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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나나나 Oct 04. 2020

짝사랑 4 : 런던

해가 떴다 축축한 비가 내리다 해가 다시 뜨고 비가 다시 내리던 날, 넌 런던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영국은 비가 왔다가 해가 떴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날씨가 바뀐대. 재밌을 거 같아.” 뭐가 재미있다는 건지 난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가 왔다가 해가 떴다가 날씨가 자꾸 바뀌면 우산을 매일 챙겨 다녀야 하고, 기분도 하루에 몇 번씩 오락가락할 거고, 그럼 어떤 것도 예측할 수가 없는 거잖아. 그리고 네가 가면 난 널 대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봐. 너 없이 여기 홀로 남겨지면 난 대체 얼마나 널 그리워해야 하는 거야. 


넌 멀리 창 밖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래서 날이 맑을 땐 하늘이 그렇게 예쁘대. 그럴 때 공원에 누워 있으면 천국이 따로 없다더라.” 나의 천국을 앗아가려는 주제에 넌 참 맑고 예뻤다. 난 그저 아랫입술을 깨물며 빨대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휘휘 저어댔다. 


해가 화창하게 뜬 날, 햇빛이 너무 따사로워 내 심장을 말랑하게 만들던 날, 넌 내 집을 나간 뒤 딱 두 달만에 연락을 했다. 


나갈 때, 넌 다신 여기 찾아올 일이 없을 거라 말했다. 더 이상 내게 민폐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 또 언젠간 이 빚을 갚을 거라고 힘주어 말하곤 뒤돌아 떠나버렸다. 그리고 넌 내게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난 이따금, 아니 아주 자주 네가 떠올라 핸드폰을 뒤적거리다, 온몸을 비틀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어버렸었는데, 넌 내 생각이 한 번도 나질 않았나 보다. 괜히 네게 연락했다 매정한 답변만 받을까 봐, 아니 그 답변마저 받지 못할까 두려워 나도 네게 한 번도 연락하지 못했다. 


그렇게 꼭 두 달이 흐른 뒤, 넌 아주 덤덤한 목소리로 내게 전화했다. “오늘 바빠? 안 바쁘면 나와. 밥 살게.” 애초에 바쁘지도 않았고, 설사 바빴어도 내 대답이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난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섬세하게 그리고 초조하게 준비를 끝마쳤다. 마침 날이 좋으니 아껴두었던 옷을 꺼내 입기 딱 좋았다. 


몇 달 만에 꺼낸 옷과 신발, 정성스럽게 다듬은 머리가 무색하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들떴던 마음이 푹 가라앉았다. 함부로 설레지 말라고, 혼자 신나지 말라고 경고를 받은 기분이었다. 신발장 구석에서 비닐우산을 꺼내 집을 나섰고 첨벙거리는 거리를 홀로 걸어가며 외로이 되뇌었다. 내가 생각하는 설레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일어나도 다시 넌 다시 홀로 남겨질 거야. 다시 축축해질 거야. 혼자 들떠서 스스로를 망치지 마. 어떤 것도 기대하지 마. 


골목 끝 작게 보이는 네가 점점 내 눈에 가득 찰 수록, 난 내 마음을 차갑게 만들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그리고 네가 날 발견한 뒤 살짝 웃었을 땐, 그리고 손을 흔들었을 땐 억지로 차갑게 만든 내 마음이 모두 녹아버렸다. 또 똑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두 달만에 나타나서 이렇게 무장해제시키다니. 자꾸 날 흔드는 널 원망해야 할까, 너에게만 나약한 날 원망해야 할까.


네가 날 데려간 곳은 어느 한적한 한정식 집이었다. 부자스러움을 얼추 흉내 냈으나 고급스러움 대신 가벼움만 느껴지는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앉아 있는 우리 둘은 너무나도 어색했다. 넌 이 가벼운 고급스러움과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고, 난 그런 너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넌 그 가게에서 가장 비싼 메뉴를 시켰다.


“최근에 돈을 좀 벌었어. 돈 생기면 너한테 가장 먼저 밥 사 주고 싶었어. 솔직히 여기 비싼 곳이 아닌 건 아는데, 내가 아는 수준에선 여기가 제일 고급스러운 곳이더라. 다음엔 더 제대로 살게. 나 너한테 갚을 거 많잖아.” 네 말이 내 마음을 쿵하고 내리쳤다. 늘 그렇듯 넌 내게 아무렇지 않은, 다정한 말들로 상처를 남겼다. 넌 내게 뭐 그리 빚이 많은지, 뭐가 그리 갚고 싶은지. 그런 건 하나도 필요 없는데,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데, 내가 왜 이러는지 넌 정말 모르는 걸까.


밥을 먹는 내내 넌 내게 반찬을 챙겨줬다. 내가 먹다 말면 네가 가져다 먹고, 내가 좋아하는 건 내 앞으로 놔주고, 난 그런 네 행동에 다시 기분이 들떠 웃어버리고, 넌 날 따라 웃고, 그러다 네 얼굴에 밥풀이 묻으면 놀렸다가, 이런 반찬은 싫다며 투덜거렸다가, 우린 결국 눈이 마주쳐 다시 웃어버렸다. 음식을 놓아주던 직원도 우릴 따라 웃어버렸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섰을 땐 비가 그쳤다.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맑아졌고 우린 나란히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비올 때 장화 신으면 왠지 더 축축한 거 같아.” “이런 날은 막걸리 마시면 좋은데.” “우리 다음엔 저번에 가기로 했던 곳 가보자.” 바닥은 여전히 축축했지만 우리의 대화는 보송보송했고, 내 마음은 한껏 들떠 몽글몽글해졌다.


카페에 도착해 커피를 시키고 우린 창밖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았다. 커피가 나왔다는 진동벨이 울려 네가 커피를 가져오자 다시 밖에서는 비가 조금씩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늘 날씨 진짜 이상하다.” 내 말에 넌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네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넌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런던에 가고 싶어. 돈이 조금 더 모이면 런던에 가서 살아 보려고.” 




런던에 온 이후로 문득문득 난 이 장면이 떠올렸다. 맑은 날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 비가 쏟아지다 이내 맑아져 버리면, 맑은 날씨에 신나 공원을 거닐다 보면 이 장면이 꼭 떠올렸다. 그러다 보면 저 멀리 손을 흔드는 네가 보였다가, 보이지 않았다. 난 그 전에도 그랬지만 런던에서는 감정 기복이 심해졌다. 날씨에 따라 자꾸 기분이 바뀐다. 넌 분명 재밌을 거라 말했는데, 이상하게 나의 런던은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맑은 날 공원에 누워 예쁘다던 하늘을 보아도 재미가 없었다. 넌 분명 재밌을 거라 말했는데 참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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