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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고 Apr 04. 2019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를 쓴 아일린 파워

낯선 그녀들의 역사 #10. 중세의 일반인들을 끄집어낸 역사학자

16세기 대항해시대는 많은 이에게 부를 안겼다. 대개 배를 타고 이 나라, 저 나라를 오가던 상인들이 그 주인공이었다. 크나큰 범선에 가득 실린 짐들과 수많은 짐꾼들. 사람들의 환송을 받던 이 배들은 모험을 거쳐 금화를 모아 돌아오곤 했다. 코그셜(Coggeshall)의 토마스 페이콕(Thomas Paycock)은 이렇게 부를 창출한 인물 중 하나였다. 항구 근처에 모여 살던 사람들은 경제권을 주름잡던 페이콕 일가를 부러워했다. 잉글랜드의 직물 산업을 호령하던 그. 수 백 년이 지나자 토마스의 이름은 서머싯 하우스(템즈강변에 위치한 영국의 사무용 관공서) 서류철에 묵혀 있는 신세가 됐다. 부러운 눈치를 한껏 누리던 그것은 과거를 간직한 채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그러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일린 파워(Eileen Power)는 그런 그를 해묵은 서류철에서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다. 여타 중세의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아일린 파워는 역사 속 평범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아일린 파워(Eileen Power)는 어린 시절 고초를 겪었다. 1889년. 그레이터 맨체스터의 알트린참(Altrincham)에서 주식 중개인인 필립 어니스트 파워(Philip Ernest Le Poer Power)와 마벨 G. 클레그(Mabel G. Clegg) 사이에서 태어난 아일린은 2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으로 여유로운 가정이었지만 1891년 그녀가 3살이 됐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사기죄로 수감됐다. 어머니는 주위의 시선과 재정적 어려움으로 잉글랜드 남부 휴양도시인 본머스(Bournemouth)로 세 딸을 데려간다. 1903년에는 어머니마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결국, 세 자매는 외할아버지 벤슨 클레그(Benson Clegg)가 있는 옥스퍼드에서 3명의 이모들 곁에서 얹혀살게 된다. 아버지의 사기죄는 동업자였던 외삼촌을 수렁에 빠뜨렸지만, 외갓집은 그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런 아일린에게도 행운이 있었으니 바로 여권 신장에 대한 관심들이었다. 20세기 들어, 여성들도 능력이 있으면 대학 교육과 더불어 자신들만의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기류가 형성된 것이다. 살아생전 그녀의 어머니는 딸들이 가능한 최고의 교육을 받길 원했으며, 그녀의 이모들 역시 어머니와 일맥상통했다. 덕분에 아일린은 명문 옥스퍼드 여자 고등학교를 거쳐 케임브리지 대학 거튼 컬리지(Girton College)에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역사 수업을 들으며, 여성 참정권 운동에도 참여한다. 1908년부터 3년 연속으로 역사 선구자 상을 받기도 했다. 또한, 1910년에는 연구장학생이 되어 파리의 에콜데 샤르트에서 수학했다. 교수 찰스 빅터 랑글루아(Charles Victor Langlois)는 아일린에게 역사 서술 방법을 가르쳤고, 그중에서도 아일린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강한 흥미를 가진다. 특히, 당대 여성의 삶에 관심이 많았다. 1911년에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중세 여성에 대한 연구로 런던경제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 LSE)의 조지 버나드 쇼 장학생이 된다. 


1922년 경의 아일린. 이 사진은 왜 가운데 정렬이 안 되는 걸까.

2년의 LSE 생활을 마치고 케임브리지로 돌아간 아일린. 그녀는 본격적으로 중세에 관한 연구를 텍스트화 한다. 주된 연구는 중세의 평범한 사람들. 비단 여성만이 아니라 상인, 농부들도 소재가 됐다. 1919년, 그녀는 첫 번째 논문인 코그셜의 페이콕*을 펴냈다. 이 논문의 주된 소재는 중세시대의 직물업자인데, 당시 그의 발자취를 서간, 유언장, 기념비 등을 이용하여 밝혀냈다. 흥미로운 점은 토머스 페이콕이 죽을 때, 그 가족만이 아니라 죽은 자신을 위해 기도를 해줄 교회와 선량한 이웃들 그리고 자신이 고용했던 일꾼들과 대자녀들에게까지 자산을 물려줬다는 것이다. 이후 중세 수녀들에 대한 연구를 거쳐 1924년에는 걸작 중 하나인 중세의 사람들(Medieval People) 초판이 나온다. 추후 10번의 에디션이 걸쳐질 이 책은 사회경제사의 고전으로 남는다.


한편, 1920년 아일린은 칸 여행 연구장학생(Kahn Travelling Fellowship)을 받는 첫 번째이자 유일한 여성으로 선정된다. 이 장학금을 따기란 쉽지 않았다. 런던대학의 대장 쿠퍼 페리경(Sir Cooper Perry)과의 면접 과정에서 드러나듯, 아일린은 적합한 남자 후보자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선발된 것이었다. 그녀는 이때까지 그녀가 선보였던 뛰어난 성적 및 장학증서들과 연구로 겨우 선발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동방으로 떠나게 된 아일린은 마치 자신이 디킨슨의 작품 속 탐험을 떠나는 어린 영웅 타미노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배와 기차를 번갈아 타며 시작된 여행에서 아일린은 중세 연구에 심취한 나머지 세상을 중세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도 했다. 배에서 한가로이 여유를 만끽하는 의사에게선 절제의 미덕이 중요시됐던 중세 수녀와 승려들이 가졌던 질병을 떠올렸으며, 하루 종일 일만 하는 동양인들과 힌두교와 불교는 중세적 요소의 잔재라고 생각했다.


15세 연상이었던 레지널드 존스턴. 청나라 최후의 왕 푸이의 선생이기도.

인도와 중국이 메인이었던 이 여행에서 아일린은 동방에서도 특히 중국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추후 인테리어를 중국풍으로 꾸밀 정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의 과외선생이던 레지널드 존스턴(Reginald Johnston)과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10년 후인 1930년 레지널드는 아일린에게 프러포즈할 겸 새로운 밥벌이도 찾을 겸 런던으로 건너온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1931년, 약혼이 파혼으로 이어지면서 끝난다. 여성에 대한 인식 차이에 따른 갈등이 원인인 것으로 알려졌다. 


1921년 LSE(런던경제대학)로 돌아온 아일린 파워는 강사생활을 하면서 중세 사람들에 대한 연구를 이어간다. 1922년에는 중세 수녀들에 관한 책을 펴냈다. 775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책이었는데, 그녀의 동료이자 경제사학자 존 클래펌(J. Clapham)은 훗날 이 책이 쓸데없이 길다고 평했다. 하지만 수녀들을 익살스러우면서도 감동적이게 표현했으며, 수녀원의 경제관을 살핀 것에서 중세 경제사의 싹이 보였다고 덧붙였다. 1924년부터 LSE에서 같이 근무했던 킹슬리 마틴(Kingsley Martin)에 따르면, 아일린 파워는 굉장히 위트 있고 재미있는 강사였다. 특히 그녀가 풀어내는 중세사에 흥미를 느꼈는데, 그는 중세 수녀사를 그녀만큼 재미있게 풀어낸 경우는 없을 거라며, 이후 언급할 <중세의 사람들>이 성공한 것은 아일린만의 스타일이 잘 녹아들었기 때문이라 말했다.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중세의 사람들>

1924년, 아일린은 전작보다 가벼운 무게의 <중세의 사람들>을 펴낸다. 그중 여러 번 언급된 수녀에 대해 살펴보자. 3장인 [초서가 묘사한 수녀원장의 실생활]에서 아일린은 중세 영국의 이름난 시인 제프리 초서(Geoffrey Caucer)의 <캔터베리 이야기> 속 마담 에글렌타인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아일린은 수녀원장인 에글렌타인이 사무적인 일에는 도통 흥미를 느끼지 못하며, 가끔씩 있는 외출을 신명나게 즐긴다고 묘사한다. 자칫 수녀원장을 깎아내리는 듯 한 인상. 한편으론 자애롭고 인정이 많았다며 추켜세우기도 한다. 마냥 절제된 삶을 살았을 것만 같은 수녀들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바깥세상을 자유롭게 돌아다녔다고도 한다. 장신구에 관심을 갖고, 서로를 까내리는 모함마저 잦았다고. 주교가 수녀원을 돌아다니며 수녀들의 고민을 청취해줘야 할 정도였다. 이렇게 중세의 평범한 사람들을 소소하면서도 위트 있게 표현한 것이 아일린 파워만의 매력이다.

BBC 스쿨 라디오에서 아이들을 위한 역사 교육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아일린 파워

LSE에 근무하는 동안 아일린은 그녀의 여동생 로다 파워(Rhoda Power)와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로다는 아이들을 위한 역사책을 쓰고 강연을 하고 있었다. 자매는 1927년 BBC 스쿨 라디오(BBC School Radio)에서 아이들을 위한 역사 교육방송을 시작한다. 방송에는 아이들만이 아니라 역사에 흥미를 가진 일반인들도 참여할 수 있었고, 드라마 스타일로 진행됐다. 아일린은 그녀가 연구해온 중세의 역사와 더불어 전반적인 세계사나 여성·사회사에 대해 다뤘다. 예를 들어, 1927년 12월 6일에는 '암흑의 중세사'에 대해서, 1928년 1월 24일 방송에선 '시대에 따른 유럽- 변화하는 세계, 1300-1500'에 대해 강연을 하였다.* 그녀들이 진행한 이 라디오 프로그램은 이후 역사 교육방송 프로그램의 토대를 마련한다. 9년 가까이 진행된 라디오 방송은 1936년, 프로듀서와의 다툼으로 종말을 맞이한다. BBC 측에서는 영국 중심적인 드라마틱한 세계사 강연을 희망했지만, 아일린은 그런 이기적인 사관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자매는 방송국에서 잘린다.


강연과 연구 그리고 방송까지 겹친 일상은 아일린의 사생활을 빼앗았지만 그녀는 즐거워했고, 그 결과물 역시 만족스러웠다. 1926년에는 그녀가 유학생활을 했던 파리로 떠나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과 친분을 쌓는다. 1927년 1월에는 경제사 리뷰(Economic History Review)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역사학계에 경제사란 분야를 확립한다. 이때 파리에서 쌓은 연들이 힘을 발휘하여 경제사 리뷰에 참여한 영국 학자들이 해외에 알려진다. 이런 경력에 힘입어 1931년에는 강사생활 10년 만에 LSE에서 교수로 승진했다. 당시 여교수는 런던에서도 흔치 않았다. 그녀의 교수실은 중국 덕후답게 동방여행에서 영감을 받은 중국 스타일로 꾸며져 있었다.  

말년의 아일린 파워. 중화풍 스타일을 소화해냈다

한편 중세의 사람들을 출간한 후, 아일린은 중세의 양모 무역(Wool Trade) 연구에 눈길을 돌린다. 그리고 훗날 남편이 될 10살 연하의 학생 마이클 포스탄(Michael Postan)과의 사랑도 이 양모 무역 연구에서 피어났다. 중세의 양모 무역은 잉글랜드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수익이 많은 장사였다. 양모 상인들이 가장 부유한 상인들이 되는 것은 당연지사. 세금의 대부분이 이들에게서 나왔기에 양모 무역은 한마디로 중세 잉글랜드의 트렌드였다. 연구의 출처는 묘지 기념비, 서한집, 당대 건축물과 가문의 문장 등이었다. 특히 서머싯 하우스에는 유언·편지 등 각종 가정 기록물들이 보관되어 있어 연구가 용이했다. 1926년, 첫 양모 무역 연구의 작품인 '에드워드 6세 통치기의 양모 무역에 대한 연구'를 케임브리지 역사 저널에 발표한다. 1932년에는 '15세기 영국의 무역사'를 포스탄과 같이 발표한다. 그리고 1937년, 포스탄과 결혼하여 양모 무역이 맺어준 사랑의 결실을 얻는다. 1938년에는 그녀의 모교 케임브리지의 교수가 된다. 또 1938-1939년에는 최고의 역사가들만 진행한다는 옥스퍼드의 포드 렉쳐(Ford Lectures)* 강연을 맡기도 했다. 그녀는 여기서 '영국 중세사의 양모 무역'에 관한 강연으로 연구를 대중에게 알릴 기회를 얻는다. 재치 있는 강연은 큰 성공을 거뒀다.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중세사 연구, 케임브리지 역사학계의 2번째 여교수, BBC 방송 그리고 포드 렉쳐까지. 연이은 성공 덕택에 그녀는 아널드 토인비(Arnold Toynbee), 리처드 헨리 토니(Richard Henry Tony)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역사학자의 반열에 오른다. 하지만 한층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던 1940년, 아일린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51살, 결혼한지는 겨우 3년이 됐을 뿐이었다. 아일린의 사후 그녀가 포드 렉쳐에서 진행한 양모 무역에 관한 강의는 그녀의 연인 마이클 포스탄이 검수하여 1941년 '중세 영국의 양모 무역'으로 세상에 등장한다. 30년 후인 1975년에는 아일린이 진행했던 강연을 엮어 '중세의 여인들'이 발간되어 아일린 파워는 재조명을 받는다.

20세기 뛰어난 역사학자였던 아일린 파워는 갑작스레 세상을 뜬다

역사에 지대한 흔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보다는 어느 묘지에 잠들어 있을지조차 모를 민초들의 삶을 밝혀냈던, 역사학계에서 경시되었던 경제사의 발판을 마련한, 그리고 당대 흔치 않았던 여교수의 길을 넓혔던 아일린 파워는 차츰 잊혔다. 연이은 성공으로 하늘을 찌르던 명성이 그녀의 죽음과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연이은 악재로 급격히 희석된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잊혔다. 역사학계는 다시 남성 위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재치 있는 중세사 이야기는 역사학계 그리고 사회경제사에 여전히 고전으로 남아있다.

각주, *= 아일린이 진행한 방송에 대한 일부 주제는 찾을 수 있었으나 실제로 어떤 내용이 진행됐는지는 찾을 수가 없었다. *== 포드 렉쳐(Ford Lectures)는 매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일반 대중을 상대로 유명 역사가들이 영국의 역사에 대해 강연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참고,

(인터넷)

스파르타쿠스 에듀케셔널, Eileen Power (spartacus-educational.com/Jpower.htm)

(도서)

중세의 사람들, 아일린 파워(히스토리아 문디, 2007)

A Woman in History: Eileen Power, 1889-1940, Maxine Berg(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논문) 

Eileen Power, 1889-1940, J. H. Clapham(Economica New Series, Vol. 7, No. 28, 1940, pp 351-359)

Eileen Power's Asian Journey, 1920-21: history, narrative, and subjectivity, Ellen Jacobs(Women's History Review, Vol 7, No 3., 1998)

(리뷰) 

Review of A woman in History: Eileen Power, 1889-1940 (Review no. 7), Dr Helen Mellor, http://www.history.ac.uk/reviews/review/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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