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발칙한 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에고 Feb 28. 2021

거부할 권리

난 별로라서

성경의 한 일화를 소개할까 한다. 태초에서도 여섯 번째 되는 날, 신은 자신의 형상을 닮은 존재를 만들었다. 그들의 이름은 아담과 하와. 이들이 살던 에덴동산은 참 근사한 동네라고 한다. 미움도 질투도 없었다고 하니 행복한 나날의 연속이었을까. 띵가띵가 잘 살던 커플은 어느 날 뱀의 꾐에 넘어간다. Danger 표시가 붙은 선악과 한 입 해봐, 그러면 세상이 달리 보일 거야! 한동안 고민에 빠졌던 철부지들은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선악을 구별하게 해 준다는 선악과를 한 입씩 한다. 사소해 보이지만 이 천인공노할 행위는 자비와 사랑의 상징인 신을 자극했고, 결국 커플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고생길을 걷는다.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다는 선악과. 대단한 무언가를 선사할 줄 알았던 그것은 인류에게 혼란과 시련을 푸짐히 안겨 주었다. 에덴동산을 떠나 가시밭길을 걷는 아담과 하와를 보면, 일상 속 지난한 다툼들도 선과 악을 확인하고 싶어 하던 커플 이야기의 연장선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선악과 스토리가 기원인지는 모르겠지만, 흔히들 대상을 판단할 때 선과 악이라는 좋음과 나쁨으로 구별하려 한다. 나쁨에 속한 순간 받는 지탄은 당연한 것. 나쁨이란 타이틀을 받은 사람들이 그 타이틀을 떼어내기 위한 싸움 혹은 좋음이란 타이틀을 받은 사람이 나쁨에 속한 사람들을 지우려는 싸움이 시작된다.


이때 한 가지 궁금증이 남는다. 좋음이 나쁨을 없애는 건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래서 세상에 좋음만 남을 수 있는 것일까. 좋음과 나쁨이란 이분화된 사고방식으로 작동하는 세상에서 좋음만 남는다는 건 불가능한 논리 아닐까. 좋음에도 위계질서가 있어서 하나의 악이 사라지는 순간, 8등급 선이 악이 되고, 7등급 선이 악으로 취급받는 건 아닐까. 이렇게 질문형 스무고개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선악의 논리에 갇혀 현생에서는 영원히 갈등을 그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내 입맛대로 막장 결론을 내려 본 선악과 궤변이 요즈음 새로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다. 얼마 전, 거부할 권리란 대단한 권리라는 걸 들은 후부터였나.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게 하려는 좋은 의도로 만들어진 좋은 권리니까 대단하지 않은가. 그런데 왠지 모르게 씁쓸하다. 망상충인 나는 거부하는 것에 권리가 덧붙여지는 순간, 거부가 당연시되는 사회가 떠오른다. 나에게 거부는 사회에서 선과 악의 유형들을 구별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좋은 것을 누가 거부하겠는가. 그래서 자기 개성이 강한 누군가를 보면 '나와 다른 사람이네'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거부를 외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개인의 의사표현이 너무나 자유로운 나머지, 서로를 거부하고 소수를 나쁨으로 인식해서 외면하는 사회. 그 외면이 당연한 것이 되어 자유롭지만 자유롭지 못한 사회 말이다. 좋음과 나쁨이란 흑백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좋음만 남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꼬리 자르기로 좋음만 남기려는 시도 역시 무의미하다. 나쁨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그 무의미함을 추구하는 게 그 대단한 거부할 권리다.


인류 역사 스테디셀러로 꼽히는 성경에서도 첫머리에 등장하는 이 에덴동산 선악과 스토리는 본질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된다고 한다. 에덴동산에는 언어란 기호가 없었다. 아담이 사물을 부르는 게 이름이었고, 그 직관적인 인식이 곧 사물의 본질이었다. 선과 악이라는 미묘한 선상을 오가는 언어가 개입할 틈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이후 등장한 언어라는 놈은 어떤 사물이든 판단할 대상으로 만들었다. 결국, 그 사물 자체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는 것보다 좋냐 나쁘냐를 우선시하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거부할 권리란 것도 본질에 대한 고민보다는 좋음과 나쁨을 판가름하는 데 급급하게 만든다. 그것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뒤로한 채 좋냐 나쁘냐로 편 가르기를 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정도에 사고회로의 작동이 그치고 만다. 결국, 그 자체에 대한 논의보다는 청팀, 백팀으로 나뉘어 서로가 치고받고, 목소리 큰 팀이 이기는 꼴이 된다.


이렇게 달려오다 보면,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오른다. 애초에 아담과 하와에 의해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선과 악을 구별하게 됐다면, 그 후예인 우리는 부득불 좋음과 나쁨을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왜 그렇게 용을 쓰냐고 말이다. 거부할 권리를 거부하는 당신 역시 거부함으로써 꼬리 자르기를 시도하는 거 아니냐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나도 거기에서 평생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에게는 나름의 지향점으로 생각하는 방향이 있고 그것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투표권도 없던 우리가 어느새 권력을 결정하는 주체가 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방향이 가리키는 곳은 인류가 절대 이룰 수 없다고 한들, 그리고 무어라 불리든 간에 모두가 잘 사는 이상사회일 것이다. 이때, 그 지향점으로 우리를 견인하는 사람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다는 걸 알고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꼬리 자르기로 우리의 일부를 갈라치기하는 것이 아니라 웬만하면 대부분을 함께 끌고 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 과정이 고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거부라는 판단을 권리로 예쁘장하니 포장하는 게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누군가는 거부를 거부한다는 논리를 두고 허황되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이뤄질 수 없는 걸 바라고 앉아 있으니 말이다. 혹 누군가는 필수불가결하게 이분법으로 나눠질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면, 한쪽 편에 서서 하나라도 더 누리는 게 낫지 않냐고 할 수 있겠다. 한 번뿐인 인생이지 않나. 그러기에 나는 발가락에 박힌 가시 하나에도 불편함을 참지 못하는 나약한 기질이다. 아 물론, 방구석에서 말이다. 그만큼 판단하기에 앞서 본질을 보려는 노력이 난이도 최상급이기 때문에 인류의 지혜 혹은 절대자의 말씀이 집약된 성경에서도 앞서 논하는 게 선악의 논리, 선악과이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활자 딜레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