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릴 적 꿈은 '선생님'이었다. 정말 어릴 때는 칠판에 분필로 끄적끄적 무언가를 쓸 수 있는 게 좋았다.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원하는 대로 마음껏 칠판에 무언가를 쓸 수 있으니까. 그래서 부모님께 어린 마음에 벽 전체를 초록색 칠판으로 만들어달라고 조르기도 했지만, 분필 가루가 몸에 좋지 않아 아주 작은 화이트보드를 사주셨다. 하루가 멀다 하고 혼자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하고 내 방에서 선생님의 말투나 행동, 그리고 글을 쓰는 모습까지 따라 했다. 하루는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을 앉혀놓고 또 어느 날은 인형을 세워두고 그렇게 말이다.
그러다 점점 성장하면서 나는 친구들 앞에서 발표하는 게 이렇게 덜덜 떨리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저렇게 떨지 않고 말을 할 수 있는지 신기하면서 존경심이 생겼다. 학창 시절 내가 직접 피부로 느끼면서 경험했던 직업은 '선생님'뿐이라 그래서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건가 싶다가도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가진 것을 나눠줄 때 비로소 나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행복했다.
사실 어릴 때부터 잘하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성격이 활발해 친구들로부터 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운동을 잘해 반 1등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도 못했고, 예쁘지도 공부를 잘하지도 않았기에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는 일이 없었다. 이런 이유였을까. 타인의 시선에서 완벽하게 헤어 나올 수 없고, 타인의 인정이 곧 나의 목표가 되기도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수도 있고.
내가 할 줄 아는 단 하나의 능력, 중국어를 활용할 수 있는 곳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마음이었고, 대학 졸업 후 아무 연고가 없는 낯선 이곳으로 상경하게 되었다. 이 회사가 곧 나의 목표였고, 그렇게 나는 이 회사에 평생 함께 할 줄 알았다. 회사는 대학교가 아니었다. 내가 잘하는 것만 할 수 없었고, 못하는 것도 잘 해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면 늘 위축되었다. '첫 회사이고 신입사원이니까 그럴 수 있지'라는 말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3년 차가 되었을 때, 혹은 나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가진 후배 직원들을 볼 때면 내 가치는 한없이 땅바닥으로 내려쳤다. 그렇게 나는 점점 몸까지 아파지게 되었다. 그렇게 평생일 줄 알았던 직원과, 평생일 줄 알았던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온전히 나를 지키기 위해, 내가 잘하는 것을 다시 찾기 위해 말이다.
쉽지 않았다. 다음 달 당장 내야 하는 월세와 생활비에 대한 두려움과, 받은 퇴직금으로 생활하자는 찰나의 안도감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우연히 지인의 추천으로 시작한 중국어과외가 제2의 삶을 살 수 있게 했다. 수업을 하는 이 공간과 이 시간이 좋았다. 아니, 행복했다.
그렇게 나는 다짐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잘하는 것으로 만들고 싶었기에 더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교육대학원을 진학하게 되었다. 석사생이라는 신분으로 예상치 못한 기회들이 찾아왔다. 오전에는 대기업 회사에서 번역 업무를, 낮에는 개인 과외를, 저녁에는 석사생으로 돌아와 학업에 충실했고, 주말에는 인터넷 강사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잘하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니 프로N잡러의 삶을 살 수 있었달까. 정말 밥 먹을 여유 없이 바쁜 나날들도 있었지만, 행복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어릴 적 학교 선생님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거지.
첫 교생 실습날, 교실에 딱 들어서자마자 엄청난 짜릿함을 느꼈다. '아, 내가 있을 곳은 여기다!' 꿈과 목표를 찾은 느낌이랄까? 그렇게 2년 반동안의 석사 생활을 마치고 바로 학교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순조롭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사교육의 경험들은 인정해주지 않았기에 무경력으로 날 바라봤고, 그러니 수없이 탈락의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더니, 지금의 학교에서 자리할 수 있게 되었고, 바라만 봐도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하는 순수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반대로, 그럼에도 내가 계속 회사를 다녔다면? 내가 좋아하는 것에서 잘하기 위해 개인 과외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을까. 괜스레 과거에 무모한 선택을 했던 나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