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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고 Jan 17. 2020

혼곶의 폭풍우를 이겨낸 19세기 여선장 이야기

낯선 그녀들의 역사 #14. 최초의 상선 여선장 마리 패튼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 강하게 몰아치는 비바람. 악천후로 이름난 혼곶(Cape Horn, 남미 최남단의 곶)에 갇힌 범선은 나침반마저 무용지물이 되자 손 쓸 도리가 없었다. 그저 초보 선장의 직감에 의지해야 했다. 이번이 첫 항해던 선장은 가던 길인 서쪽으로 전진하는 건 무리라 판단했다. 2년 전, 남편과 함께 항해했던 때를 기억했던 걸까. 대신 그는 남쪽으로 향할 것을 명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을 잔뜩 머금던 구름과 흩날리는 비는 개이고, 화창한 날씨가 펼쳐진 바다로 들어섰다. 망망대해에 홀로 남겨졌던 배는 그렇게 위기를 벗어났다. 


1856년, 당대 가장 빠른 쾌속 범선 중 하나인 넵튠호(Neptune's Car)는 그렇게 위기 하나를 넘겼다. 그러나 19살에 임신한 몸이었던 마리 앤 브라운 패튼(Mary Ann Brown Patten) 선장에겐 앞으로도 험한 여정이 남아 있었다.


최초 상선(Merchant Ship)의 여선장으로 알려진 마리 앤 브라운 패튼(Mary Ann Brown Patten) (출처: Natioanl Portrait Gallery)


마리는 1837년 4월 6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조지와 엘리자베스 브라운의 딸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그는 1854년, 15살에 조슈아 애덤스 패튼(Joshua Adams Patten)과 결혼하는데, 조슈아에겐 고민이 하나 있었다. 마리보다 10살 정도 많았던 그는 배를 빨리 몰기로 이름난 선장이었고, 결혼과 동시에 항해 의뢰가 들어온 터였다. 미국 동부에서 출발하여 서부인 샌프란시스코를 거친 뒤 중국까지 다녀와야 하는 긴 여정이었다. 새신랑이었던 그는 신부를 두고 갈 수 없다고 판단하였고, 선박회사의 동의를 얻은 후 마리는 조슈아와 함께 배에 오른다. 수 백일을 배 위에서 보내야 하는 상황은 15살 마리에게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심심함을 달랠 겸 그는 남편인 조슈아에게서 항해하는 법과 방향을 찾는 법, 기상학, 선원으로서의 자세 등 항해 기술을 배운다.


첫 번째 항해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항해가 시작됐다. 19세기 중반, 미국은 항해 경쟁이 치열하던 상황이었다.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노다지가 발견됐고, 동부에 몰린 선박회사는 최대한 빨리 샌프란시스코에 다다러야 했다. 금을 캐기 위한 도구들을 실었던 상선 중 먼저 도착한 배가 임자가 되어 높은 이득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조슈아는 자신만만한 상황이었다. 일전에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100일 하고도 23시간 만에 도착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3,000 달러에 쉽게 계약을 따냈고, 100일 안에 도착할 경우 2,000 달러를 보너스로 더 챙길 수 있었다. 첫 아이를 임신했던 마리는 이번에도 항해를 함께했다.


19세기 중반 범선의 모습 (출처: New England Historical Society)

항해는 시작도 전에 삐걱였다. 조슈아와 함께 일할 예정이던 1등 항해사가 다리가 부러져 함께 항해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자 급하게 대체 인력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성이 킬러(Keeler)였던 남성이었다. 그러나 그는 말썽이었다. 항해 도중 전방을 주시해야 하는 상황에도 잠을 자고, 여유를 부리며 해항 속도를 늦추기도 했다. 100일 안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이 급했던 조슈아는 그를 일종의 근무태만으로 갑판 아래 가둔다. 


1등 항해사가 쓸모 없어지자 2등 항해사가 그 역할을 대체해야 하는 상황. 그러나 그는 배를 직접 몰아본 경험이 없었다. 조슈아가 1등 항해사의 몫까지 대신해야 하는 지경이었다. 그는 다른 배들보다 먼저 도착하겠다는 일념 하에, 쉬지도 않고 배를 몰았고 급기야 쓰러지고 말았다. 갑판에 누워있는 그를 발견한 선원들은 그를 침대로 옮겼다. 이마는 몹시 뜨거워 땀으로 다 젖을 지경이었고, 헛소리를 하며 선원들의 부축임에 저항하곤 했다. 결핵이었다. 19세기 결핵은 치사율이 높았고, 쉽게 회복할 수 없는 병 중 하나였다. 


1등 항해사는 갇혀있고, 선장은 쓰러졌다. 배를 몰 사람이 범선 안에 없었다. 그러자 마리가 나섰다. 300,000 달러에 달하는 화물들에 대한 책임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는 남편에게 배웠던 기술들을 활용하여 배를 몰면서 직접 남편을 간호하기로 작정한다. 마리가 배몰이를 쉴 때면, 열이 혹시라도 그치지 않을까 조슈아의 머리를 직접 깎고, 스펀지로 땀을 닦았다. 그가 겨우 잠들 때면 병에 관한 책을 뒤지며, 치료할 방안을 강구했다. 


19세기 혼곶을 지나는 배의 모습(출처: Currier and Ives, Womenhistoryblog.com에서 재인용)

한편, 갑판 아래 갇혀 있던 1등 항해사 미스터 킬러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음식을 주기 위해 들렸던 선원들을 통해 지금 상황엔 숙련된 항해사가 필요하다고 마리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마리는 단호했다. 남편이 반대했던 사람이라면 자신도 배를 맡길 수 없다고 단언한 것. 그러자 화가 난 킬러는 선원들을 동요시키기 시작한다. 경험이 없는 임신한 여자에게 어떻게 감히 배를 맡길 수 있냐는 것이다. 악담을 들은 마리는 선원들에게 성실하지 못한 킬러에겐 배를 맡길 수 없다고 호소했고, 선원들은 오히려 마리의 청을 받아들였다. 19살 임신한 마리 앤 브라운 패튼이 세계 최초로 알려진 상선의 여선장이 된 순간이었다.


그녀가 선장이 되고 나서 위기는 여러 차례 찾아왔다. 먼저, 혼곶이었다. 남미 최남단에 자리 잡은 혼곶은 변화무쌍한 기후로 악명이 높았고,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넘어가는 상선들 사이에서도 악코스로 꼽히기도 했다. 선박회사에서 날씨가 안 좋아지는 시기를 고려해서 남반구의 봄에 통과하도록 출항 시기를 잡았으나, 혼곶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배는 폭풍우에 휘말렸고, 앞서 첫 문단에서 밝혔듯이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린 덕에 위기를 벗어날 수 었다. 


그러나 남쪽으로 선회하자 또 다른 위협을 맞이한다. 빙하였다. 남극에 가까워지자 얼음들 사이를 비집고 항해해야 할 지경이었다. 조각조각난 빙하는 암초와 같은 역할을 했고, 조금이라도 충돌할 경우 19세기 배는 쉽사리 못 버텼다. 마리는 빙하 사이를 건넌 경험이 있는 선원의 도움을 받아 배를 최대한 천천히 몰며, 얼음 사이를 헤쳐나갔다. 쥐 죽은 듯 천천히 움직인 끝에 4일 만에 얼음 속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혼곶의 온갖 위험들을 몸소 겪은 셈이었다.


넵튠호의 갑판에 있는 마리(출처: Gordon Johnson, Courtesy of the Atlantic Mutual Insurance Company)

이후 배는 순항을 지속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이르기 전에 바람이 불지 않아 마리의 마음을 졸였던 것 빼고는 말이다. 넵튠호는 136일 만에 서부 항구에 도착했다. 1856년 11월 15일이었다. 마리는 육지를 밟자마자 남편을 병원으로 옮겼다. 며칠 지나지 않아 배를 이끈 임신한 여인의 이야기는 샌프란시스코에 퍼졌다. 아기를 밴 상태에도 배를 몰고 남편을 간호한 일은, 영웅적 스토리에 쉽게 열광하던 19세기 미국인의 감성을 자극했고, 마리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고, 사람들은 그의 용기에 찬사를 보냈다. 선박회사는 그녀에게 화물을 책임져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1,000달러를 지급했다. 


하지만 패튼 부부의 스토리는 비극으로 끝난다. 1857년 1월 마리가 만삭이었음에도, 조슈아의 건강을 위해 패튼 부부는 보스턴으로의 여정을 취한다. 배를 타고 뉴욕에 간 후, 기차를 타고 버스턴에 가는 강행군이었다. 1857년 3월, 그들은 집에 돌아오고 마리는 아들 조슈아를 낳지만, 남편 조슈아의 상태는 아들이 태어난 것도 모를 정도로 악화된 상태였다. 눈과 귀가 멀고, 횡설수설하던 조슈아는 결국, 1857년 7월 25일 숨을 거둔다. 


부부의 항해 스토리는 이미 유명했던지라 보스턴 지역에서는 이를 기리기 위해 1399 달러를 모아 마리에게 준다. 마리는 아들을 데리고, 어머니와 보스턴 외곽지역에서 살다가 역시 결핵에 걸려 24살의 나이에 세상을 떴다. 거친 바다를 거쳐 항해를 해낸 영웅에 비해 허무한 죽음이었다. 그렇게 혼곶을 건넌 최초의 여선장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짧은 인생이었지만, 마리의 스토리는 내셔널 초상화 갤러리(Natioanl Portrait Gallery)에 남았고, 더글라스 켈리(Douglas Kelly)의 소설 선장의 부인(The Captain's Wife)의 모티브가 되어 사람들에게 용기를 심어주고 있다.


참고,

Hisotry of American Woman, "Mary Ann Brown Patten". http://www.womenhistoryblog.com/2015/11/mary-ann-brown-patten.html

Mariners Muesum, "Whither You Go I Shall Go" Merchant and Whaling Wives. https://www.marinersmuseum.org/sites/micro/women/goingtosea/whither.htm

National Portrait Gallery, "Mary Ann Brown Patten". https://npg.si.edu/object/npg_S_NPG.2006.55

New England Historical Society, "Mary Patten, 19 and Pregnant, Takes Command of a Clipper Ship in 1856". http://www.newenglandhistoricalsociety.com/mary-patten-19-pregnant-commands-clipper-ship-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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