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북] 영화. 피터 패럴리 감독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 느낌을 한 줄로 적자면 머리와 마음을 한가득 채워주는 영화였다. 그리고 운전기사 토니와 그를 고용한 돈 셜리가 가까워지는 과정이 인간미가 넘쳐서 괜히 한자리 앉고 싶었다.
성숙하지 않았던 처음, 그리고 서로의 빈틈을 채워주는 극과 극의 성향을 가진 둘. 1962년 미국을 빼고 각 인물로 바라본다면 우리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어른들의 성장 영화로도 보였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어른, 그리고 진정한 나로 향해 가는 길.
토니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츤데레’다. 거친 입담과 주먹이 먼저 나가지만 알고 보면 계약서에 있는 내용은 누구보다 철저하게 지키며 두 달간의 스케줄 동안 아내에게 편지 한번 까먹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키스해 주라는 말과 함께.
그에 반해 돈 셜리는 욕 한마디 못하는 신사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스스로가 원했던 모습이 아닌 흑인이 세상과 맞서기 위해 선택한 무기로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여유로운 신사가 아닌, 항상 눈치 보고 어딘가에 갇힌 신사로 보였다.
이러한 느낌을 영화 속 토니도 같이 느꼈는지 그 모습을 떨쳐주려 한다.
돈 셜리의 모습이 낯설지만은 않아 토니를 응원하게 된다.
돈 셜리가 나와 다르지 않다고 확신한 장면이 하나 있는데, 토니의 권유로 둘은 달리는 차 안에서 치킨 뼈다귀를 창밖으로 집어던진다. 그러다 토니가 음료수 컵까지 던져버린다. 그렇게 장면이 지나가는 듯했다. ‘설마 쓰레기 버린 채로 이렇게 지나간다고?’ 생각하는 찰나, 차가 후진하며 쓰레기를 줍는다.
분명 돈 셜리가 토니에게 쓰레기를 주우라고 했을 것이다. 그 모습에 실소가 터졌다. 돈 셜리의 자리에 내가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서 ‘쓰레기는 당연히 주워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한번 더 든다면 그건 또 한 명의 돈 셜리일 것이다. 왜냐하면 토니는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했으니까.
차에서 담요 없이 지내지 못했던 돈 셜리가 맨손으로 치킨을 먹고 창밖으로 던지기까지. 돈 셜리의 변화를 알리는 장면이었다.
토니의 변화도 인상 깊다.
영화 초반부에 흑인 수리공들이 아내 돌로레스가 건내준 물을 마시고 집을 나간다. 토니는 그들이 먹던 유리컵을 휴지통에 버린다. 이뿐만 아니라 유색인이란 단어도 쓴다. 그런 토니가 진심이 담긴 피아노 연주로 세상과 맞서는 돈 셜리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빠져든다. 그리고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도와준다는 돈 셜리의 선의를 마다하지 않는다.
토니의 변화는 개인의 성숙뿐만 아니라 세상의 변화도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의 변화는 결코 쉽지 않았다. 두 달간의 스케줄 동안 돈 셜리는 흑인의 차별에 곤욕을 치른다. 반대로 토니는 돈 셜리에게 흑인이지만 궁궐에 살고 있다며 자신은 백인인데도 바등거리며 살고 있다고 다툰다. 이런 비슷한 다툼은 영화 내내 나오는데 ‘흑인 다움과 백인 다움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계속 던지는 듯했다.
그렇게 영화 끝자락에 돈 셜리가 흑인 차별에 더이상 참지 않고 마지막 공연을 펑크 낸뒤, 토니와 함께 흑인 바인 ‘오렌지 버드’로 향한다. 거기서 돈 셜리는 멋진 복장 덕에 무대에 설 기회를 가진다. 처음엔 혼자서 클래식인 ‘쇼팽의 에튀드’를 연주한다. 곡이 끝나고 바 밴드들과 함께 ‘backwood blues’ 재즈를 치는데 일어서서 칠 정도로 지금까지의 피아노 연주 중 가장 즐긴다.
여태 돈 셜리는 피아노로 흑인에 대한 편견을 깨려 했지만, 결국은 백인을 흉내 낸 모습뿐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듯했다. 진정으로 편견을 깨는 것은 흑인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재즈가 백인들에게 전해졌을 때가 아닐까. 그에 따라 차별이 없다는 건 '흑인은 이렇다. 백인은 저렇다.' 인종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닌, 그냥 한 사람으로서 인정하는 것이라고 느껴졌다. 개개인을 인정하는 것 또한 진정한 나로 가는 길이니까.
그렇게 크리스마스이브까지 도착하겠다는 토니의 아내 돌로레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눈보라 속에서 토니는 운전을 한다. 시간이 지나 체력의 한계에 다다른 토니를 위해 돈 셜리가 대신 운전을 해준다.
차에선 더 이상의 차별은 없었고 진정한 어른들의 평등한 우정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