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1(토) 17시 청주 예술의 전당 대공연장에서 연극을 보았다. 대부분의 연극이 소극장에서 열리지만 이번 공연은 대한민국 연극제 zZin 용인 대회에서 문화체육 장관단체상 금상 수상을 기념으로 열린 앙코르 공연이었기 때문에 많은 시민들을 초대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극단 '청사'의 수상은 2006년 이후 18년 만에 받은 성과라고 한다. 오컬트 휴먼가족극인 < 그때, 그들, 그 집>은 단체상 금상을 비롯 희곡상, 우수 연기상, 신인 연기상 4관왕을 수상한 작품이다. 극단 청사는 1986년 ' 한네의 승천'을 첫 작품으로 인형극부터 성인극까지 다양한 장르의 연극을 전국 순회하며 38년간 충북 연극의 우수함을 선보였다. 극단 청사 문길곤 대표는 인사글에서 이번 앙코르 공연은 성원에 보답하고자 마련한 자리이며 열정과 노력이 담긴 작품을 다시 무대에서 선보일 수 있어 매우 기쁘다고 했다. 충북에 이런 극단이 존재하고 꾸준히 공연을 이어가고 있음에 박수갈채를 보낸다. 어쨌든 고무적인 일이다.
<그때, 그들, 그 집> 연극무대
< 그때, 그들, 그 집> 연극은 가족 간의 오해와 갈등 그리고 화해의 과정을 통해 가족의 의미와 사랑을 되새겨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관객에게 감동을 전달하는 오컬트적 월메이드 휴먼가족극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숙희는 무당이자 엄마로서 철저히 경계인의 삶을 사는 인물이다. 송갑석 연출자는 어디 한 곳에 속하지 못한 인물로 이 시대의 무당을 경계인이라 말한다. 주인공 숙희는 딸을 지켜 내고자 남편을 죽이게 되고 그녀는 17년이라는 시간을 옥살이로 보내게 된다. 그러다 출소를 하고 죄인의 낙인으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숙희를 짝사랑하던 남자 인수가 숙희를 맞아 준다. 이 작품은 경계인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을 따라가게 만든다. 하나뿐인 딸 정숙과 모질게 싸우고, 죽은 남편의 유령과도 힘겨운 싸움을 하게 된다. 딸 정숙은 그사이 결혼하여 아들과 딸을 낳고 이혼까지 하면서 엄마 면회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이혼과 궁핍, 애들이 벌인 사건 때문에 집을 팔아 문제를 해결하고 엄마 숙희와 절연을 작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정숙이 숙희를 찾아 집에 온건 돈 때문이었다.
<그때, 그들, 그 집> 출연진들
조상의 업보를 짊어진 후손, 6,25 이후 몰락한 지주 가문의 아들이었던 남편 영철은 월북 집안이라는 낙인의 고통을 안고 살았다. 지주 가문이 지속되지 못하고 몰락하며 가족들이 고통을 온전히 짊어지게 된다. 특히 영철의 고통은 다른 누구보다 컸다고 판단이 된다. 그것을 지켜봐야 하는 아내 숙희는 그 고통을 지우려고 무당으로 지내며 힘겹게 이겨낸다. 그러나 영철은 신경증세가 점점 심해져 갔다. 극 내용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숙희는 정숙을 지키고자 남편을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남편을 찌른 건 숙희가 아닌 딸 정숙이었음을 보여주고 자책을 하게 된 정숙은 엄마 숙희와 화해를 하게 된다. 연극 내내 마당의 중심이었던 나무가 쓰러지고 그들은 다른 곳으로 가서 살아 보자고 힘을 모은다. 나무는 가장이었던 아버지를 상징했던 것은 아닐까? 가장과 아버지, 한가족이 될 수 없었던 그들을 보며 그 시대의 비참함을 들여다보게 된다. 정숙의 아들 지철은 약간의 정신 지체아로 비친다. 그러나 극 중 적절한 때에누구보다 명쾌하게 상황을 정리해 주어 다시 화합을 하게 되는 가족들이다.
영철 아버지는 가고 없지만 그들의 가족은 뭔가 끈끈해지고 단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영철이 가족을 좀 더 배려하고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했더라면 살인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남편을 아니 아빠를 살해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가족의 아픔은 바로 시대적인 아픔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연극에서 계속 관심을 끌었던 건 한미리 고양이로 변장한 사람이었다. 대사는 딱 두 마디 (야~옹)이었으나 무대 위를 벗어나지 않고 계속해서 고양이처럼 무대를 누비고 다녔다. 고양이 자세로 걸음을 걷는다는 게 고난도의 연기였다. 심지어 시작도 하기 20분 전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당겼다. '대체 저건 뭐지?' 하는 궁금증과 '동물이야 사람이야?'부터 야옹 소리를 듣고 고양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관객들은 무대에서 고양이로 분장한 그에게 계속해서 시선이 따라다녔다. 어쩌면 연출자는 그것을 노렸는지 모른다. 무대가 워낙에 넓어서 그리고 연극배우들에게 머물기에는 너무 많은 눈동자들이 있어 시선 분산의 효과를 누렸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고양이 역할을 해냈던 배우의 열연에 박수를 보낸다.
<그때, 그들, 그 집> 광고지
대부분의 연극은 소극장 가까운 곳에서 보게 된다. 그래야 연극을 하는 배우들이 관객들과 호응하고 전달력도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그때, 그들, 그 집>은 넓은 청주 예술의 전당대공연장에서 공연을 했다. 워낙에 무대와 멀어 멀리서 바라보니 다소 전달력이 떨어지고 내용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설명되는 부분 없이 오롯이 배우들의 대사와 몸짓으로 관객들이 내용을 분석해서 공연을 보다 보니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다. 내용이 좀 난해하기도 하고 자막도 없이 연극을 통해 모두 내용을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딸을 지키기 위해 왜 숙희는 남편을 죽이게 됐을까?' 물론 끝부분에 가서는 숙희가 아닌 정숙이 아버지를 죽였고 그 부분을 덮기 위해 숙희는 감옥행을 택한 것으로 나온다. "왜 정숙은 아버지를 죽였을까?" 이이유도 명쾌하지는 않았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식을 보호하는사랑이겠지만 남편을 잘 설득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게다가 딸이 아버지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가 명확하지 않아서 답답하기도 하다. 그런 부분들이 좀 이해되지 않아 전체적인 흐름을 읽어 내기가 좀 어렵다. 남편의 유령이 숙희를 괴롭히는 부분이 상당히 오랜 시간 걸린다. 그런 장면도 조금은 난해한 부분이기도 하다. 연출자는 가족 간의 힘겨운 싸움으로 보이겠지만 경계인 어미 무당의 눈에는 응어리진 한을 풀기 위한 한판 굿놀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굿은 남을 해하는 게 아니라 화해를 위한 한판의 놀이기 때문이다. 한판의 굿을 통해 가족의 화해와 사랑으로 하나 되는 시간으로 이해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나 보다. 극단 '청사' 충북연극협회는 소도시 지방에서 어렵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앞으로도 좋은 연극들을 선보일 수 있도록 우리들이 더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