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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고 Apr 15. 2019

할리우드를 매료시킨 탭댄서, 루비 킬러

낯선 그녀들의 역사#11. 1930년대 할리우드의 사랑스러운 탭댄서 

어쩌다 한 번쯤은 지난날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리고 그때에는 세간을 풍미했던, 그 시절을 간직한 얼굴들이 있다. 드문드문 그들의 소식이 들려올 때면, 오래된 친구인양 반갑기도 하다. 1971년, 미국 뉴욕에서 그러한 무대가 펼쳐졌다. 브로드웨이를 뜨겁게 달군 컴백쇼. 60이 넘는 나이에도, 변함없는 탭댄스로 공연장을 가득 채우자 관중은 환호를 질렀다. 신문사들은 30년 만에 돌아온 여배우에게 찬사를 보냈고, 이에 화답하듯 그녀는 861번에 달하는 공연을 소화해냈다. 시대를 초월한 연기는 옛 세대에게는 1930년대의 향수를, 신세대에게는 충격을 안겨 주었다. 할리우드 탭댄스의 여왕이라 불리던 그녀가 'Queen of Nostalgia'라는 별칭으로 전설로 남을 순간이었다. 바로, 루비 킬러의 이야기다. 

193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던 할리우드 대표 탭댄서, 루비 킬러

루비 킬러는 1909년 캐나다에서 아일랜드 출신 가톨릭 집안의 랄프 헥터 킬러와 넬리 킬러 사이에서 태어났다. 위에는 오빠 윌리엄 그리고 밑으로는 3명의 여동생이 더 있었다. 루비가 3살이 됐을 무렵, 랄프는 나은 살림을 위해 뉴욕으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랄프는 얼음을 배달하는 트럭을 몬다. 5명이나 되는 자식들에게 둘러 쌓인 그는 가난의 덫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비는 집 근처에 있는 가톨릭 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루비의 인생을 뒤바꿀 댄스 수업을 받는다. 루비를 지도했던 댄스선생이 루비의 잠재력을 곧바로 인식한 것이다. 그는 루비의 어머니에게 전문적으로 교육시킬 것을 권유했다. 궁핍했던 환경 탓에 댄스 스튜디오에 보내는 것마저 부담이었지만,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가르치게 해 달라는 선생의 간곡한 부탁을 떨쳐낼 순 없었다.

어린 시절 루비의 가족사진. 맨 오른쪽 아이가 루비다.

수업을 받는 동안 루비는 코러스걸 오디션에 지원한다. 당시 법적으로 코러스걸이 되기 위한 나이는 만 16세 이상. 루비는 나이를 속이고 지원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13살이었다. 루비가 지원한 분야는 탭댄스였는데, 재기 발랄한 소녀들이 여럿 있던, 치열했던 오디션이었다. 루비가 춤을 출 차례가 되자, 그녀는 무대가 아닌 나무 바닥에서 춤을 추겠다고 선언했다. 탭댄스 특성상 담당자에게 발소리가 잘 들리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담당자 반응은 시큰둥했다. 이에 기죽지 않고 루비는 무작정 무대 앞에 설치된 나무 바닥으로 나섰다. 그리고 준비해온 탭댄스를 시작했다. 당황한 담당자는 그녀에게 누가 거기서 춤을 추냐고 따졌다. 당찬 루비는 "내가 물어봤었잖아요!"라고 외쳤다. 그렇게 그녀는 일주일에 45달러를 벌 수 있는 직업을 얻었다. 그녀의 아버지 랄프보다 더 나은 수입원이었다.

어려서부터 춤에 소질을 보였던 루비

극적으로 시작한 춤과 어린 나이에 합격한 오디션. 루비의 행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4살이 될 무렵, 루비는 프로듀서이자 극장 매니저이자 갱스터인 닐스 그란룬드(Nils Granlund)에게 고용된다. 덕분에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하는 프로듀서 찰스 딜링햄(Charles Dillingham)의 눈에 띄었고, 'Bye, Bye, Bonnie'에서 작은 역할을 따낸다. 작품을 하는 와중에도 루비를 향한 러브콜은 이어졌다. 유명 프로듀서 플로 지그펠트(Flo Ziegfeld)로부터 꽃다발과 함께 스타로 만들어주겠다는 메모를 받았으며, 실제로 1928년에는 그의 쇼 우피!(Whoopee!)에 출연하기도 했다. 


날랜 춤 솜씨로 브로드웨이에서 차근차근 입지를 다지던 루비는 갑작스레 결혼을 택한다. 상대방은 미국의 유명 코미디언 알 졸슨(Al Jolson). 닐스 그란룬드가 세계 최초의 유성영화인 재즈가수(The Jazz Singer,1927)의 홍보를 도우라고 루비를 로스앤젤레스로 보낸 것이 화근이었다. 알 졸슨은 23살 연상인 데다 2번의 결혼 경력이 있었던 유부남. 그런 그가 루비에게 첫눈에 반하고, 집요하게 구애하자 결국 받아들인 것이다. 브로드웨이에서 루비를 호시탐탐 노리던 갱스터들이 있었지만, 인기스타 알 졸슨을 넘어설 순 없었다. 그렇게 커플은 교제한 지 2년 만인 1928년 9월 21일, 웨딩마치를 올린다. 루비는 꽃다운 19살, 알 졸슨은 불혹을 넘긴 42살이었다.


1929년 할리우드에 잠깐 체류한 후, 루비는 영화 쇼걸(Show Girl)에 출연하기 위해 브로드웨이로 돌아간다. 곧 그녀는 알 졸슨의 은은한 입김으로 당대 최고의 소속사 중 하나인 워너 브라더스와 계약을 맺는다. 1933년에는 워너브라더스사의 새로운 뮤지컬, 42번가(42nd street)에서 딕 포웰(Dick Powell)의 상대역으로 확정된다. 드디어 루비가 스타덤에 오를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순진해 보이는 마스크는 루비 킬러의 무기였다.

루비 킬러(Ruby Keeler)가 가진 건 알 졸슨(Al Jolson)이라는 유명한 남편이 다가 아니었다. 먼저 루비는 춤 실력이 상당했다. 그녀의 탭댄스는 클린한 동작과 스피디함으로 인정받았다. 또, 루비는 당시 할리우드 여배우들에 비해 순진한 마스크를 지니고 있었다. 루비가 할리우드 영화에서 비슷한 배역을 따내게 한다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녀가 고정적으로 영화를 따내게 하는 원천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대게 주연급이었다. 황금기라 불리던 할리우드 시절(1930년대)은 상류층 남성을 만나, 한 몫 거두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택시 위에서의 탭댄스. 최근 컬러 복원된 42nd Street(1933)의 뮤지컬 씬.

워너브라더스와 계약을 체결한 지 약 4년 후인 1933년, 루비는 스타덤에 오른다. 그 계기는 영화 42번가(42nd Street,1933). 42번가는 1920년대 대공황을 배경으로 한다. 시골 소녀 페기 소여(루비 킬러)가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출연하기 위해 뉴욕으로 올라와 그곳의 스타가 되기까지를 그렸다. 벼랑 끝에선 한 브로드웨이 프로듀서는 마지막 회심작으로 자신의 명성을 되찾으려 한다. 페기는 앙상블(일종의 코러스)로 그의 작품에 참여한다. 그러나 뮤지컬이 개시되기 하루 전, 여주인공이 발목을 다친다. 주인공이 빠져야 하는 심각한 상황. 이때 페기의 뛰어난 춤 실력을 떠올린 사람들은 그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덕택에 시골소녀였던 페기는 하루아침만에 스타가 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사랑도 쟁취한다.


영화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34만~45만 불을 투자했던 영화의 수입은 230만 불로 5배를 뛰어넘었다. 필름 데일리(Film Daily)는 1933년 베스트 10 영화로 42번가를 선정하기도 했다. 특히, 맨해튼 고층빌딩을 배경으로 택시 위에서 춤을 추는 루비는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영화를 계기로 루비는 워너 브라더스사와 장기계약을 맺고, 여러 뮤지컬 영화에 차례로 출연한다.


1930년대 영화 제작 시기를 할리우드 골든에이지(Hollywood Golden-age)라고 부른다. 당시에 영화는 여럿이어도, 주인공 커플*은 동일한 경우가 많았다. 루비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그녀의 무비 파트너는 딕 포웰(Dick Powell)*이었다. 딕 포웰과 함께 루비는 다양한 영화를 작업한다. 대표적으로 숙녀들(Dames)과 황금광을 캐는 사람들 1933ver.(Gold Diggers of 1933)이 있다. 영화 숙녀들의 뮤지컬 씬 "I Only Have Eyes for You"에서 루비는 5분이 넘도록 영화를 독차지하는데, 이는 영화계에서 한 사람이 씬을 혼자서 오래 독차지한 것 중 최장 기록이다.*


한편, 루비의 결혼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남편 알 졸슨은 질투심이 굉장히 강했는데, 루비의 성공은 알 졸슨에겐 그다지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또 그들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자식을 키우는 꿈이 대단했던 루비였지만, 불임이 의심되던 알 졸슨과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결국 써니라는 별칭을 가진 아들 알 졸슨 주니어를 입양하는 선에서 마무리할 수밖에. 1940년에는 루비가 알 졸슨의 상대역으로 모자를 잡고 있어요(Hold on to Your Hats)에 출연했지만 흥행에 실패했다. 알 졸슨의 마지막 쇼가 된 이 무대 역시 그들의 이혼에 한 몫했다. 결국 이들은 같은 해에 이혼한다.

두 번째 남편과 함께.

1941년, 루비는 캘리포니아 비즈니스맨이자 2살 연하인 존 호머 로(John Homer Lowe)와 두 번째로 결혼한다. 동시에 그녀는 은퇴를 선언한다. 존은 부동산 관계업자였는데, 골프를 치다 눈이 맞았다. 둘 사이에는 4명의 아이들이 생겼고, 화목했다. 가난 때문에 춤도 제대로 배울 수 없었던 루비는 가정에 충실하면서 자신이 원하던 삶을 산다. 그녀의 아이들은 루비가 한 때 영화의 스타였다는 사실에 대해 잘 몰랐다. 그들에게 루비는 학교가 끝날 때면, 먼발치에서 한결같은 목소리로 마중 나오는 마음 따뜻한 엄마였을 뿐이었다. 밥을 준비하면서 루비가 때때로 탭댄스를 추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옛날 일에는 조용했던 루비였다.


애지중지했던 자식들이 다 자랐을 무렵인 1969년, 루비에게도 시련이 닥쳐온다. 그녀의 남편 존이 암에 걸려 사망한 것이다. 루비가 슬픔에 빠져있는 동안 브로드웨이에서는 새로운 작업이 계획되고 있었다. 해리 릭비(Harry Rigby)는 브로드웨이 프로듀서로 호평을 받았지만, 흥행에는 실패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1920년대 스타일 무대를 재현해내는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20년대 최고의 안무가였던 버스비 버클리(Busby Berkeley)에게 공동제작을 제안한다. 1895년 생이었던 버스비는 일흔을 넘긴 노장이었지만, 해리와의 작품을 마지막이라는 셈 치고 참여한다. 버스비는 42번가, 숙녀들 등 여러 작품을 함께 했던 루비 킬러에게 출연을 부탁한다.


뮤지컬 노, 노, 나넷(No, No, Nanett)을 준비하면서 활짝 웃고 있는 루비(1971)

루비는 망설였다. 30년 가까이 무대에 서본 적이 없는지라, 대사를 외울 수 있을지조차 자신이 없었다. 이때 그녀의 자식들이 용기를 북돋았다. 남편을 잃은 루비가 무대를 통해 그간 잃었던 활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이다. 결국, 루비는 제안을 수락한다. 단 자신이 자신 있는 댄스 장면을 좀 더 삽입하는 조건으로. 그렇게 1971년, 루비의 마지막 무대인 노, 노, 나넷(No, No, Nanett)이 브로드웨이에 오른다. 걱정과는 달리 첫 무대는 성공적이었고, 여러 비평지들 사이에서도 호평일색이었다. 이에 부응한 루비는 무려 861번의 무대를 선보였고, 1920 스타일을 재현해낸 노장들인 버스비와 루비에 대한 찬사는 계속해서 쏟아졌다.


하지만 이 역시 오래가지 않았다. 1974년 루비가 뇌의 혈관이 불룩해지는 뇌동맥류로 쓰러진 것. 다행히 생명은 구할 수 있었지만 걸을 수조차 없었다. 장시간 회복이 필요했다. 끊임없는 재활치료로 겨우 일어설 수 있게 된 루비는 국가 뇌졸중 센터(National Stroke Center)의 대변인으로 활동한다. 하지만 또다시 그녀의 몸에 이상반응이 생겼다. 이번엔 신장암이었고 회복조차 불가능했다. 결국 그녀는 1993년 자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뜬다.

루비 킬러의 화려한 복귀는 전설이 됐다 (출처: General Photographic Agency, Getty Images)

주인공을 맡았던 42번가의 페기 소여처럼 혜성 같이 브로드웨이에 등장했던 루비 킬러. 탭댄스와 순진함으로 인기를 끌었던 그녀는 1971년 화려한 복귀로 할리우드의 전설로 자리매김했다. 그녀의 별과 이름은 할리우드 영예의 길(Hollywood Walk of Fame)에 새겨져 영원히 기억될 수 있도록 남아있다. 1920,30년대 할리우드 황금기를 이끈 그녀는 그렇게 회자되고 있다.


각주, * 가장 유명한 무비 파트너로는 프레드 아스테어(Fred Astaire)와 진저 로저스(Ginger Rogers)가 있다. * 딕 포웰(DIck Powell)은 발암영화 칭기즈칸(The Conqueror)의 감독으로 유명하다. 유타 주에서 촬영된 이 영화는 220명의 크루 중 91명이 암에 걸리는 불명예를 갖고 있다. 딕 포웰 역시 폐암으로 사망했다. * 이 독특한 뮤지컬 장면은 버스비 버클리(Busby Berkeley)가 안무를 맡았다. 그는 브로드웨이에서 독특하면서도 통일된 안무를 제작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1971년 루비 킬러와 함께 화려하게 브로드웨이에 복귀한다.  

참고,

(인터넷)

Hollywood's Golden Age- Ruby Keeler (http://www.hollywoodsgoldenage.com/)


(다큐멘터리)

 Historica Canada- The Canadians: Ruby Keeler (1998년 12월 13일 방영)


(도서)

Buzz: The Life and Art of of Busby Berkeley (Jeffrey Spivak, Univ Pr of Kentucky,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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