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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Jun 25. 2023

세렌디피티?

오스트리아 비엔나->잘츠부르크->인스브루크->스위스 뮈렌

    세렌디피티?   

        

  #그녀를 만난 곳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중앙묘지였어. 여행하기 좋은 곳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묘지에 갔냐고? 아침부터 잔뜩 흐린 회색빛 하늘 때문이었던 것 같아. 이런 날씨엔 죽은 자들의 땅을 찾는 게 딱 어울리겠다 싶었거든. 그곳은 내가 한때, 불같은 열정으로 좋아했던 베토벤의 묘지와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듣던 브람스가 묻혀 있는 곳이니까. 베토벤의 묘 앞에 한동안 서 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지더군. 이곳에 오기를 참 잘했다 싶은 마음도 들었어. 그렇게 한동안 베토벤의 묘에서 그를 추모한 뒤, 브람스의 묘로 갔지. 고이 잠든 브람스를 바라보며, 평소에 즐겨 듣던 ‘헝가리 무곡’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어. 블랙진바지에 연한 베이지색 스웨터를 입은 여자가 ‘봄의 왈츠’를 흥얼거리며 요한 슈트라우스의 묘로 다가왔어. 나란히 자리한 브람스와 요한 슈트라우스의 묘 앞에서 그렇게 난 그녀와 마주쳤지. 그녀가 나를 의식했는지, 흥얼거리던 노래를 멈추며 슬쩍 나를 훔쳐보더군. 우리 사이에 살짝 어색한 기운이 돌았어. 서로를 의식한 우리는 슬쩍슬쩍 서로를 흘끔거렸어. 분위기 상 그녀는 혼자 여행 중인 한국여자가 분명했는데, 어쩐지 인사를 건네기엔 좀 어색했어. “안녕하세요. 한국 분이시죠?” 이 한마디가 뭐라고, 영 용기가 나지 않았어. 말을 걸어볼까 말까 망설이는데, 갑자기 그녀가 홱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나는 거야. 나뭇가지에 앉았던 새가 뽀르르 날아가듯 말이야. 바보같이 소심한 나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어. 파도처럼 아쉬움이 밀려왔지만 어쩔 수 없었지.     



  #그녀를 다시 만난 곳은 잘츠부르크 미라벨 궁전이었어. 비엔나를 떠나 잘츠부르크에 도착한 나는 제일 먼저 화려한 꽃들이 만발한 미라벨 궁전으로 향했지. 엄마, 아빠가 가끔씩 꺼내보시던  추억의 명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마리아가 아이들과 ‘도레미송’을 부르던 곳이 궁금했거든. 궁전 정원을 거닐며 참 행복했어. 살랑살랑 바람결을 따라 스치는 꽃향기가 나를 기분 좋게 감싸 안아줘서 정말 좋았지. 여기저기 만발한 꽃들 사이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즐겁더라고. 이렇게 나른한 기분으로 정원을 거닐 때였어. 어디선가 맑고 경쾌한 노랫소리가 들렸어. 소리를 따라가 보니, 관광객들이 모여 ‘도레미송’을 부르고 있더군. 분위기를 보니, 방금 만난 사람들끼리 즉흥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은데, 노래 솜씨가 수준급이야. 영화에서 마리아와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신나서 노래하고 춤추는 무리들을 바라보는데, 어! 그녀가 거기 있는 거야. 하늘하늘한 시폰 원피스를 입고 뮤지컬 배우처럼 노래를 부르는 여자. 비엔나 중앙묘지에서 마주쳤던 그녀가 분명했어.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인사를 건네려는데 아차! 싶더라. 혹시, 그녀가 나를 몰라보면 어떡하나 싶었지. 급 자신감을 잃은 나는 조용히 돌아섰어. 그래, 지금은 참자. 한 번 더 만나면 그때 아는 척하자. 삼 세 번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정말 한 번 더 만나면, 그때는 인연이라 생각하고 꼭 인사를 건네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지.  



  #인연이 분명했어. 황금지붕이 아름답게 빛나는 인스브루크의 작은 카페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으니까. 어제, 인스브루크에 도착한 나는 등산열차를 타고 하펠레칼슈피츠로 가서 인스브루크 시내를 내려다보며 혼자만의 여행을 잔뜩 만끽했어. 오늘은 인스브루크 시내를 돌다가 민속박물관에서 티롤지방 사람들의 삶을 엿본 뒤, 어슬렁어슬렁 시내를 산책하다가 갈증이 났고, 맥주를 마시려고 들어간 노천카페에서 그녀를 발견한 거야. 우와, 정말 반갑더라고.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그녀에게 다가갔어.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처음엔 잔뜩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그녀의 표정이 순간 스르르 풀리더군. 그녀도 여행지에서 마주쳤던 나를 알아본 게 틀림없다 싶었지. 용기백배한 나는 웨이터에게 맥주를 주문하고 자연스럽게 그녀와 마주 앉았어. 그녀도 그다지 싫지 않은 얼굴이었지.        


  “우리, 벌써 세 번이나 만난 거 아세요?”

  “그런가요?”

  “서울 하늘 아래서도 이렇게 자주 마주치지 못하는데, 남의 나라에서 그것도 각각 다른 도시에서 세 번이나 만났잖아요. 이거 보통 인연이 아닌 것 같네요. 우리 통성명이라도 합시다.”

  “여행 일정이 비슷하다 보면 마주칠 수도 있겠죠, 뭐.”

  “아뇨. 세 번이나 만났다는 건, 인연! 아니, 운명입니다.”

  “웬 근자감? 좋아요. 그럼 우리 영화, 세렌디피티처럼 운명을 믿어 봐요. 다음에 다른 여행지에서 또 만나면 그때는 정말 인연으로 생각할게요. 그럼, 저는 먼저 일어납니다.”     


  떼쓰는 남동생을 떼어내듯 그녀가 훌쩍 일어나 카페를 나서는 거야. 어, 이게 아닌데? 당황한 나는 카페를 나서는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어. 지금 생각해도 소심한 내가 어디서 그런 용기를 냈는지 참 기특했지.      


   “세렌디피디? 우연하게 얻은 행운으로 우리 운명을 시험해 보는 것도 좋네요. 그럽시다. 대신,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부턴 사귀는 겁니다.”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지? 영화 ‘세렌디피티’에서 주인공들은 몇 년의 세월을 돌고 돌아 인연을 만났지만, 우리는 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어. 정확히 일주일 후, 스위스 뮈렌에서 다시 만났거든. 아이거 호텔 펍에 앉아 알프스를 온몸으로 느끼며 맥주를 마시던 나는 막 도착한 산악열차에서 내린 그녀를 발견했지 뭐야. 하하하 나는 전속력으로 달리는 자동차처럼 그녀를 향해 뛰어갔지. 나를 발견한 그녀가 순간 얼음처럼 굳어지더니, 배시시 웃더군. 서로의 여행 일정을 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우연이 또 일어났는지, 이건 운명이 틀림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어. 나는 가만히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어. 수줍게 내 손을 잡는 그녀의 손이 참 따뜻했어.    


 

  #사실, 사실은 말이야. 그녀를 처음 본 건 비엔나 중앙묘지가 아니라 인천공항 커피숍이었어. 열심히 뭔가를 쓰고 있는 그녀를 보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 잃어버린 내 반쪽을 만난 느낌이었거든. 그녀를 흘끔거리며 생각했지. 뭐 하는 사람일까, 나이는 20대 후반? 아니 30대 초반? 여행을 떠나는 길이겠지? 어디로 가는 걸까? 한 30분쯤 그렇게 그녀를 흘끔거리며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스마트폰을 받으며 일어서더군. 아쉬운 마음에 그녀를 바라보는데, 툭 종이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거야. 얼른 다가가 종이를 집어 들고 그녀를 불렀는데, 통화를 하느라 내 소리를 못 들었는지 그냥 가버리더라고. 호기심에 종이를 펼쳐봤더니... 세상에! 그녀의 여행 일정이 빼곡하게 적혀있더라고.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2주일간 여행하는 일정엔 그녀가 방문할 도시와 숙소까지 적혀있었어. 그때 직감했지. 이건 보통 인연이 아니라고. 왜냐고? 나도, 비엔나에 사는 사촌형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거든. 픽업 나온 사촌형도 그러더군. 하늘이 내려준 인연을 운명으로 만드는 것이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이라고.



  #세렌디피티? 내 인생에서 우연하게 얻은 행운 같은 운명은, 바로 그 남자였어. 그걸 직감하는 순간, 나는 운명을 믿기보다 만들어가기로 했지. 인천공항 커피숍에서 본 그는 딱 내 스타일이었거든. 그 남자가 30분이나 나를 흘끔거리다가 괜히 얼굴까지 빨개지는데,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하마터면 내가 먼저 말을 걸 뻔했으니까. 소심남에게 용기를 낼 기회를 줄 겸, 운명을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여행 일정을 쓱 떨어트리고 커피숍을 나왔어. 예감대로 비엔나 중앙묘지에서, 잘츠부르크 미라벨 궁전에서 그리고 인스브루크 카페에서 그와 마주쳤지.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느끼며 우리 사이를 확고히 할 마지막 한 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세렌디피티! 아마, 그는 지금도 우연하게 찾아온 우리의 운명을 믿고 있을 거야. 아주 굳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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