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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고 Aug 24. 2019

보헤미안의 여왕, 에이다 클레어

낯선 그녀들의 역사 #13. 미국 보헤미안 계의 여장부

보헤미안은 천성적으로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훌륭한 예술에 공감하는 세계주의자다. 규칙과 관습의 희생자가 되길 거부한다. (...) 기본적으로 보헤미안은 편협해서는 안 된다. 편협한 사고와 태도를 가진 사람은 보헤미안이 아니라 속물일 뿐이다. (Albert Parry, Garrets and Pretenders, 1966. <Robert A. Rosenstone, 존 리드 평전, 2007 재인용>)
파프 지하 맥주홀의 전경. "테이블의 기사들"이 맥주를 즐기고 있다. (출처: Lehigh University)


미국 브로드웨이(정확히는 Bleeker Street)에 자리 잡은 파프의 지하 맥주홀(Pfaff's beer cellar). 당시 유럽에서 유행했던 독일식 맥줏집을 표방한 이곳엔 보헤미안들로 넘쳐났다. 관습에 얽매이길 거부한 이들은 그들의 수염을 맥주와 수다로 적시곤 했다. 민중을 노래했던 시인 월트 휘트먼(Walt Whitman)부터 뉴욕의 잡지 운영자 헨리 클랩(Henry Clapp Jr.)이 대표적. 그중에서도 보헤미안들이 떠받들던 여인이 있었다. 보헤미안의 여왕, 에이다 클레어(Ada Clare)다. 


짧고 굵은 웨이브를 넣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졌던 에이다 클레어. 그녀는 등장부터 논란을 일으켰다. 1858년 뉴욕 사교계에 재등장했을 때 자신을 미스 에이다(Miss Ada)로, 아들은 오브리(Aubrey)로 소개했던 것. 그녀는 미국 사회에서도 어색했던 존재인 미혼모였다.



"보헤미안의 여왕" 에이다 클레어(1837?~1874)

사우스 캐롤라이나 찰스톤 출신이었던 에이다 아그네스 맥엘헤니(Ada Agnes McElnenney)는 300명의 노예들을 부리던 농장주 휴 윌슨(Hugh Willson)의 손녀였다. 부모 역시 플랜테이션 농장을 운영했으나 일찍이 죽었고, 할아버지의 손에서 자랐다. 위로는 오빠, 아래로는 여동생이 있는 삼남매 중 둘째였다. 농장주의 손녀였기에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고, 어머니의 부재로 농장의 여인들이 가졌던 고리타분한 발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플랜테이션을 운영하는 가정에는 전형적인 패턴이 있었다. 아들은 농장을 경영하는 법을 배웠고, 딸은 농장주 부인이 되기 위해 남편을 응원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이른바, 농장주 부인 수업. 베이츠 세미너리(Bates Semninary)는 본격적으로 사회에 발을 들이기 전에 '평범한' 농장주 부인이 되는 방법을 가르쳤다. 에이다도 자연스럽게 그곳에서 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그녀는 일반적인 학생들과 차이가 있었다. 어릴 때 달리기를 좋아하고, 친구들과 레슬링을 하는 톰보이적 기질을 가졌던 한편, 바이런, 키츠, 셸리 등을 선망해 시를 쓰곤 했다. 특유의 자유분방함과 문학도적 기질. 에이다는 농장주 부인이 되길 거부하고, 여름에 놀러 가곤 했던 뉴욕에서 글을 쓰기로 결심한다.



너를 친구로 생각해서 말하는 건데, 사실 난 연기를 공부하고 있어. 에이다 클레어란 이름으로 활동할 거야. 친척들은 내 이름을 쓰지 않아서 좋아하겠지. (...) 그리고 내 이름은 배우랑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발음하기도 어렵잖아. 이 소식을 전하게 돼 기뻐. (March 12, 1855)


에이다는 친척 몇 명과 여름이면 뉴욕 근처에서 휴가를 즐기곤 했다. 그럴 때면 먼 친척들의 초대를 받아 그 집을 방문하곤 했는데, 글로 밥벌이하길 바라는 친척이 있었다. 그는 에이다가 쓴 몇 편의 시를 칭찬했고, 고무된 그녀는 뉴욕에 정착하여 글을 기고하기로 마음먹는다. 19살의 어린 나이에 여러 신문사와 매거진에 글을 실으며 작가에 대한 꿈을 키웠다.


배우도 겸했다. 영국 출신 배우 클라라 매더(Clara FIsher Maeder)가 신문에 낸 광고를 발견한 그녀는 클라라에게서 연기를 배웠다. 그녀는 배우로서 개성 있는 목소리를 갖는 법을 가르쳤고, 몰입하기 전에 대사를 외우고, 발성하는 법을 강조했다. 운이 좋았다. 클라라는 무대에 설 기회가 많았고, 덕분에 단역을 맡을 기회가 많았다. 안타깝게도 에이다의 연기에 대한 평은 아마추어치곤 잘했다 정도였다. 20대 초반의 에이다는 리뷰가 그리 좋지 않음을 인정하면서도,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본인이 훌륭한 연기자가 될 것임을 기대하곤 했다.


활동명으로 에이다 클레어로 바꾼 건 그즈음이었다. 가명이 더 활동하기에 편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배우라는 직업이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진 못했던 것이 컸다. 동네에서 입소문이 나기 십상. 괜스레 자신의 이름이 욕보이는 게 싫었던 에이다는 본명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인습에 갇힌 삶을 버리고 당차게 뉴욕에 닿았지만, 행여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누를 끼칠까 하는 걱정이었다.



미국 최초의 글로벌 스타 루이스 고트샬크

에이다 클레어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단연코 미국 최초의 글로벌 스타이자, 피아니스트 루이스 고트샬크(Louis Gottschalk)다. 그는 유대인 아버지를 뒀으나 프랑스 문화에 익숙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가톨릭으로 자랐다. 사업가이던 아버지가 일찍이 죽어 엄청난 빚을 남긴 덕에, 그는 작곡가로서의 재능을 발휘하기도 전에 순회공연을 다니며 빚을 갚아나가야 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피아니스트였던 그는 뭇여성의 인기를 끌었다. 꼬시기 만큼은 자신 있었던 그는 어떤 여자도 자신에게 넘어오게 할 수 있다며 호언장담했고, 대부분은 성공했다.


그런 그와 에이다는 뉴욕의 한 살롱에서 만났다. 루이스는 뉴욕에서 공연이 있을 때면 친구의 소개로 사교 모임에 나가곤 했었다. 주로 예술인들이 모였던 린치 살롱(Lynchies's Salon)에서 에이다와 루이스가 처음 만난 것으로 추정된다. 에이다는 지속적으로 연기 커리어를 쌓으면서 루이스와 마주칠 기회가 생겼고, 그녀는 곧 루이스에게 빠진다.


루이스가 에이다에게 빠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에이다는 루이스를 열렬히 사랑했다. 어딜 가나 루이스를 말했다. 그러나 둘은 가치관부터가 달랐다.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루이스는 빅토리아 시대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다. 여성은 지적으로 우월한 남성에게 헌신해야 한다는 것. 그는 태동하고 있는 여성의 권리에 대해 전면으로 부인했다. 반면, 에이다는 여성과 남성을 동일시했다. 집을 나와 뉴욕에서 자립했듯이 여성 역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가질만한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둘은 충돌했고, 결별했다.  


사랑했던 만큼, 이별의 아픔이 컸다. 행간에는 루이스와 헤어질 때 에이다가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에이다는 글로 그 슬픔을 표출했다. 자신이 얼마나 상실감을 느끼는지, 자살을 해야겠다든지 가감 없이 신문에 글을 실었다. 그러면서 "불쌍한 에이다, 이건 단지 연극일 뿐이야. 이 슬픔의 끝을 곧 볼 수 있을 거야. 너에게 필요한 건 용기가 아니라 인내야"라며 슬픔을 견디려 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으면 곧잘 자살하곤 했던 빅토리아 시대적 여성 마인드와는 철저히 다른 길을 걸으려 했던 것이다.



미스 에이다의 아들 오브리(Aubrey)

그럼에도 루이스를 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에이다의 성향상, 임신한 자신을 버리고 비난한 루이스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나 무거운 몸을 이끌고 파리로 향한 것이다. 파리는 루이스의 순회공연 목적지 중 하나였다. 그러나 루이스 고트샬크를 만날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에이다는 자신의 변호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주 자신의 상실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청명한 파리의 겨울은 에이다에게 힘이 됐다. 기력을 회복한 그녀는 예술가들 근처에서 머무르던 뉴욕과 다른 생활을 즐겼다. 2년간 파리지앵으로 산 그녀는 하이엔드 클로징 샵을 즐겨 다녔으며, 고급 호텔에 묵었다. 1857년 미국에 공황이 닥칠 때, 변호사로부터 돈이 제때 수급되지 않아 패닉 상태에 빠진 것을 제외하면 경제적인 어려움도 없었다. 파리에서의 문화생활을 즐기며, <The New York Atlas>와 같은 언론사에 글을 기고하기도. 20대 초반의 당찬 여성이 쓴 생명력 있는 글은 여전히 뉴요커들에게 유효했다.



보헤미안의 집결지, 파프 맥줏집

에이다가 파리지앵 라이프를 향유하는 동안, <Saturday Press>의 열성적인 편집자, 헨리 클랩(Henry Clapp Jr.)은 친구들끼리 어울릴만한 술집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파프의 지하 맥주홀(Pfaff's Beer cellar)이 눈에 띄었다. 갓 내린 커피와 거대한 맥주 그리고 서비스로 제공하는 쿠바산 시가까지. 주인장인 파프는 헨리 패거리가 올 때면 서비스를 아끼지 않았고, 계단 밑에 반고정석을 마련해주었다. 세심한 서비스에 감동한 패거리는 그 자리에 자주 모여들었다. 파프 써클(Pfaff's Circle)의 탄생이었다.


파프 써클은 특유의 원형 테이블에 모여 맥주와 수다를 즐겼다. 예술인들과 언론인들이 주로 모였으나, 부유하거나 성공한 편은 아니었다. 대중들이 값싸게 유용할 수 있었던 페니 프레스(Penny Press) 같은 데에나 기고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래도 라인업은 화려했다. 19세기 미국 중반을 대표하는 인물이 여럿 있었다. 월터 휘트먼은 특유의 중단발 머리를 휘날리며 원형 테이블과는 살짝 거리감 있는 조그만 테이블에서 소수 정예로 수다 떨기를 즐겼다. 배우 아다 멘켄(Adah Issacs Menken)도 있었다. 뉴욕에서 옷을 벗는 과감한 연기로 이름을 떨칠 그녀는 에이다의 소개로 파프 써클에 몸 담게 됐다. 에이다처럼 남부 출신이던 그녀는 스페인어와 영어를 섞으며 테이블을 휘젓고 다녔다.


에이다가 뉴욕으로 돌아왔을 때, 파리로 떠나기 전부터 헨리와 막역한 사이였던 그녀는 자연스럽게 파프 써클의 인원이 됐다. 덥수룩한 수염들 사이에서 맥주와 시가 향을 즐겼으며, 월트 휘트먼의 시에 대해서 자유롭게 이야기했다. 다른 멤버들에 비해 부유한 편이었던 에이다는 그들과 어울리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둘이 살기엔 큰 집을 구해서 에이다와 아들만이 아니라 보헤미안 프렌즈들이 싸게 혹은 공짜로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그런 그녀에게 친구들은 '보헤미안의 여왕'이란 별명을 붙여줬다.

 


에이다는 보헤미안을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지칭했다. 그리고 '보헤미안의 여왕' 답게 보헤미안 라이프를 철저히 고수하며 살았다.


먼저, 친구 헨리가 운영하는 <Saturday Press>에 'Thoughts and Things'라는 꼭지로 주기적으로 글을 썼다. 주제는 다양했지만 관점은 하나였다. 구시대적인 인습에서 탈피하는 것. 대표적으로 에이다는 당시 미국 여성들의 패션을 비판했다. 당시 미국 여성들은 구조물이 들어가 치마를 풍성하게 만드는 후프 스커트(Hoop Skirt)를 입곤 했다. 남성들의 압력이 들어간 드레스는 무거웠고, 여성들의 건강을 위협했다. 대신 그녀는 상대적으로 짧으면서 속바지로 다리를 가릴 수 있는 블루머 패션(Bloomer Fashion)을 권장했다.


여성이 상대적으로 남성보다 수세에 몰리는 경우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녀 자신이 루이스 고트샬크와의 스캔들에서 다소 악의적으로 비친 것에 대한 항변이기도 했지만, 언론사에서 여성보다 남성 편을 드는 게 일쑤긴 했다. 그녀는 이러한 언론사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제대로 된 취재가 아니라 자극적인 소재에만 달려드는 모양새를 꾸짖었다.


그녀 자신의 꿈을 이루는 데 주저하지도 않았다. 괄시받는 직업 중 하나였던 배우로 활동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던 것. 뉴욕으로 돌아왔을 때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배역 중 하나를 따냈다. 이후로도 친분이 있었던 성공한 여성 연극 연출자 로라 킨(Laura Keene)의 곁에서 크고 작은 역을 하며 배우 생활도 이어나갔다.


무엇보다도 사회적 통념에 마냥 주저앉지 않았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루이스 고트샬크의 아들로 알려진 오브리를 홀로 키우면서도, 자신을 결혼하지 않은 여성인 미스 에이다로 당당히 소개했다. 덕분에 파프 써클이자 헨리 패거리 일원들을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할 때도 사생아인 오브리는 사람들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여성 보헤미안으로 기억되고 있는 에이다 클레어


'보헤미안의 여왕'의 말년은 그리 평탄치 않았다. 프랭크라는 남자와 재혼을 하고, 그녀가 좋아하는 일은 계속해나갔다. 언론사에 지속적으로 글을 기고하던 그녀는 야심 차게 소설 <Only a Woman's Heart>를 발표했다. 그러나 평이 끔찍했다. 소설로서의 기본기도 갖추지 못했고, 재미없다는 리뷰가 줄을 이었다. 비판을 하는 데에는 익숙했지만 받아들이는 데에는 익숙지 않았던 에이다는 그날부로 작가로서의 꿈을 접고 무대 생활에 집중한다. 안타깝게도 다작을 하긴 했지만 주인공을 맡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신문들의 연극 리뷰에서도 존재감을 부각하지 못했다. 


이렇게 에이다는 연기를 포기하지 않았지만,사인死因이 되고 만다. 개를 좋아했던 에이다는 1874년 연극 프로듀서의 조그만 블랙 테리어에게 코를 물린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광견병은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 물린 당일 극 중에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던 에이다는 곧장 침대에 눕게 된다. 그녀를 담당했던 의사는 광견병으로 번지지 않을 거라 장담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죽는 날 아침까지도 자신이 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며(광견병으로 죽기 직전 현상 중 하나는 hydrophobia로 물을 무서워한다) 호쾌하게 물을 들이켰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울부짖는 프랭크 옆에서 누구보다 당찼던 에이다는 물을 거부하며 숨을 거뒀다.




다소 보수적이던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나 평범한 농장주 부인이 되길 거부했던 에이다 클레어. 사실 그녀는 사랑에서도, 연기에서도, 글에서도 그렇다 할 두각을 드러내진 못했다. 하지만 조그만 역할에도 만족했으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것을 알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여성들을 옭아매던 통념을 바꾸는 데에도 목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진득한 시가향이 뿌옇던 사회 속에서 거대한 독일식 맥주 한 잔과 함께 자신의 의견을 늘 피력했다. '보헤미안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에이다 클레어는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내 보헤미안이었다.


참고,

Charles Warren Stoddard(September 1905) Ada Clare, Queen of Bohemia. Natioanl Magazine.

Encyclopedia Britannica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Ada-Clare)

Gloria Rudman Goldblatt(2015), Ada Clare, Queen of Bohemia: Her life and times

Kevin Taylor(04/09/2019), Ada Clare and the Bohemian Tidal Wave. Aimee Crocker. (https://aimeecrocker.com/people/ada-clare-and-the-bohemian-tidal-wave/)

Lehigh University, The Vault at Pfaff's (https://pfaffs.web.lehigh.edu/)

Robert A. Rosenstone(2007), 존 리드 평전. 아고라. 14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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