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장편 소설
평소 건강상 이유로 채식에 관심이 있던 나는 [채식주의자]란 제목으로 편견에 빠져 책을 읽었고, 마지막장을 넘기는데 여러 생각들이 뒤엉켰다. 생각들을 가라앉히려 잠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가라앉은 어둠 속에서 떠오른 문장은 [모든 생명은 다르지 않다]였다.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왜 우리는 우리고 그들은 그들일 뿐일까]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질문을 종종 던지곤 했다. [채식주의자]는 그 질문에 또렷한 답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듯했다.
채식주의자는 총 3부작으로 나뉜다.
1부 [채식주의자]는 영혜가 채식주의를 결심한 것. (영혜 시점)
2부 [몽고반점]으로 넘어가며 식물 또한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것. (형부 시점)
마지막으로 3부 [나무불꽃]에서는 모든 생명은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언니 시점)
1부 [채식주의자]에 영혜가 피에 섞인 악몽을 꾸고 나서 자신의 심정을 얘기하는 것들이 있다.
특히 그중에 내 가슴을 관통하며 그대로 스며든 구절들이 있다.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어. 그게 뭔지 몰라. 언제나 그게 거기 멈춰 있어.]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그들의 고통이 가슴에 와닿으면서도 입으로 고기를 집어넣는 나 자신과의 괴리감에서 오는 고통.
그런 고통들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죄의식을 만든다. 그래서 나도 잠깐 채식주의를 실천해보려고 한 적이 있다. 영혜도 이런 비슷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영혜를 온전히 이해해 주는 인물은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그러한 환경에서 영혜는 죄책감에 시달려 스스로 갉아먹으며 변해간 게 아닐까. 가까운 인물들 중 한 사람이라도 영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줬다면 영혜가 조금은 평범해 보이지 않았을까.
2부[몽고반점]에서 형부는 꽃이 그려진 남녀의 몸이 서로 뒤엉키는 작품을 만든다. 그러다 점점 창작의 욕구가 올라와 영혜와 교접 장면까지 찍게 된다. 이 내용이 꾀나 머리 아프게 만들었다.
허용되지 않는 관계. 엉덩이에 있는 꽃과 성기에 있는 꽃이 만나는 것.
하지만 3부에서 [영혜가 거꾸로 서서 온몸을 활짝 폈을 때]라는 구절을 읽는 순간, 꽃잎이 활짝 피는 모습이 떠올랐다. 팔은 뿌리이며 다리는 꽃잎이고 엉덩이와 성기는 암술과 수술일 뿐이었다. 그들은 뒤엉킨 어떠한 관계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라고 느껴졌다.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라는 대사에서도 꽃들이 언니, 형부, 처제를 나누지 않듯, 꽃이 그려져 있는 그들은 그저 ‘하나의 존재’라는 말을 하는 듯했다.
1부에서 특별해 보이던 영혜는 2부에선 그저 꽃 한송이었다.
3부[나무불꽃]에서 영혜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야윈 몸으로 물구나무를 서서 어떠한 곳에 집중한다. 자신은 이제 동물이 아니라며 물만 있으면 된다고 한다. [비에 녹아서……전부 녹아서……땅속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어. 다시 거꾸로 돋아나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거든]이라며 삶과 죽음, 이 모든 것은 결국 순환일 뿐이라는 듯이 그들의 모습을 빌려 자연으로 돌아가려 하는 것 같았다.
반면 언니는 언젠가 사는 게 아니라 견디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무의미함 속에서 살아간다.
자신은 오래전부터 죽어있었으며 삶은 연극이었고, 현실적으로 다가왔다고 믿은 죽음은 낯설지 않은 존재라고 한다. 그날 사람이 없는 새벽 산을 오르며 [자신을 집어삼키는 구멍 같은 고통을, 격렬한 두려움을, 거기 동시에 배어든 이상한 평화를 그녀는 느꼈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곳에서는 살아있음을 느끼는 듯했다. 또한 영혜와의 일이 있고 난 뒤, 집을 나간 남편이 평소 욕조에 웅크려 있던 것을 따라 해보며 이유를 알 것 같다고 한다. 이 모습들은 영혜와 원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언니에겐 아들 지우가 있다. 만약 지우가 없었더라면 언니 또한 영혜처럼 변했을까?
어릴 때부터 아버지란 세상, 남편의 세상, 그리고 지금의 세상에 수긍하며 사는 언니조차 영혜와 크게 다르지 않다면 세상과 영혜는 다르지 않다는 말 아닐까.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를 계속 아기 같다고 표현하는 것은 어느 한쪽의 입장이 아닌 생명의 본질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 페이지쯤 언니가 남편과 영혜의 영상을 생각한다. 생각할수록 두 사람의 모습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닌 듯, 흡사 사람에서 벗어 나오려는 몸부림처럼 보인다고 한다. 이어서 아들 지우가 하늘에서 나는 하얀 새한테서 ‘엄마다’라고 소리가 들렸다며 몸에서 팔이 두 개 나왔다는 꿈을 꿨다고 한다.
우리가 정의해 놓은 사람이라는 것이 동물. 식물이 될 수 있고, 동물이 사람. 식물이 될 수 있고, 식물이 사람. 동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면 지금이랑은 다른 시선이 나오지 않을까.
나는 ‘그들이 불쌍하다, 슬프다’ 등 이런 감정들에서 ‘존중한다’라고 바꿔 말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