영화는 32편이나 있는데, 그중 '튼튼이의 모험', '맨체스터 바이 더 씨', '그린 나이트', '덩케르크', '버드맨'이 기억에 남는다.
올해에는 팟캐스트 '김혜리의 필름클럽'과 왓챠에서 진행했던 '왓챠 영화파티' 두 가지가 내 훌륭한 영화 친구가 되어주었다. 필름클럽은 몇 년 전부터 들었던 팟캐스트이지만, 제대로 정주행 한 적은 없어 이번에 도전했다. 1회부터 목록을 보며 안 본 영화를 보고 필름클럽을 듣는 일을 반복했다. 덕분에 있는지도 몰랐던 영화를 보게 되고, 좋은 감독과 배우를 알게 되어 기뻤다. 16년 12월 20일에 올라온 1회부터 18년 2월 28일에 올라온 44회까지는 다 들었고, 최신 에피소드로 올라오는 것도 종종 들었다. 올해 개봉작 중에서는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비밀의 언덕', '오펜하이머', '거미집', '너와 나', '괴물'을 보고 들었고, 최근에 올라온 연말 결산 2편은 아직 듣지 못했다. 얼른 들어야지.
왓챠 영화파티는 영화 전문가들의 해설을 들으면서, 채팅으로 소통하면서, 원격으로 동시에 영화를 시청하는 이벤트다. 4월에 한 달 정도 했었고, 지난달부터 다시 하고 있다. 나는 4월에 유튜버 김시선 님과 '우주전쟁'을 봤고, 무비건조(주성철 & 김도훈 평론가) 팀과 '블레이드 러너'를 봤고, 김혜리 기자님과 '그린 나이트'를 봤다. 나보다 훨씬 영화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들과 함께 소통하면서 영화를 본다는 경험이 새로웠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처럼 영화 속에 숨겨두었던 장치나 뒷이야기를 들으면서 영화를 보니 영화가 배로 재밌었고, 영화를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필름클럽 호스트이신 김혜리 기자님의 팬으로서, 기자님이 내 댓글을 읽어주셨을 때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른다.
누군가와 같이 영화를 볼 일이 많았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추천해서 본 적이 많았고, 자연스레 봤던 영화를 다시 보게 됐다. 나는 원래 한 번 본 영화를 다시 안 봤었다. 세상에는 내가 안 본 영화가 너무 많아서, 봤던 영화를 또 볼 시간에 새로운 영화를 보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 본 영화를 다시 보는 즐거움을 깨닫게 되었다. 그냥 그렇다고 생각했던 영화가 시간이 지나고 보니 더 좋아진 경우도 있었고, 인생 영화라고 생각했던 게 그 정도는 아니었구나, 감상이 바뀐 적도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가 한 경험이 달라지고, 그로 인해 영화를 보는 관점과 영화를 통해 느끼는 점도 달라진다는 게 재밌었다. 또 봐도 여전히 좋은 영화가 더 많았고, 그 영화들에서 처음 볼 때는 못 봤던 요소들을 발견하면 그렇게 신날 수 없었다. 이제 영화 한 작품, 한 작품에 대한 글을 써서 올려보려고 하는데, 그러려면 한 영화를 더 자주 봐야 하니 더 신날 것 같다. 내년 목표는 영화 몇 편 보기로 할까. 다시 회사 일이 바빠질 테니 목표를 더 올리지는 못하겠고, 부지런히 노력해서 올해처럼 100편을 채워봐야겠다. 다들 메리-무비-크리스마스 앤 해피-뉴-무비-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