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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고 May 02. 2019

호오이- 77년을 이어온 숨비질소리와 물질

낯선 그녀들의 역사#12. 1세기 동안 제주 바다를 지킨 해녀, 문성중 

땅에서 피지 못할 꽃이런가

가슴에 차오르는 정념을 안고

차라리 해녀되어 바닷 품 안으로 뛰어드느니


검붉은 가슴이 물결에 흔들릴 때

쟁 끝 번쩍이면

바다는 몸부림치다 

님인양 성낸 파도 끌어 안고

천 길 깊은 물 밑에서 

삶의 길이 젖었는데

숨 막혀 불어내는 휘파람에 

유랑의 두룽박도 애처랍다

아! 바다여 

너도 하나의 숨결 급한 족속을 안았고나

<해녀, 이경순>

(출처: 경향신문 1949년 10월 11일)

제주도 어느 해녀촌의 광경 (출처:  동아일보 1973. 04. 11)

예나 그제나 한라산은 겨우내 붙잡은 서설을 쉽게 내어주지 않았다. 꼭대기에 들러붙은 눈들은 희끗했지만, 제주도의 봄은 절정이었다. 청청한 해안도로를 따라서는 벚꽃이 만개했고, 해풍 맞은 유채꽃은 절절이 노랑이었다. 오늘날과 별 다를 바 없던 40여 년 전 4월 어느 날. 한 기자는 제주 시내에서 동쪽으로 40리 떨어진 갯마을, 북촌으로 향한다. 


제주도 북군 조천면 북촌리. 이제는 제주시 조천읍 소속이 된 이 마을은 당시 전형적인 해녀촌이었다. 남자보다 여자가 기이학적으로도 많았던 마을. 300여 호에 주민 1,400여 명이 있는 이 마을의 남녀 유권자 비율은 3:1에 가까웠다. 특히나 30대부터 60대에 이르는 남자들이 없었다. 기자는 여기서 물질만 77년을 한 할망을 만난다. 그가 감히 제주도 최고령 해녀라 칭했던, 문성중 할망이다.

문성중 할망 (출처: 동아일보 1965. 08. 07)

그을린 얼굴. 해풍에 억세진 살갗. 나이테마냥 나이 따라 그인 주름살을 움켜쥔 문성중 할망. 제주도 바람은 그런 할망을 가만 두지 않을 듯, 수건으로 동여맨 머리카락을 자꾸만 흩뜨렸다. 제주도 출신이 아니라면 그런 할망과 이야기조차 쉽사리 나눌 수 없다. 평생을 섬에서 살아온 그녀의 목소리는 육지를 타고 온 사람들에겐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일 뿐이었다. 이를 예측이나 했을까. 기자는 마을의 유지들을 초빙해 할망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유지라고 해봤자 이제 20대에 접어든 청년들이 다였지만.


문성중 할망의 나이는 언론사에 따라 들쭉날쭉이다. 조선일보는 1879년생, 동아일보는 1875년생으로 할망을 소개한다. 입맛에 따라 나이가 뒤바뀔지언정, 제주도에서 1세기 가까이 거친 이야기만큼은 변치 않았다. 출신에 대한 정확한 소개는 없지만, 어투로 보건대 제주도에서 태어났으며 13세(*동아일보 기준, 조선일보는 17세부터라고)부터 물질을 했다고 한다. 당대 해녀촌에서는 14-15세 정도만 되면 어머니를 따라 물질을 배웠다고 한다. 문 할망도 아마 어머니를 따라 두렁박(테왁이라고도 한다. 부력을 갖고 있기에 해녀가 잠수나 물 위에 뜰 때 도움을 준다. 어획물을 담아두는 망이 있기도)과 허벅(물통)을 쥔 채 처음 바다로 나섰을 것이다. 


동네 주민들을 불러 모아 족두리를 쓰고 혼례를 치른 건 16살 때였다. 일곱 살 위인 윤(尹) 씨가 상대였다. 제주도 해녀들이 으레 그러듯, 문 할망은 전복과 미역을 딴 것으로 혼수를 마련했다. 아들 형제를 두고도 해안가에선 문 할망의 숨비질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호오이- 호오이- 2분에 걸친 잠수 끝에 내뱉는 가쁜 숨소리로 할망은 일상을 견뎌냈다.

해중작업에 나서는 해녀들(출처: 동아일보 1935.08.08)

세상은 제주도 해녀들을 가만 두지 않았다. 20세기 초만 해도 해녀들은 원정 어업을 나서곤 했다. 1890년대 초 경상남도를 위주로, 강원도, 함경도까지 나서더니 일본, 러시아, 중국까지도 떠났다. 그러나 문맹이 대부분이던 해녀들은 눈뜨고 코베이듯 성과물들을 빼앗겼다. 저울눈도 알아보지 못했던 순박한 인간들이었다. 문 할망과 같은 리에 살았던 김진언 할망은 해녀 100명 중에 1명이나 무게를 달 줄 알았다며, 해녀들 몫을 뺏기지 않기 위해 물옷 입은 채로 자리에 죽치고 있어야 한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런 해녀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도 있었다. 1912년에는 제주도 어업조합이, 1920년에는 해녀조합이 탄생한다. 어업조합에는 일제의 앞잡이 역할을 하거나, 지위층의 눈에 들기 위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러나 해녀조합은 해녀들을 위한 투쟁에 앞장서기도 했고, 1932년 있었던 세화리 해녀 항일운동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한편, 부산 동래에도 해녀조합 비슷한 게 생겼는데 제주도 해녀들을 강제로 끌어들이려 했다. 가입하지 않으면 출조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엄포와 함께. 이처럼 제주도 해녀들은 일제에, 이웃 마을에 그리고 주변인들에게 시달리곤 했다.


문성중 할망은 그녀의 전성기였을 3040 시절에 대해선 딱히 언급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대신 문 할망 역시 냉랭한 수압을 견디며 따낸 해산물들을 덜 쳐주진 않을까 조마조마했으리라. 이웃 동네에서 벌어진 항일 투쟁에 큰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마음 졸이기도 했을 것이다. 어쩌면 부춘화와 김옥련 곁에서 수탈을 막기 위해 사투리 섞인 목소리를 보탰을지도. 그러고도 짬이 날 때면 미역 한 줌을 위해 바다로 떠났을 것이다. 그렇게 할망은 집을 사고, 집 근처에다가 조그만 논과 밭을 마련했다.

제주 4.3 사건을 안고 태어난 해방둥이 해녀들 (출처: 동아일보 1965.01.04)

그리고 문성중 할망에게도 1948년이 찾아온다. 음력 12월 19일, 할망이 있는 마을에서만 350명이 죽었다. 4.3 사건 최대 피해지다. 그날 새벽, 북촌초등학교 서쪽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곧이은 아침, 2개 소대가 북촌리를 덮쳤다. 군인들은 집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학교로 모았다. 그리고 학교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서 차례대로 총살을 집행한다.


오후가 되자 대대장이 나타났고, 사격 중지 명령을 내린다. 군인들의 학살 이유는 '군인들의 인명 살상 경험'이라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마을에 없었거나 초등학교까지 끌려갔지만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이날 문 할망은 남편과 두 아들 그리고 손자를 잃었다. 오손도손 했던 가정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바다는 엄마의 품. 잿더미 돼버린 마을, 남정네에 기댈 필요 없다


4.3 사건 이후 문성중 할망은 슬픔에 젖을 겨를이 없었다. 할망 밖에 남지 않은 5살 난 증손자가 있었다. 70을 넘긴 나이에도 할망은 바다를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가 들어 깊은 바다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늙은 해녀를 위해 연안을 비워둔 주민들 덕에 풀칠은 할 수 있었다. 미역 따기로는 풋내기 해녀들 부러울 게 없다며 웃어 보이기도 했다. 마을 재건에도 여윈 손을 보탰다. 북촌리는 집을 다시 세우고, 초등학교까지 일으키는 데 10년이 넘게 걸렸다. 할망 역시 엄동의 물길을 빠져나와 모닥불에 몸을 잠시 녹이고는 부락 앞 방파제를 쌓았다. 최초의 양복장이 이곳 북촌리에서 탄생하기도 했다.


그렇게 견뎌내야 했던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못했던 세월들. 할망은 90이 됐다. 어느새 증손자는 군대에 갈 정도로 성장했다. 77년을 물질을 해온 할망은 바다를 품 안에서 놓을 수 없었다. 자꾸만 일을 하려는 할망이 못내 서러워 증손자는 뒤롱박을 깨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미역 철만 되면 근질거리는 몸에 문 할망은 자꾸만 뒤롱박과 허벅을 멘 채 소금 저민 냄새를 따라나섰다. 평생을 맡은 바다를, 할망은 잊을 수 없었다.


제주도 바다를 1세기 가까이 누볐던 문성중 할망은 1970년 세상을 뜬다. 해녀로 나고 자라 일제의 수탈과 4.3사건의 아픔을 참아야만 했던 시간들을 할망은 겨우 손에서 내려놓았다.


참고,

(인터넷)

목포대학교박물관, 1932년 제주도 세화리 해녀 투쟁  http://mahan.wonkwang.ac.kr/source/jea-ju/1.htm


(기사)

동아일보(1965.01.04) "천리행각 최남단서 휴전선까지... 탐방 릴레이2 마라도의 김군 마중  나온 제주 섬의 해녀"

동아일보(1965.08.07) "최고령 해녀 문 할망 뒤롱박 인생 90년"

동아일보(1973.04.11) "이색 마을을 가다(17)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면 해녀촌"


오마이뉴스(2018.03.12) "남자 600명, 여자 200명 들어가 남자만 200명 죽어 나갔어" [4.3의 증언] 고 김진언 할머니 인터뷰


조선일보(1960.12.22) "끔찍한 악몽 과부의 마을"


한라일보(2008.10.07) "[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 (58) 순이삼촌문학기념비와 북촌리4.3위령비, 역사의 마을로 살아난 4.3의 땅 북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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