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경은 중저음에 유난히 작은 목소리를 가졌다. 조용하고 차분한 어조를 가진 그녀는 지적이라는 칭찬 아닌 칭찬을 받을 때도 있지만, 반대로 목소리에 너무 힘이 없다, 말소리가 잘 안 들리니 좀 크게 말해달라는 요구도 종종 듣는다. 선천적으로 작은 목소리에 단전에 힘을 주고 말하는 습관을 못 들인 탓인가, 수경이 목소리를 크게 내다보면, 가족들에게 "왜 화를 내느냐"는 오해를 받곤 했다. 화난 게 아니라고 변명을 하면, 가족들은 "그럼 왜 언성을 높이느냐"며 못마땅한 표정들을 지었다.
강 여사의 귀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을 때, 식구들은 서둘러 보청기를 해드렸다. 강 여사 정도의 난청은 보청기만 잘 사용하면 아무 문제없을 거라고 했다. 지금 와 생각해보니, 수경을 비롯한 식구들이 참 무심했다. 보청기를 해드렸으니, 강 여사의 난청이 다 해결됐다고 생각하고 각자의 일에 몰두하느라 더는 강 여사의 난청에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강 여사의 난청은 크게 심각하지 않았다. 식구들과 대화하는데 별 문제가 없는 정도였으니까.
"어머니, 그동안 잘 지내셨죠?"
파리에서 한 달 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수경이 시어머니와 반가운 인사를 나눌 때, 어딘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시어머니를 배려하느라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던 수경은 대화가 자꾸 엇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냐고 물으면, 며칠 쉬었다가 김치를 담그자는 답변이 돌아왔고, 선물 보따리를 풀어놓고 제일 마음에 드시는 걸 고르시라고 하면, 웬 선물을 이렇게 많이 사 왔냐며 선물들을 모두 챙기고 계셨다. 왜 저러시지? 수경은 불안한 시선으로 시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강 여사의 귀에는 거금을 들여 해들인 보청기가 없었다.
"어머니, 왜 보청기를 안 쓰세요?"
"그거 못 쓰겠더라.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너무 심해."
"그럼, 저랑 이비인후과에 가실래요? 전문가가 봐주면 나을 것 같아요."
"뭐하러? 아이고 귀찮다. 나, 보청기 없어도 사는데 아무 지장 없다. 늙으면 좀 안 들리는 거 그게 다 자연의 이치야. 늙어서 좀 덜 보고 덜 들어야 맘 편히 살지."
너무도 당당한 강 여사의 주장에 수경은 할 말을 잃었다. 쓰지도 않을 거면서 왜 보청기를 하셨는지 이해가 안 갔다. 병원 가기 싫다는 시어머니를 억지로 끌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수경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번이나 시어머니를 설득했으나 보청기를 하기 싫다는 강 여사의 뜻은 요지부동이었다. 에잇! 모르겠다. 수경은 "나이 들어서는 조금 덜 들어야 마음이 편하다"는 강 여사의 말에 수긍하며, 그렇게 보청기 문제를 흘려버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강 여사의 귀는 점점 기능을 잃어갔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씩씩하게 복지관에 다니며 즐거운 삶을 이어갔다. 잘 안 들리면 안 들리는 대로 살겠다는 의지가 정말 강했다. 이렇게 그녀는 천하태평이었지만 가족들은 난감했다. 강 여사에게 말을 하려면 힘껏 목청을 높여야 했다. 평소 목소리가 큰 수경의 남편도 힘들어할 정도였으니, 목소리가 작은 수경은 시어머니와 이야기를 할 때마다 본의 아니게 언성을 높여야 했다.
"아이구구 무서워라. 알았으니까 화 좀 그만 내라."
수경이 분리수거를 엉망으로 망쳐놓은 시어머니한테 제대로 분리수거를 하는 방법을 설명할 때였다. 큰 목소리로 말해야 겨우 의사소통이 되는 상황이라 목소리를 높이다 보니, 수경이 꼭 화를 내는 것으로 느껴졌는지 강 여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아들이 거실로 나오던 완벽한 타이밍에 잔뜩 겁먹은 얼굴로 이렇게 결정적인 멘트를 날렸다.
"당신. 나 좀 봐."
남편이 잔뜩 굳은 얼굴로 수경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렇게 시작된 부부싸움은 수경이 눈물바람을 하고 나서야 끝났다. 수경도 안다. 딱 오해받기 쉬운 상황이었다는 것을. 그녀라도 남편이 친정엄마에게 언성을 높였다면 앞뒤 안 가리고 싸우자고 덤벼들었을 것을. 문제는 이런 부부싸움이, 부부싸움까지는 아니더라도 갈등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야속하게도 강 여사는 분란을 일으키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쏙 그 자리를 빠져나가곤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어머니의 총기는 점점 사라져 갔고, 크고 작은 사고를 저지르는 빈도가 잦아졌으며, 그에 따라 수경이 목청을 돋울 일이 늘어갔다. 이는 곧 수경 부부의 갈등으로 이어졌으니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수경과 강 여사의 대화도 점점 줄었다. 자꾸 깜빡 깜박하는 시어머니가 안타까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수경은 크고 작은 오해에 휘말리면서 점점 말수를 잃어갔다. 그래도 한 공간에서 살다 보면 필요한 말들이 생겼고, 그럴 때마다 수경은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왜, 하필 목소리 작은 그녀가 귀 안 들리는 시어머니랑 이렇게 지지고 볶아야 하는지, 속상했다. 그러던 어느 추석 날이었다. 아들, 딸들, 사위들, 며느리, 손주들에게 둘러싸여 마냥 행복해하던 강 여사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이 뭐라고 떠드는지, 소리가 웅웅거려서 잘 안 들려. 그래도 우리 새아기 소리는 잘 들려서 참 다행이야. 하하하"
어이쿠! 수경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수시로 그녀를 분란으로 밀어 넣는 강 여사가, 아이처럼 천진하게 웃는 시어머니가 그날은 왠지 친근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그녀도 참 못 말린다 싶었다. 에고고 내 팔자야... 수경의 입가로 웃픈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