튼실한 뇌세포도 비명을 내지를 만한 고민
오랜만에 친구의 얼굴을 보았다. 어렸을 적 메이플스토리 아이디를 같이 키웠던 친구로, 우린 여전히 그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 친구가 시간이 됐다며, 게임 종료를 누르고 집으로 갑자기 가버렸다. 억울하다는 느낌도, 친구가 떠난 것에 대한 아쉬움도 없었다. 단지, 나는 게임을 계속하고 싶을 뿐이었다. 로그인을 시도하자, 주황색 커다란 버섯이 풍채를 뽐내는 화면에서 막혔다. 친구가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가지 않은 것이다. 문득 별다른 이유 없이 '짝꿍123'이 떠올랐고, 과연 그것이 비밀번호였다. 그렇게 신나게 게임을 즐기다 보니 어느새 기억은 흩어지듯 흐릿해졌다. 그날, 모처럼 내 꿈에 들이닥친 친구에게 이 기승전결이 불분명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비밀번호도 한 번에 맞출 만큼, 너를 잘 알고 있다는 허세와 함께. 그러자 친구는 개꿈이라 일단락하며, 자기 할 말만 늘어놓는다. 나 역시 깊은 인상을 받은 꿈은 아니었기에 곧바로 잊고, 쓸데없는 대화를 펼치는데 집중했다.
책 <개인의 동일성과 불멸성에 관한 대화>는 엄밀히 말하면 이 시시콜콜한 꿈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아니, 내 기억이 맞다면 꿈은 언급조차 된 적이 없다. 그저 어떤 철학 교수가 죽음을 앞두고 한 스푼의 위안이라도 얻기 위해 지인들과 토론을 펼친다. 주제는 존재의 동일성. 죽음을 매개로 존재의 동일성에 관해 각자 논지를 펼친다. '나'라는 존재는 종교에 따라 기술발전에 따라 다양한 색채로 해석될 수 있다. 사후세계에 존재하는 '나'에 대해서나 영화 <겟 아웃>처럼 다른 사람의 신체로 이식된 경우의 '나'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의 나와 동일한 존재라고 볼 수 있을까. 치열한 논박이 이어지는 책을 읽고 난 후, 난데없이 새로운 세계가 떠올랐다. 누구나 일상에서 접하는 세계인 꿈. 어젯밤 꿈에서 만난 너는 정말 너였을까. 어쩌면 인생에 하등 쓸모없다고 여길 법한 질문들이 마구잡이로 부풀어, 고차원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일단, 꿈속의 '너'에 관한 인식을 살펴보자.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과 의견 일색이지만, 꿈속에 나온 사람은 대개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꿈속의 친구를 자연스럽게 현실 친구와 동일시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꿈에서 너를 봤다고" 말하지, "꿈에서 너와 동일한 것처럼 보이는 신체를 갖고, 너라는 느낌을 은연중에 풍기지만, 너는 아닌 사람을 봤어"라고 늘어놓진 않는다. 어쩌다 "너였는데, 네가 아닌" 꿈도 있지만, 그것은 평소의 너와 다른 행동이나 양상을 보여 어색하다고 느낀 것이지, 그 근간에는 꿈속의 너와 현실의 너란 존재는 동일하다는 전제가 밑받침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엄밀히 고려했을 때, 꿈속의 너를 현실의 너와 동일한 존재로 볼 수 있을까. 먼저, 꿈에 대해 일장연설을 해야겠다. 안타깝게도 꿈은 아직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증명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따라서, 꿈의 세계를 읽는 데 있어 각양각색의 목소리가 자기주장을 펼칠 수 있다. 우리은하 밖의 또 다른 은하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여준다던가, 인간 능력을 넘어서는 존재들이 은근히 암시를 주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라던가. 결코 아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기에 그것들을 수도 없이 나열할 수 있겠다. 하지만 자주 언급되는 목소리 중 하나는 꿈은 개인의 무의식의 일부가 반영된 이미지들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즉, 한 개인은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그가 마주쳤던 것 혹은 생각했던 것을 무의식의 영역에 차곡차곡 쌓는다. 그리고 이것들이 어쩌다 꿈에 등장한다. 예를 들어, 최소 10년 동안 메이플스토리를 실행한 적도, 추억한 적도 없는 내가 메이플스토리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경우, 무의식에 잔존하던 그 게임이 꿈에서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꿈속의 친구는 내 무의식이 만든 이미지에 불과하다. 무의식이 뽑아낸 친구에 대한 기억과 감정 따위들이 꿈속에서 여타 상징들과 섞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내 무의식이 엮은 '너'라는 존재를 현실의 '너'와 동일성을 근간으로 비교한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가 누군가를 동일한 존재라고 인식할 만한 근거엔 기억이 있다. 우리가 현실에서 A를 A라고 부를 수 있는 건, 그간 A를 만나면서 받아들인 이미지라던가 성격, 행동방식 등에 대한 데이터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꿈에 적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이왕 빌린 김에 논리도 슬쩍해보자. 언젠가 기술의 발달로 인공지능에 A의 뇌를 복사해서 주입시킨다고 하자. 이 녀석도 A와 마찬가지로 인스타그램에 열심이고, 말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윙크를 한다. 차이가 있다면, 혈관에 피가 흐르는 대신 튼튼한 전선에 전류가 흐른다는 것뿐이다. 내가 얼리어댑터가 아니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A로 받아들이진 못할 것 같다. 쉽게 말하면, 친구의 모든 것을 구현했을지라도, A 자체로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는 말이다. 이는 꿈에서도 마찬가지다. 너그러운 마음씨로 꿈에 등장하는 A는 현실 속 A의 모든 것을 빼다 박았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꿈에 있어 자주 언급되는 무의식론을 다시 살피면, 꿈속의 A는 무의식이 편집한 이미지일 뿐이다. 인공지능 A가 A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형성됐을지라도 우리가 현실의 A와 동일한 존재로 판단하지 않듯이, 무의식이 만든 A가 A에 대한 기억과 상상을 기반으로 형성됐을지라도, 현실 속 A와 동일한 존재라 판단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어쩌다 너무 생생한 꿈이라서 소름이 돋아 식은땀에 젖은 채 깨어났다고 하자. 이는 우주의 기운으로 말미암아 현실의 A가 암시했다고 강력히 느껴지더라도, 증명 자체가 불가능한 영역이기에 확신할 수 없다. 따라서, 꿈속의 A와 현실의 A를 동일한 존재로 보기는 어렵다.
어쩌다 길어졌다. 어쩌면 논의할 필요도 없는 주제였다. 고민해보면, 우린 꿈을 이야기할 때 누군가를 동일시하면서도 동일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메이플스토리 꿈을 들려주었을 때, 꿈속의 친구를 자연스럽게 현실의 친구와 동일시하여 이야기를 했다. 동시에 그렇지도 않다. 나는 친구가 내 꿈에서 한 행위를 알고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즉, 꿈속 친구의 스토리는 현실의 친구에게 난생처음 듣는 새로운 이야기다. 우리가 둘을 동일한 존재로 인식한다면, 현실의 친구도 이에 대한 단서를 갖고 있다고 기대하는 게 맞지 않는가. 생각의 갈래가 나뉨에 따라 전제가 무너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면, 그렇지 않아도 비실비실한 내 뇌세포들이 단말마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다. 이쯤에서 그만 접어야겠다.
동시에 얍삽한 술수도 떠오른다. 가끔씩 친구들 중에 나를 꿈에서 만났다면서 신나게 썰을 푸는 사람들이 있다. 흥미진진하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은 후에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건 어떨까. 어젯밤 꿈속에 등장한 나는 정말 나였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 존재의 동일성을 입증할 근거는 무엇이지? 만약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그저 내가 등장한 허구였을 뿐이구나... 벌써 나는 친구 중 하나가 이런 류의 맥락에 면역력이 생겼을 법함에도, 진절머리 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