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제삿날이다.
우리 집은 큰집이지만, 원래라면 종갓집에서 할아버지 제사까지 지내는 게 맞는데 한번 사이가 틀어지니까 평생 다시 되돌리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증조할아버지부터 할아버지까지 제사는 우리 집에서 지낸다.
이 집은 아주 지독하고 오래도록 우리 엄마를 착취하고 등골을 빨아먹고 있는 집안이란 뜻이다.
어쨌든 우리 집은 아빠 아래로 있는 가족들이라곤 감방에 들어 있는 삼촌이 살아 있는 유일한 형제고, 결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음식은 엄마하고 할머니가 해야 한다. 그래, 그냥 우리 엄마가 다 한다는 소리다. 또.
원래라면 내가 도와주는 게 맞지만 나는 외국에 있고 우리 엄마는 내가 본인을 도와주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고생하는 꼴을 못 보고 있어서 그렇다. 당신이 시집 와서 평생을 해 오던 그 일을, 그 시집살이라는 종 노릇을 하나밖에 없는 딸이 물려받는 꼴은 죽어도 못 보겠단다.
내가 스물이 넘어서 미성년자 딱지를 떼자 우리 집은 내 의견을 투정이나 응석, 혹은 반항으로 보지 않고 발언으로 봐 줬다. 웃기고 앉아 있는 처사가 아닌가. 나는 어릴 때부터 내 목소리로 말해 왔는데 이제서야 그걸 내 목소리라고 인정해 준다. 하여튼 그래서 이제 우리 집은 튀김을 사기로 했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제삿날이나 명절 때마다 소위 지랄을 떨 예정이다.
집안에 손이라고는 나밖에 없어서 나는 제사상에 아빠하고 같이 절하는 호사를 누린다. 예전에는 절만 했고, 이제는 잔도 치고 숟가락이나 젓가락도 상에 세 번 턱턱턱 치고 한다. 이것도 내가 스물이 넘어서야 하게 된 일이다. 아니, 이건 사실 엄마가 집안사람들-해봐야 아빠하고 할머니-한테 아들이 아니라도 자식이라고 알려줘서다.
어쨌든 그렇게 다시 돌아온 할아버지 제삿날이다.
나는 절을 하면서 생각한다. 음식이 너무 많다. 할아버지는 저 중에 반도 다 못 먹고 돌아가실 거다. 아니, 애초에 나는 죽은 자에게 왜 음식을 줘야 하는지 모르겠다. 저승은 여기하고 다르다. 정성을 보여 달라지만 정성은 굳이 가부장적 여성 노동 착취 구조에서 쥐어짜낸 상 위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다시 절을 하면서 생각한다. 엄마는 할아버지한테 소원을 빌라고 한다. 아주 예전에 트위터에서 읽은 구절이 그랬다. 조상 덕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옛저녁에 이런 제삿상이니 차례상이 다 뭐냐 명절 연휴에 뻔질나게 해외 여행 다니고 있을 거다. 그 사람들이 조상 덕을 보고 있는 거라고는 생각 안 한다. 조상 덕은 악습을 없애고 지금 당장 내 새끼들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만들어낸 더 나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집 조상 덕은 나도 했으니 너도 하라는 되물림밖에 없는 것 같다. 나도 이렇게 고생해 봤으니, 너도 고생해 보고, 네 새끼도 고생해서 나중에 저승에서 제삿밥 받아 먹는 것.
그러면 조상 덕을 보는 대상은 결국 내가 아니고 조상 아닌가?
우리는 죽어서까지 우리 집에만 좋은 일을 해야 한다.
나는 내가 좋은 일을 하고 싶다. 나는 내 엄마한테 좋은 일을 하고 싶고, 내 아빠가 행복해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 우리 집이 일어선다고 해서 내가 일어선다는 건 아니다. 나는 어떤 가문의 어떤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어떤 인간인데, 알고 보니 어떤 가문인 사람이 되고 싶다.
한국은 이상하다. 우리 집은 이상하고, 나는 우리 집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나를 낳아 준 부모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엄마랑 아빠는 이혼을 했으면 좋겠고, 나는 아빠가 엄마랑 나에게 가지고 있는 책임감으로 살아가는 것을 그만뒀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책임감으로만 살 수 없다. 우리 아빠는 사랑을 이상한 방법으로 실천한다. 그래서 이제는 그게 사랑이 아니라는 것까지 판단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 엄마는 아빠를 사랑하지 않는다. 결혼은 사랑만으로 이어져나가지 않지만, 사랑이 없는 것은 중대한 문제다. 우리 집에 남아 있는 사랑이라고는 나를 향한 사랑밖에 없다. 나는 엄마를 사랑하고, 아빠를 사랑하지만 내 부모님 두 사람을 하나로 묶어서 사랑하지는 않는다.
둘은 언젠가부터 연인이 아니고 내 부모로만 남아 있다.
가끔 사실은 너무 아프다. 담담하게 슬픔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 사람은 사실을 피하려고 하고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 버린다.
그러면 사실이 사실이 아닌 게 되나?
나는 지금 좀 행복했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내가, 우리 엄마가, 우리 아빠가. 이것만 지나가면, 이 일만 해결되면, 돈이 조금 더 모이면, 내가 학교 졸업을 하면, 취직을 하면, 집이 팔리면.
언제까지 행복을 미뤄야 할까.
아마 그러면 내 제삿날이 올 거다.
내가 죽었을 때 내 제사를 지내 줄 만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아이를 낳지 않을 생각이며 아주 만약 내게 아이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내 대에서 제사라는 악습은 끊길 것이다.-그 사람들에게 신신당부할 생각이다. 나를 바다에 뿌리지도 말고, 땅에 묻지도 말고, 납골당처럼 차가운 대리석에 처박아 두지도 말라고. 화장터에 들어가면 그렇게 생이 끝난 거니까, 나를 기억할 거면 실로 만든 팔찌 하나를 만들어 놓고 그걸 보며 기억하라고.
아마 그러면 내 제삿날은 없어질 거다.
아무도 죽어버린 내가 먹을지 먹지 않을지도 모를 상을 차려 놓고, 무릎 아프고 성가시게 절을 하는 날은 없어질 거다. 우리 엄마도, 우리 할머니도, 주방에 처박혀 하루 종일 튀김을 튀기고 전을 부치고, 탕국을 끓이는 그 노예 같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바로 내 제삿날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