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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고 Sep 14. 2020

2차 세계대전 속 침묵의 암살을 이끈 게릴라 대장

낯선 그녀들의 역사 #15. 필리핀 게릴라 대장 니에베스 페르난데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필리핀 중부 비사야 제도의 레이테 섬 타크로반(Tacloban) 시 남부. 일본군이 점령한 이곳은 일본인에 대한 원성이 자자해지고 있었다. 그들이 으레 마을을 찾을 때면 있는 것 없는 것 다 쓸어갔기 때문이다. 삶의 터전이 빼앗기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 일부 주민들이 뭉쳐 레지스탕스를 꾸렸다. 가난한 게릴라들은 마땅한 무기가 없었다. 대신 일상에서 그것을 찾았다. 구르카처럼 생긴 필리핀 전통 칼인 Bolo Knife는 본디 정글이나 논밭의 수풀을 베는 용도로 사용됐지만, 전쟁 통엔 일본인의 목을 베는 데 쓰였다. 


이 칼을 들고 은근슬쩍 일본군에게 다가간 게릴라는 단박에 일을 해치워야 했다. 자칫 시끄러워지면 머리 수로나 무기로나 불리한 게릴라들이 밀리는 건 당연지사였다. 그들은 귓볼 아래 혹은 뒤에 있는 부드러운 부분을 금세 찾아 칼을 휘둘렀다. 뇌와 연결된 경동맥이 끊기면, 일본군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진다.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의식이 끊기고 마는 암살 방식이었다.


다소 무모해보이는 이 필리핀st 게릴라 방식은 1944년 AP통신을 거쳐 미국 메인 주 Lewiston의 Sun Journal에 소개됐다. 특히 그들이 주목한 건 그곳의 대장 니에베스 페르난데스(Nieves Fernandez)였다. 미스 페르난데스로 불러달라는 그는 일본에 저항한 필리핀 레지스탕스 대장들 중 유일한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목엔 10,000 페소가 걸려 있었다. 


1944년 11월 7일 Stanely Troutman이 찍은 사진. 페르난데스 대장이 미군 앤드류(Andrew Lupiba)에게 스리슬쩍 일본인을 참수하는 법을 뽐내고 있다.


캡틴 니에베스 페르난데스. 오른쪽 팔뚝에 총알이 스친 자국이 있는 그는 검정 치마를 주로 입었다. 그외에 그에 대해 사적인 기록은 거의 없다. 앞서 언급한 1944년 기사에 따르면, 페르난데스는 38살로 1905-06년 생으로 추정된다. 레이테 섬의 타크로반이란 도시의 남부쪽 태생으로, 원래 직업은 교사였다. 일본군의 침탈이 시작되기 전에는 도매업 종사자로 변모했다. 그러다 일본군이 아시아내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동남아시아 지역을 넘보면서 시련이 찾아왔다. 알뜰살뜰 일본군은 토시 하나 남기지 않고 물건들을 수탈했으며, 이는 페르난데스에게도 타격으로 다가왔다. 인터뷰에서 일본군이 한 번 찾아오면 모조리 털어 간다고 토로했을 정도니 말이다.  혹여나 붙잡히면 고문도 만만치 않았다. 음식도 없이 필리핀인들은 한 눈에 봐도 뻘겋게 익을 것만 같은 뜨거운 물이나 얼음장 같이 차가운 물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버텨내야 했다.


아쉬움을 더하자면, 페르난데스가 레지스탕스를 주도한 직접적인 동기나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는 게랄라전에서 필리핀 원주민인 것을 십분 활용했다. 시작은 무기다. 가난했던 그들은 일상에서 무기를 찾아야 했다. 필리핀 전통 칼인 Bolo Knife는 앞서 언급했다. 두 번째 주요 무기는 가스 파이프 샷건이다. 비사야 제도 사투리로 라통(Latongs)으로 알려진 샷건은 가스 파이프를 몸체로, 화약이나 못을 투사체로 활용했다. 필리핀에선 일상에서 만들 수 있는 무기로 꽤나 활용됐으며, 한 방만 맞아도 치사율이 높을 정도로 강력했다고 한다. 그외에 미군으로부터 얻은 라이플 3정과 손수 만든 수류탄이 있었으며, 일본군을 죽일 때면 무기를 강탈하기도 했다고 한다.


페르난데스가 지휘했던 원주민 게릴라는 약 110명이다. 그들은 대장으로부터 무기 만드는 법을 배우고 훈련을 받았다. 그들의 활약으로 200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숨졌다. 세력이 커지면서 자연스레 게릴라들은 페르난데스를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페르난데스는 어느 순간부터 게릴라들이 자신을 캡틴 페르난데스라 불렀다고 너스레를 떨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 뒤에는 10,000 페소라는 현상금이 무게추처럼 따라 붙었다. 페르난데스는 전쟁 기간 동안 약 2년 반 가량을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다.


전쟁 이후 페르난데스의 삶은 더더욱 찾기 힘들다. 다만 그의 삶에 흥미를 가진 한 블로거에 따르면, 페르난데스의 활약상을 블로그에 올린 이후 그의 손녀에게 연락이 왔으며, 페르난데스는 91세로 세상을 떴다고 한다. 기록이 많지 않은 게 흠이다.


미국 함선 USS Prinston이 레이테 만 전투에서 불타고 있다


다만, 니에베스 페르난데스의 활약상이 알려지게 된 경위를 시대적 배경으로 개괄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미국-호주 연합군과 일본끼리 필리핀에서 싸운 레이테 만 전투(Battle of Leyte Gulf)다. 1944년 10월 20일, 한국전쟁으로도 이름난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은 일본군으로부터 필리핀을 해방시키기 위해 레이테 섬에 상륙한다. 23일 미 잠수함이 매복작전을 펼친 이래로, 20만 명이 넘는 수군이 4차례의 전투에서 얽히고설켰다.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수중전이 될 수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때 일본군은 카미카제를 처음으로 선보였지만, 미국에게 패함으로써 일본 수군은 대전 동안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배를 직면한 순간이라고 보면 되겠다.


10월 25일, 엔가뇨 곶 전투(The Battle of Cape Engaño)를 끝으로 미국은 승리를 거머쥔다. 그러나, 비사야 제도를 비롯한 필리핀 섬 곳곳에는 잔당들이 남아있었고, 이를 해치우기 위해 미군은 왕왕 필리핀 사람들과 협력했다. 일례로, 필리핀 북부 루손 제도의 포로들을 구출하기 위해 250명의 필리핀 게릴라들이 미군과 협력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마 캡틴 니에베스 페르난데스도 미군들을 만났고, 협력했을 것이다. 1944년 11월 7일엔 어떻게 일본인들을 상대했냐는 미군들의 질문에 흔쾌히 앤드류 사병의 머리를 잡고 약식 강의를 펼쳤으니 말이다. 덕분에 미약하게나마 필리핀에서 2차 세계대전 동안 유일했던 여성 레지스탕스 대장의 이름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참고,

https://coffeeordie.com/filipino-guerrillas/

https://rarehistoricalphotos.com/captain-nieves-fernandez-1944/

https://www.michaeldsellers.com/blog/2017/02/11/looking-for-info-on-captain-nieves-fernandez-wwii-guerrilla-leader-in-leyte-philippines/

http://www.worldwar2facts.org/battle-of-leyte-gulf.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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