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필름클럽, 여자배구, 그리고 커피
뜨거운 여름의 기세가 한풀 꺾이고 있다. 더위를 많이 타지 않는 나임에도 이번 여름은 유난히 힘들었다. 아마도 여름 방학이 없는 첫해라 그러지 않았나 싶다. 3개월이라는 긴 여름 방학이 있던 대학생에서 이제는 직장인이 되었으니까. 35도가 넘어가는 폭염에도 회사에 가야 하는 슬픈 현실. 이 여름,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 준 것이 세 가지 있다. 무기력한 나를 즐겁게 해 준 김혜리의 필름클럽, 여자배구, 그리고 커피다.
“아이스 카페라테 한 잔이요.”
따가운 햇볕을 피해 들어선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켰다. 자리에 앉아 잠시 멈췄던 팟캐스트를 다시 틀면 나오는 목소리. 몇 달 전부터 즐겨 듣고 있는 김혜리의 필름클럽이다.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라는 드라마를 보고 임수정 배우의 팬이 되었고, 그의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이 팟캐스트를 알게 되었다. 김혜리의 필름클럽은 김혜리 씨네21 기자, 최다은 SBS PD, 그리고 임수정 배우가 영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팟캐스트이다. 워낙에 영화를 좋아하고 씨네21 잡지를 구독하고 있던 터라 망설임 없이 1화를 듣기 시작했다. 결과는 대만족. 매일 흘려보냈던 출퇴근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영화 속 숨겨진 장치에 대한 해석과 다른 청취자들의 감상을 들으면 가만히 있어도 지식이 쑥쑥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아예 몰랐던 영화를 팟캐스트 덕에 보게 된 적도 있고. 2016년 말부터 시작한 팟캐스트이고, 한 회당 기본 1시간이 넘어서 아직 최근 화까지 따라잡으려면 멀었다. 그래도 꾸준히, 아끼면서 들을 예정이다. 언젠가 나만의 필름클럽을 여는 날을 그리면서 말이다.
“너 그 경기 봤어?”
옆자리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어폰을 넘어 들어왔다. 올여름. 많은 사람들을 열광하게 한 스포츠, 도쿄 올림픽 여자배구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 역시 가슴 졸이며 여자배구 경기를 모두 챙겨봤다.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던 상대를 하나의 팀이 되어 이겨 나가는 모습이 놀라웠다. 점수를 내던, 내주던 항상 서로 끌어안고 힘을 내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졌다. 몸을 날려 공을 막아내는 투혼에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왜 이제까지 이렇게 재미있고 감동적인 스포츠를 몰랐을까. 이제부터라도 여자배구 팬이 되어 국내 리그 경기를 보러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많은 선수가 고생했지만, 그 중심에는 주장 김연경 선수가 있었다. 압도적인 실력으로 대표팀의 점수를 책임지는 것은 물론, 뛰어난 리더십으로 어수선했던 팀을 하나의 팀으로 만들었다. 멋진 사람, 닮고 싶은 사람이다. 김연경 선수의 유튜브 채널이 있어서 구독 버튼을 눌렀다. 영상을 하나씩 보는데, 이 언니, 멋지기만 한 게 아니라 귀엽고, 웃기고 다 한다. 김연경 선수를 비롯한 12명의 선수들 덕에 올여름, 정말 행복했다.
“주문하신 아이스 카페라테 나왔습니다.”
어느새 나온 커피를 받아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입 쭉 들이키면 느껴지는 씁쓸하면서도 시원한 맛. 온몸으로 카페인이 퍼져 나간다. 머리가 맑아지는 이 느낌, 내가 커피를 좋아하는 이유다. 대학교에 가기 전엔 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았다. 쓴 걸 안 좋아해서 카페에 가면 아이스초코를 주로 골랐고, 가끔 캐러멜 마키아토 정도 마시는 수준이었다. 내 입맛을 바꿔놓은 건 바로 지옥의 전공 공부. 시험공부를 하다 보면 하루에 서너 잔씩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일쑤였다. 잠 깨려고 마시는 일종의 생명수였지만, 그 생명수의 맛에 중독되어버린 나. 졸업할 때쯤 되니 역류성 후두염에 걸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 때문에 커피를 거의 끊다시피 했고, 최근 들어서야 하루에 한 잔 정도만 마시고 있다. 못 마실 때를 겪고 나니 그 한 잔이 정말로 소중하게 느껴진다. 나의 소중한 커피 덕분에 이번 여름을 시원하게 보냈다.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벌써 여름이네’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벌써 가을이네’ 할 시간이 됐다. 코로나 때문에 제대로 된 여름휴가도 가지 못했다. 축축 쳐졌던 이 여름. 김혜리의 필름클럽, 여자배구, 그리고 커피가 없었다면 쳐지는 걸 넘어 우울했을지도 모르겠다. 고맙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