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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걱정 많은 아저씨 Mar 24. 2024

기준은 한계가 명확하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이천이십사 년. 280. _ 후기

  

 기준은 한계가 명확하다. 하여, 해당 기준이 설정되는 자연환경과 시대에 따른 기술 및 문화 수준과 이를 적용하는 대상과 이용자에 따라서 지속적으로 조정되고 수정 보완되어야 한다.


 일상생활에서는 미터법의 기준 중에서 미터, 센티미터, 밀리미터면 충분하지만, 첨단과학기술 분야에서는 마이크로미터, 나노미터, 피코미터도 필요하다. 처음부터 이런 고정밀 단위가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러한 기준들의 필요성이 발생하고 이에 따라 이런 기준들이 추가, 수정 보완 되어 왔을 것이다.


 지금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폐기물을 버리는 방법이 있다. 자원순환이라는 전제 아래 재활용을 쉽게 하도록 우리가 선출한 행정부가 정하는 방침에 따라 플라스틱과 종이, 음식물과 같은 폐기물들을 버리고 있는데, 만약 플라스틱 제품을 사용 후, 제조 이전의 원유 상태로 온전하게 되돌릴 수 있는 기술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면 폐기물 처리 방식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일이 될 것이다. 물론 나 살아생전에는 불가능하겠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전 국민의 행사, 선거’를 생각해 봐도 그렇다. 매일 마주하는 좋은 경험과 맘에 안 드는 것들을 잘 종합해서 담아 두었다가, 몇 년에 한 번씩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제시된 정당과 후보자들 사이에서, 마음에 쏙 들지 않더라도 ‘최선과 차악’을 고민해서 골라야 한다.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대한민국 사회에서 아는 바가 한 줌도 안 되는 나에게는 피할 수 없는 선택 같기도 하다.     

 그래도 여러 분야에서 연구하고, 실천하고, 좌절하고, 개선해 온 경험이 축적된 신뢰할 수 있는 ‘대리인’을 나 대신 내세울 수 있는 ‘권리’가 '시민'으로서 주어진다. 반면, 나와 같은 시민들의 가장 많은 선택을 받아 선출된 ‘권력’에 나의 다양한 권리를 '일임'하고 '대리'하게 하며, 그렇게 선출된 대리인들을 통해 ‘결정된 일’을 따라야 하는 '의무'가 따라온다.      


  ‘물은 1 기압, 섭씨 100도’에서 끓는다.

 단순하지만 명확하게 확인된 비교적 확한 기준이자 자연현상이다.

 그리고 끓는 물은 인체에 화상을 일으킬 수 있기에, 인간이 목욕이나 물놀이로 직접 다루고 접하기에 안전한 온도는 100도보다 충분히 낮은 기준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안전과 건강 관련된 문제는 항상 보수적이고 안정적으로 정해져야 하고, 불명확한 쟁점이 남아있거나 더 밝혀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시간과 노력을 들여 다양하게 검토해 보고, 충분하게 많은 수의 시민이 그 실용성과 위험성 및 다양한 의견수렴과 검토의 과정을 거쳐 사회가 타당하게 공감할 만한 기준을 정해야 한다.     


 만약, 물이 1 기압 섭씨 100도에서 끓지 않는다고, 100도에서도 안전하다고 어떤 전문가, 혹은 우리의 대리인이 주장한다면, 다른 시민들과 동료 전문가들이 이를 검증해야 하며, 그들의 주장이 실수였는지, 고의였는지를 밝히고, 실수였다면 질책과 경고를, 고의였다면 ‘기만’의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 절대다수가 동의할 수 없는 것을 실수였다며 변명하고, 불순한 목적을 가린 채 기만하여 진실인 양, 강제하는 권력이 있다면 응징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발전해 왔다.  

   

 ‘물의 끓는점’과 같은 비교적 단순 명쾌한 자연현상을 두고도 다양한 논점들이 나타날 수 있듯이, 태양계에서 지구가 중심인지 태양이 중심인지와 같은 ‘천체구조’를 확인하고 받아들이는데 ‘종교’라는 요소가 ‘하나만 더’ 고려되어도, ‘새로운 사실과 관점’의 ‘보편적 적용’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어려운 일이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자연현상, 그리고 천체의 관찰과 규명과 같은 새로운 사실도 이럴진대, 각기 다른 시간과 환경을 살아온 사람들 사이의 역사, 사회, 문화적인 요소들이 중첩, 결합되어 수렴되고 기준으로 세워지는 것은 하나일 수도 절대적인 끝이 있을 수도 없다.    

 

 이러한 과정은 기껏해야 40살이 넘은 내 인생에서 시작된 것도 ‘대의민주주의’라는 제도를 통해서만 실현된 것도 아니고, 나와 우리의 대한민국, 그리고 그 이전의 조선-고려시대보다도 아주 오래전부터 이루어져 왔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는 인간과 인간, 남과 여가 평등함을 제도적으로 확립한 것은 오히려 백 년 안팎의 일이며, 오늘날에도 이 당연한 제도의 한계를 발견하고, 지속해서 수정 보완하고 있는 인류를 보면, 불완전한 오류투성이의 인간들이 한계를 인정하고 이를 보완하고자 만든 대의민주주의야는 그야말로 불완전하고 무가치하다고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내 인생, 100년도 안 될 테니 무가치한 거라 치부하지 않을 거라면, 내가 살아온 게 대단하진 않더라도 조금씩 나아질 것이고 내 아이들은 지금보다는 좀 더 나은 세상에 살게 되기를 바란다면, 이런 불완전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느려터진 ‘변화의 선택’이라도 성실하고 빠짐없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대로 부지런히 만들어 가야 한다.

      

 ‘기준’에 기대지 말고 기준을 남용하지 말자.  기준이 우리를 가르는 잣대 따위에 그치게 하지 않길, 오히려 삶을 바르게 세우는 좋은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인간이 되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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