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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고 Feb 11. 2021

엘리트의 이름

거창한 제목 아래 궤변 늘어놓기

한 과학자가 있다. 어린 나이 때부터 행성 이름 외우기가 취미였다. 그는 영재를 소개하는 유튜브에서 7시간 동안 우리은하에 있는 행성들의 이름을 모조리 기억해내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진짜인지 아닌지 어른들은 알 수 없었지만, 행성에 관한 그의 재능에 모두가 찬사를 보냈다. 시간이 흘러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끝낸 그는 우주학 관해서는 통달한 인재로서 학계에서 인정받고 있었다. 암흑물질이라던가 반물질이라던가. 그가 밝혀낸 물질들 간의 상관관계는 우주의 비밀을 파헤치는데 두 걸음은 나아가게 했으며, 이에 대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아냈다. 우주물질 용어 하나를 설명하는 데에도 책 10여 권을 쓸 수 있다고 자부하던 과학자는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런 과학자에게 고민이 하나 있다. 과학사에 분명한 족적을 남겼으나 사람들은 알아주지 못했다. 우주학에서도 우주물질학을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딴 후배들은 그와 대화를 나눌 때면 감명받았다는 눈치를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인류 문명에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온 연구를 이룩해낸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간혹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지만, 우주물질에 대해선 피상적인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다. 가만 돌이켜보니 이 나라는 인재를 제대로 대접해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도 정부-언론-시민 모두가 힘을 합세해서 말이다. 심지어, 작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는 감사 인사를 과학자에게만 했지만, 언론은 한 마디도 실어주지 않았다. 재미로 시작한 연구지만, 이름 좀 알아주는 게 어디 대수인가.


과학자는 이 고민을 홍보 일하는 친구와 나누었다. 인생에 한 번 받을까 말까 한다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지만, 이때까지 노벨물리학상은 300명이 받았고, 노벨상 종류는 6가지나 된다고! 노벨상 수상자 중에서도 엘리트만 받을 수 있다는 노벨노벨상도 수상했지만, 100년 후면 그것을 받을 사람도 100명이 넘는다고! 쓰레기도 구찌에서 나온 것으로 입을 털 수 있다는 친구는 대통령 선거기획팀에서 5번이나 홍보실장을 맡아 모두 당선시켰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툭하니 뱉는다. 어려울 게 뭐 있나. 논문 구석탱이에 메모로 대단한 발견을 했다고 하고, 증명은 하려다 만듯한 인상을 주면 되네. 수학에서 페르미가 그랬듯이, 과학계의 페르미가 되는 거야. 팩트든 아니든 상관없어. 후배들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씨름할 거고, 사람들은 그런 은둔자들의 노력에 찬사를 보낼 거야. 그것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증명을 해내면, 어려운 수수께끼를 낸 자네와 증명자는 그 엄청난 기싸움으로 주목을 받을 거야. 그런데 보통 증명자보다는 출제자의 천재성에 주목하는 것 같더군.


천연덕스럽게 사기극을 펼쳐내는 PR전문가의 입담에 감탄한 과학자는 실행에 옮기기로 한다. 책장을 멋들어지게 꾸며주는 걸로 유명한 그의 저서에 우리가 하나라고 생각해온 우주는 사실 7개라고 휘갈긴 글씨체로 적은 것이다. 그리고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20년은 교수생활을 재직해야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대충 쓰다가 만다. 이후 한 달에 한 번 있는 클럽하우스 속 우주물질학 엘리트 훈남훈녀 모임에서 자신이 대단한 것을 발견했는데, 곧 발표할 거라 말하곤 했다. 그러다 그는 우주물질학에 치중한 나머지 생활 상식엔 소홀했고, 모처럼 방문한 사우나에서 냉탕과 사우나를 다섯 번 오가다 온도 변화를 견디지 못한 신체를 뒤로한 채 94세로 세상을 뜬다.


우주물질학 엘리트 훈남훈녀 모임의 대표는 과학자가 대단한 원리를 발견했지만 발표하지 못했으리란 생각에 그의 서재를 방문한다. 양키캔들 워머 옆에 원하는 페이지를 기억하고 싶을 때 붙이곤 하는 3M 플래그형 포스트잇이 수 백 장 박혀있는 그의 저서를 발견한다. 포스트잇을 열심히 뒤지던 그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펼친 맨 첫 장에서 과학자의 원리를 발견한다. 우주는 사실 7개다. 충격을 받은 그는 과학자의 증명을 열심히 읽지만, 30년 교수생활을 했음에도 금방 이해하기 어렵다. 대단한 발견임을 직감한 그는 과학계와 언론에 이를 알린다.


23세기가 되자, 노벨노벨상 수상자 중에서도 엘리트를 꼽는 노벨노벨노벨상을 수상한 학자는 이번 세기 인류가 풀어야 할 난제로 '우주는 7가지'인가를 선정한다. 그리고 이를 발견한 과학자의 성과를 치하하며 이를 증명한다면 우주에 관한 인류의 발걸음이 세 보는 앞서갈 것이라 공언한다. 덕택에 세상이 몰라주는 것에 대해 걱정했던 과학자는 21세기 노벨노벨상 수상자 중에서도 여전히 매스컴에 등장하는 3인 중 하나가 됐다. 책장 인테리어 1순위로 꼽히던 과학자의 저서는 촌스러운 책이 됐지만, 그를 다룬 위인전이나 우주는 7가지임을 증명하려다 실패한 아류들의 책이 그 순위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과학계에서 난제들이 발생할 때마다 '제2의 과학자의 문제'라는 기사가 이틀에 한 번 꼴로 나곤 했다.


2394년이 되자, 드디어 우주는 7가지다라는 명제를 증명해낸 후배 우주물질 전문가가 등장했다. 아쉽게도 그 명제는 틀린 것으로 증명됐다. 대신, 우주는 가지 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게 전문가의 입장이었다. 전 세계에서 우주물질학 명사로 꼽히는 15명을 초대한 컨퍼런스에서 그는 장장 35시간에 걸쳐 그의 증명을 선보였다. 쉴 틈이 없던 컨퍼런스 속에서 단 3명의 전문가만이 이를 이해했다며 박수를 보냈고, 나머지는 그 소리를 듣고 장단을 맞출 뿐이었다.


3세기에 걸친 증명 싸움이 끝이 나자, 언론은 대서특필했다. 과학자와 전문가의 삶을 조명하는 책도 등장했지만, 2000 페이지에 달하는 책에서 증명을 다룬 부록이 1900 페이지를 차지했다. 그러나 그 책은 모 대학교 책장인테리어 학과에서 매년 발표하는 책장 인테리어 필수 서적 100선에 10년간 상위권을 차지함으로써 그 뜨거운 관심을 증명했다.


슬프게도 과학자의 이름이 오래도록 인류에 기억될 것이라 자신했던 PR 전문가의 예측은 틀렸다. 위대한 과학자와 번지르르한 PR전문가의 연결고리는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탄자니아, 라이베리아, 미국, 영국에도 즐비했다. 그 획기적인 발견이란 것들도 초미세-정밀-양자역학이나 세포-전자기파-분석학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것이었다. 이에 25세기에 이르자 과학자의 이름은 인물사 덕후들이나 살펴보는 <천재와 홍보 전문가의 만남 25선>에 하나의 사례로 소개되다가, 인류가 다른 우주에서 새 삶의 터전을 마련하게 됐을 때에는 그것에서마저도 이름이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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